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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오은 May 23. 2016

남은 이들에게 남겨진 '안전한 사회'

#16. 강남역 10번 출구 포스트잇 기록 어휘빈도 분석

  경향신문의 사건팀 기자들이 강남역 10번 출구에 게시됐던, 포스트잇 1,003건의 내용을 모두 기록했다.  기사제목 : [강남역 10번 출구 포스트잇] 경향신문이 1003건을 모두 기록했습니다 무엇보다 기록으로 남긴 그 노고와 열정에 감사하다. 그리고 어떤 메시지가 강남역 10번 출구에 남겨졌을지 궁금했던 난 이 자료를 바탕으로 어휘 빈도를 분석해봤다.(선뜻 강남역 10번 출구 사진을 제공해준 @오주석 에게도 감사의 말을 먼저 전한다.)



  명사 중에서는 여성이란 단어가 285회로 가장 많았다.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와 또 그로 인해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 여성들이 포스트잇을 많이 작성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명복과 고인 등이 각각 281회와 272회로 뒤를 이었다. ‘순수한’ 추모를 운운했던 이들이 무색하게, 사람들은 피해자에 대한 추모를 잊지 않았다. 이밖에도 혐오가 127회, 여성혐오가 67회 나왔다. 이번 사건을 여성혐오에 의한 계획된 살인으로 규정했던 목소리가 많이 반영됐다. 경찰의 프로파일링 결과는 이와 차이가 있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여성들의 범죄에 대한 불안감을 공감하고 함께 개선해나가야 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잠재적 가해자라는 표현도 44회 쓰였다. 지칭하는 명사는 모두 남자 또는 남성이었다. 이 단어를 두고 여러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성범죄의 경우 여성피해자가 95%다. 흉악범죄(강도, 살인, 방화 등)로 범위를 넓히면 여성 피해자가 90%다. 하지만 폭행, 상해 등을 포함하면 55%가 남성 피해자다. 그래서 살인이다 아니다, 혐오를 조장한다 등과 같은 날선 말이 댓글창에 달리고 있다. 다만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호명했던 그 배경을 생각해보면 이 단어에 남성이 분개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여성의 80%가 범죄피해를 걱정하는 현 사회를 개선해야만 한다는 사실만 분명해진다.

  동사 중에서는 ‘명복’과 함께 쓰였을 빕니다가 283회로 가장 많았다. 하다, 있다, 않다, 되다 등과 같은 일반동사를 제외하면 ‘살아남다’가 122회, ‘미안하다’가 102회였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살해된 고인을 통해 여성의 범죄에 대한 불안감을 환기함과 동시에 이런 사회에서 그동안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스스로에 대한 미안함이 포스트잇에 담겼음을 짐작해본다. 이밖에도 바라다와 만들다, 위하다 등의 동사가 50여 회 나타났다. 전체 동사 중에서 결코 많은 숫자는 아니다. 하지만 살아남아 미안한 우리가 앞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고, 누구를 위한 세상을 고민할지는 너무나 무겁고 크게 남아있다.

  형용사 중에서는 없는, 아닌, 좋은 등이 많이 쓰였다. 평소 우리가 문장에서 자주 쓰는 일반적인 표현이다. 뒤를 이어 무서운이 53회였다. 앞서 말했던 것과 같이 여성이 느끼는 범죄에 대한 두려움은 남성이 느끼는 것에 비해 상당한 오늘이다. 하지만 단순히 자신의 두려움만 담겨있지 않았다. 안전한 40회, 행복한 39회 등으로 앞서 동사와 같이 앞으로 우리가 만들어 나가야하는 사회에 대한 바람들도 글로 적혔다.

  남자로 태어났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가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과 이것을 두고 이야기만 여러 차례 했다. 그 사이에 수많은 사람은 추모를 했고, 포스트잇에 글을 적었으며 경향신문 기자들은 기록으로 남겼다. 혐오의 댓글이 범람하는 지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이 너무 많이 ‘말’만 했구나 자책한다.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아주 작더라도, 움직인 사람들의 덕임을 새삼 깨닫는다. 부끄럽고, 미안하면서도 감사하고 뜨거운 날이다.


PS- 기사로 제작하는 것을 고민해봤다. 팀장님은 그렇게 수고한 경향신문 기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기사를 읽고, 상념에 잠겼던 난, 그 사이에 또 생각이 참 게을렀다. 아아 정말 어른이 되려면 너무 멀었다.

권오은 직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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