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응갸 Oct 17. 2023

이체불만족1

-병가에서 복직한 지 50일 만에 다시 병가에 들어가게 된 건에 대하여








추석을 앞둔 사무실은 설렘을 숨기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합류한 지 얼마되지 않은 부서에 이제 막 적응해 가는 참이었다.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보통의 날이었다. 



그러다 흔히들 그러듯 미끄러운 복도에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곧장 중심을 잡아 복도에서 큰절을 올리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스스로의 운동신경을 칭찬하며 사무실로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오른쪽 발이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욱신거리는 게 심상치 않았다.

사고 경위를 봤을 때 심각한 일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도저히 걸을 수가 없어 참다참다 병원으로 향했다. 



깽깽이 발로 병원에 입성하자 직원들이 벌떡 일어나 휠체어에 서둘러 앉혔다. 

크게 다친 것도 아닌데 괜히 일을 키우는 것 같아 얼굴을 붉혔다. 

진료실에서도 수줍게 발을 내밀며 별일은 아닌데 걷기가 힘들다며 애로사항을 토로했다.

물리치료나 조금 받고 집에서 쉴 요량이었다. 



그런데 의사가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는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넘어진 거예요? 이렇게 심하게 부러졌는데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무지의 벌로 뼈 맞추는 고통을 그대로 느껴야만 했다. 

아무리 무디고 고통을 잘 참는 나라도, 소리를 지르지 않고는 베길 수가 없었다.


아픈 손을 치료한다고 냈던 6개월의 병가휴직 후 복직한 지 50일만의 일이었다. 








내게는 아부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병이 있다. 

그것은 ‘내가 없으면 회사가 돌아가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는 ‘무한책임증’이다. 

소싯적 아부지는 맹장이 터져도, 교통사고가 나도, 출근을 해 가족들의 복장을 터뜨리곤 했다.

그 증세는 아직도 유효한 지 일흔이 넘으신 요즘도 연차 한 번을 안 쓰신다. 



나 역시 발병시기는 꽤 되었으나, 스스로 인지하고 못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깁스를 한 채라도 회사에 가야 한다고 반려인에게 우겨댔다. 

순식간에 복장 수비수 입장에서 복장 공격수가 된 것이다.



“어제 갑자기 조퇴하느라 정리도 못하고 나왔단 말야! 오늘은 꼭 가야 해!”



마침 하루만 더 나가면 명절 연휴였다.

병원에서는 일주일 후에 잘 붙으면 통깁스로 바꾸면 될 것 같다고 말했기에 별 걱정은 없었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올 추석연휴는 길었기에 그 기간만 잘 쉬어주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일주일 뒤에 통깁스로 바꾸기만 하면 바로 회사로 출근할 수 있을 거란 계산이었다. 



하지만 일주일의 기대가 무색하게, 의사는 큰병원으로 가서 수술을 해야 할 것 같다는 선고를 내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회사에 남겨두고 온 업무가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내 표정을 읽은 반려인은 너의 몸이 먼저라며, 회사는 너 없어도 잘 돌아간다고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나는 수술이 금방 해결될 일처럼, 며칠 뒤에 복직해서 일을 해야 할 지, 연차를 며칠만 내면 될 지 계산하고 있었다. 

큰병원으로 옮겨 한참을 기다려서야 만난 의사는 골절모양이 영 좋지 않다며 적어도 일주일 입원을 생각하고 오라고 했다. 수술이 끝나고도 뼈가 잘 붙으려면 2~3달은 쉬는 게 좋겠다고, 행여 잘못 붙으면 평생 걸을 때 마다 발이 불편할 거라고 엄숙하게 선포했다. 그제서야 나는 정상근무의 욕심을 버리게 되었다. 

그제서야 옆에 선 반려인의 복장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픈 손을 치료한다고 냈던 6개월의 병가휴직 후 복직한 지 50일만의 일이었다. 








요즘 들어 ‘다른 입장’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 많다.

퇴원 후 티비를 켜보니 중동지역의 격렬한 분쟁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었다. 

선빵은 한 쪽이 날렸지만 역시나 복수가 시작되었고, 둘 사이의 싸움인 줄 알았으나 말리다가 맞거나, 싸움 이후의 계산기를 세 수 앞까지 두드려본 이해관계인들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이들의 암묵적인 룰은 절대 다들 자신의 ‘진짜 목적’을 밝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그 포장지를 ‘명분’이라 부르기도 했다. 




분쟁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들은 생과 사의 원초적인 본능이 우선인 가운데 

러-우 사태와는 다르게 여러 국가가 즉각 행동에 나섰고,


누군가는 오를 기름값을 걱정하고, 

누군가는 포털사이트에 이국 땅의 분쟁은 몰라도 되지 않냐고 묻고, 

누군가는 자신의 주식투자에 어떻게 반영할지 고민하고, 

누군가는 전쟁 이후의 콩고물에 관심이 많다.


매일 죽고사는 문제에 당면해 있는 분쟁지역의 사람들에겐 잔혹해 보이지만, 잘 생각해보면 인간사가 그렇게 발전을 해 왔다. 너와 나의 입장이 다른데 어떻게 100% 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움직여주겠는가?




이번에 갑작스레 다리를 다치면서도 그랬다. 




회사에서는 실시간 내 상태를 알고 싶어 했다. 

‘얼마나 다친거냐’ 보다 ‘얼마나 쉬어야 하냐’는 질문을 주로 받았다. 그래야 하루라도 빨리 인원 충원을 신청할 테니. 

주변 지인들에게는 무작정 혼나기만 했다. 

그러게 조심하지 그랬냐고. 대낮에 회사 복도에서 걷다가 발등 뼈가 부러졌다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저 나의 부주의가 문제였다.

마더-인-로는 이번 추석에 내려가지 못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세상에 있지도 않은 손주를 걱정하시며 속상해 하셨다. 그러면 약도 먹어야 할 텐데, 그럼 얼마나 더 미뤄지는 거냐는 말도 잊지 않으셨다. 

엄마는 한숨부터 쉬셨다. 나보다 더 가슴 아파하셔서 늘 이런걸 다 말씀드리는 게 맞나 싶은 심정이지만, 수술까지 하는 상황에 더 이상 숨길 수 없었다. 

반려인에게는 너무 많이 혼나서 기억이 다 나지 않을 정도다. 크게 다쳤는데도 상황 인지를 못 한 것, 깽깽이로 돌아다닌 것, 목발이라도 짚고 회사에 가야 한다고 떼 쓴 것, 집안일 하나라도 하겠다고 끙끙 댔던 것. 아픈 사람을 너무 혼내기만 하니까 서운할 지경이었다. 


그냥 아프겠다 위로 받고, 치료 잘 받고 와라, 이거 하나 원했을 뿐인데, 내 마음과는 다른 반응으로 죄스런 마음이 들게 하는 현실이 속상했다.  

제일 속상한 것도, 아픈 것도 나일진데 아무도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 기분이 가라앉았다. 



반면에 그 무렵 반려인과 대화하면서 느낀 충격이 나를 더 성장하게 한 것 같다. 


어떻게든 회사에 가려고 우기는 나와, 하루라도 더 쉬라는 반려인의 갈등 중이었다. 

‘택시를 불러서 가겠다, 갈 땐 목발을 짚고, 회사 안에서는 휠체어를 타고 다니겠다. 꼭 당신이 도와주지 않아도 나 혼자 갈 수 있으니 가서 정리를 해야 한다.’ 피력하던 참이었다.


그때 듣다 못한 반려인이 외쳤다.

“네가 이기적이라는 생각은 안 해? 병원에서 절대 움직이지 말란 소리 못 들었어? 네가 이렇게 돌아다니다가 더 잘 못 되면 그동안 내가 노력한 건 다 물거품이 되는 거야! 왜 회사에 있는 사람들한테만 미안하고 나한테는 안 미안해? 가족한테 더 잘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때 난생 처음으로, ‘내가 없으면 회사가 돌아가지 않을 것’같은 이 어설픈 책임감이 내 가족을 괴롭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나에게는 그것이 ‘책임감’이었는데, 어쩌면 가족에게는 ‘고집’이었을 뿐이지 않았을까, 하는 지점에 이른 것이다. 

반려인은 내가 다친 이후, 이틀 밤을 새서 집안 물건의 동선을 전부 바꿔 놓았다. 휠체어가 다닐 수 있도록 선반은 전부 떼고, 문고리를 바꾸고, 화장실에 보조 손잡이를 달았다. 거실 한 켠에 캠핑용 냉장고와 책상을 놓고 그 위에 내 컴퓨터까지 세팅해 아예 움직일 일이 없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회사에 가야 할 일이 생길 때 마다 회사에 데려가고, 데려왔다. 물론 이 모든 수고가 너무나 감사했지만, 위 대화 전까지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더 다치면 반려인의 수고가 무용이 되는 것이고, 밖에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느라 덩달아 고생하는 반려인에게는 미안해하고 있지 않다.’는 지점 말이다. 


위 대화를 기점으로 티 내지 않으려 애썼지만 참으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부지 걱정으로 애태웠던 숱한 날들을 내 반려인에게 물려주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스스로가 한심했다. 나는 누구보다도 그 마음을 잘 아는 사람이니까. 



나의 명분은 ‘책임감’이었는데, 그 속마음은 ‘책임감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이기심’이었나 보다. 그 이기심을 위해 나의 가족이 희생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스스로의 고통에만 골몰하다 어리석게도 주변 사람들의 고생을 외면한 것이다. 1인칭 시점으로 바라보던 세상을, 전지적 시점으로 바꾸자 비로소 내 행동이 보이기 시작했다. 





퇴원하던 날 온 한 통의 연락은, 다시 한번 가족 입장에서 생각해 보리라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부모님이 타고 있던 차를 누군가 뒤에서 박는 교통사고가 났는데

엄마는 입원하시고, 아부지는 출근해야 해서 병원도 가지 않고 나가신다는 연락이었다. 


나는 곧 얼굴을 바꾸어 가족의 걱정을 토로하는 대변인이 되어있었다.







https://brunch.co.kr/@tinystyle/12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의 통화는 발행국마다 다르다.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