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가 가기 전, 옷차림 논쟁
"바쁘니?"
"아니요, 왜요?"
"이리 와봐라. 이것 좀 입어봐라."
검은 통바지에 흰 줄무늬, 게다가 길이는 또 얼마나 긴지.
"이건 제가 제일 싫어하는 스타일이잖아요. 안 입어요!"
"상가 가는데 검은 정장을 입고 가야지. 맞는지 입어봐. 기냐? 길면 기장 좀 줄이고."
"어머니, 이 옷 싫어요. 제가 싫어하는 건 아무리 놔두셔도 안 입어요. 그냥 입던 거 입고 가면 되죠."
검은 반팔티에 검은 재킷으로 합의를, 합의라기보다는 내 고집대로 하겠다는 통보. 어렸을 적부터 예쁘게 꾸며주고 잡지 모델과 닮았다, 일본인 아니냐, 공주 같다는 아주 드문드문 그런 소리를 안 들은 것도 아니나(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게 슬픈 현실...), 자아가 강해진 뒤로 선머슴아 정도는 아니지만 늘 청바지에 운동화 그 차림이다.
"정장은 불편해요. 일하는데 거슬려요. 책상 치울 때 지우개 가루며 연필심 시커멓게 묻고요, 칠판에 글 쓸 때 불편해요."
늘 하는 말이다. 그래도 자리가 자리인지라, 또 어른들 눈에는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지라, 겉으로 볼 때도 슬픔에 동참하는 표시로 정장이 낫겠다는 생각이 스쳐간다.
지혜로운 여인, 딸이 툴툴거릴 때 그녀는 조용하다. 뒤이은 깨달음!
"검은 바지 입고 갈까요?"
"그냥 편하게 입고 가, 위에만 검은색 입고."
"네."
가신 이를 애도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저 어색한,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싶지 않을 뿐. 황소고집 아직도 살아있네.
"책상 위에 지우개 가루 좀 치워라.
여자가 걸을 때 쿵쿵 소리 내지 마라."
아버지는 조금 더 조신하지 못 한, 자신을 닮아, 한 고집하는 내게 종종 이르셨다. 중학교 시절 어느 날, 평균 90점이 넘은 딸에게 잘했다고 <<무소의 뿔처럼 가라>>와 서류에 동그란 구멍을 뚫는 기계를 내미셨다. 책은 좀 멋지다 싶은데, 아니 중학생에게 구멍 내는 기계를 선물로? 진짜 이해 안 가는 선물 아닌 선물.
아무튼 어제 병원도 들리지 못했는데, 샘이 온 줄 아는 제자의 문자에 덜컥 약속하고 아침부터 엄마와는 옷 실랑이. 아휴, 야수의 품성을 알아본 미녀와 달리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는 세상. 그래, 지금이 조선 시대 같으면 어디 감히 나같이 무지막지한 발언이 가당키나 했을까 싶어 조금은 씁쓸, 내가 너무 겪이 없나, 상대를 배려할 줄 모르나 반성도 된다.
"그냥 제자 얼굴 보러 가는 거예요. 청바지든 검은 정장 바지든 상관없고요. 그 아이 힘 실어주러 가는 거예요. 돈도 없어 쥐어짜야 하는 판에 부조금은 그래도 5만 원은 해야 하잖아요. 안 가면 안 갔지, 어떻게 빈손으로 가요? 제자의 고모는 미혼이라 자신의 가족도 없고 쓸쓸했을 텐데, 많은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런 곳에는 더 가봐야 되잖아요. 없어도 이런 곳은 꼭 가봐야 돼요."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 속마음까지 골치 아프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저 최선을 다할 것이다.
라면을 먹고 있는 내게 그녀가 던진 한 마디,
"너도 이제 나이 들었나 보다, 상갓집에 갈 옷이 필요한 거 보니..."
아, 인생이여! 계절의 여왕, 온 누리가 붉은 장미로 뒤덮인 5월에 검은 바지로 나이 들었다는 소리까지 들어야 하다니. 그래, 검은 바지든 청바지든 내 옷 입고 그들 속으로 살아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