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아도 씨앗은 자란다
어젯밤 어머니는 느닷없이 미용실에 예약하라고 하신다. 수요일 아니면 금요일로 잡으라고. 보통 예약은 최소 며칠 전에 하는 게 아닌가. 어머니 명령이므로 저장된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꽤 늦은 시각이었지만 잠시 후 답장이 왔다. 금요일 오전 11시에 오라고. 어머니는 멋쟁이라 눈에 빤히 보이는 흰머리가 많이 신경 쓰이나 보다. 내게도 따라가자고 하신다. 살짝 귀찮고 뿌리 염색한 지 2달이 지났는데, 건강상 조금 더 있다가 하고 싶었다. 그래도 어머니 눈에 딸이 더 예뻐 보이길 원하는 것 같아 효도의 일환으로 알겠다고 했다.
이른 아침, 미용실 사장님께 전화가 왔다. 오전에 올 수 있냐고. 갈 수 있다고 했다. 금요일 시각보다 30분 당겨진 시각이라 더 좋았다. 데이트 삼아 어머니와 시간 맞춰 미용실로 향했다. 날씨가 좋아 미세먼지가 덜하다. 산이 푸르다고 좋아하는 어머니. 미용실 가는 길목, 이름 모를 나무에 하얀 꽃이 피어 보기 좋다. 가뿐한 마음으로 미용실로 들어갔다. 먼저 나와있는 미용실 사장님.
어머니는 먼저 자리에 앉아, 얼마 전 은행 ATM기에서 돈 뽑다 통장을 안 뽑아 보안업체까지 불러 통장 찾은 이야기를 꺼낸다. 그런데 미용실 사장님 아버님은 코로나 때, 돈을 찾다 가방을 올려뒀는데, 다시 은행에 갔을 때는 가방이 사라지고 없었다고 한다. 어머님은 보이스피싱으로 정보가 털려 가해자들이 대출받은 돈까지 갚느라 스트레스가 심해서 당뇨까지 왔다고. 듣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나쁜 놈들! 너희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땀 흘려 일할 생각 안 하고 남의 정보 캐내어 피고름 짜내듯 그런 짓이나 하고 다니고. 남일 같지 않았다.
"제가 자꾸 깜빡해서요."
보이스피싱 이야기가 나오게 된 계기는 열대작물인 잭프릇 씨앗 때문이다. 어느새 우리 집 식구는 이 미용실 단골이 되었는데, 꽃나무 좋아하는 동생이 미용실 화분에 꽃도 심고 신경을 써 준 덕분에 미용실 사장님이 동생에게 잭프릇 씨앗을 주기로 한 모양이다. 물을 좋아해서 종이컵에 자작하게 물을 넣고 씨앗을 넣어뒀는데 새 촉이 올라왔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과일이 굉장히 크고 무거워서 나무 아래쪽에 달리나 보다. 이 과일은 알레르기가 있어 사람에 따라 조심해서 먹어야 한다는 블로그 설명도 나와있다.
강낭콩보다 더 크고, 레몬빛 새 촉이 사랑스러워 사진을 찍었다. 집에 정원이 있으면 더 좋을 텐데. 그럼 마당에 있는 흙에 심고 커다란 과실나무가 되도록 애정을 듬뿍 줄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했다. 아무렴 어때? 큰 화분에 심고 어떻게 자라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클 것 같다.
머리 감는 기계 옆, 창가에 동생의 손길이 깃든 화분이 나란히 놓여있다. 소라 껍데기 속 다육이와 제라늄 사이에 잭프릇 씨앗이 대나무처럼 올곧게 자라고 있다. 지금은 작아도 상상 이상으로 커질 텐데... 나중에 어쩌시려고, 오지랖 많고 상상력도 충만한 INFP형 인간은 벌써 미래로 달려가 걱정하고 있다.
지난번에는 트리트먼트를 서비스로 해주시더니, 오늘은 어머니가 뿌리 염색 전에 정리한 머리 비용을 받지 않으신다. 커트는 공짜라고 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데, 어머니는 어제 사장님께 전해줄 바나나를 준비해 두었다.
"친정 엄마 같아요."
서로를 챙겨주고자 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된 걸까? 종일 밥도 못 먹고 머리 만지며 일하느라 굶을 미용실 사장님을 안쓰럽게 여기는 어머니 마음 덕분에 앞머리 단장한 값도 공짜. 이제 단골이라 뿌리 염색을 하고 나서는 앞머리를 알아서 정리해 주신다.
대화를 하다 보면 누군가를 이해하게 된다. 혼자 생각에 갇혀 오해의 늪으로 빠지지 않고, 소통하는 힘은 결국 상대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내 것을 아끼지 않고 나눌 때. 물질이든 시간이든 에너지이든. 상대방은 아는 듯하다. 동생의 재능기부(?)와 어머니의 바나나, 사장님의 잭프릇 씨앗 나눔에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웃고 사진 찍은 나까지. 이웃사촌이 만든 행복이다. 이 행복감을 가지고 동생네, 밀린 설거지 해야 한다. 오, 주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