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긴대로 살게요 이제는
나는 네모다.
그것도 엄마, 아빠처럼 균형 잡힌 정사각형이 아니라,
비율이 영 형편 없는 사다리꼴이다.
내가 동경한 건 동그라미였다.
누구에나 쉽게 다가갈 수 있고,
누구든 활짝 마음을 열 수 있는.
어느모로 보나 동그라미는
남에게 해를 입힐 수 없는 무해한 부류였다.
어디를 가도 동그라미는 환영받는 존재였다.
어느 순간 거울을 보니,
동그라미가 되고 싶어 여기저기 제 살을 깎던 나는
불완전한 삼각형 어른이 되어있었다.
사람들은 모난 구석을 보고 손가락질 했다.
사다리꼴의 위아래 반전 매력을 가지지도 못했고,
어느 면으로 서나 안정적이지 못했다.
게다가 서툴게 깎아내린 꼭짓점들은 가까이 오려는 이들을
끔찍하게 상처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동그라미와는 더 거리가 멀어졌다.
무리에 자연스럽게 섞이고 싶었을 뿐인데,
나는 그 무엇도 아닌 혼종이 되어버린 것이다.
오랜만에 20년지기 동그라미를 만나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나 : 나는 네가 너무 부러워. 나도 남들한테 벽이 없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동 : 나는 네가 부러웠는데? 넌 사람들이 함부로 못하잖아.
만만히 보고 무례하게 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너는 몰라!
이건 나의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순간이었다.
지난 20년간 나는
동그라미를 부러워만 했지.
동그라미의 입장을 헤아려 본 적은 없었다.
어느 조직에서나 환영받지만,
동그라미는 늘 자신의 모습을 버리고
다른 다각형들의 모습을 맞춰주어야 했다.
그래서 이용당하고,
어쩌면 무시도 당했을 그 모습이 그려졌다.
그렇다면 나는?
부러 사람들이 다가오지도 않았지만,
다가온 사람들과 그럭저럭 잘 지내왔다.
그러다 어설프게 동그라미 흉내를 낼 적에
사람들은 나에게 기대와 실망을 반복했다.
단지 '둥글둥글 하다'라는 말이 듣고 싶어서
수많은 거짓부렁을 연기했다.
나는 일관성이 없는 사람이 돼버렸다.
수많은 지인을 잃었다.
고민은 현재진행형이다.
때로 사람들은 '사회생활'이라는 명목으로
본성을 숨기고 살아간다.
매일을 그렇게 살아내다보면
동그라미 지기의 푸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제는 오히려 자기 각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씩씩한 네모들의 커밍아웃이 멋있다.
반려인이 처음 내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우리는 문제 의식을 갖고있는 사람들이야.
다른 사람들의 정의에 맞출 필요 없어.
우리가 새로 정의하면 되는 거야.
청춘영화의 대사인 듯도 한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거부감 섞은 거리감을 느꼈다.
그러다 동그라미 지인을 만나고 온 최근에야
곱씹어 보게 된다.
우리집 반려인은 뭐랄까...
당최 몇 각형인지도 알 수 없는,
도형분류에 속하지 않는 '그것',
그래, 차라리 '그것'에 가깝다.
'그것'이 나를 알아보고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다.
살을 깎아내다 못생긴 삼각형이 된 내게.
그는 사실 내가 어떤 모습이던 상관없었다.
내가 변태중이란 사실을 눈여겨 봤던 모양.
그렇다면 나도 나로 살아갈 용기가 생긴다.
내가 어떤 모습이 되던,
나보다 더할 '그것'이 옆에 있다!
이왕지사 뾰족한 마당에, '별꼴'이 될 테다.
남들이 나를 유연하게 보지 않아도,
쉽게 친해지기 힘들대도,
어쩌면 더 고독해 진대도,
원래 나는 각진 사람임을 잊지 말자.
차라리 독보적인 '각'쟁이가 되어,
하늘의 별이 되리라.
'그것'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