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들기 좋은 계절
요즘 그림 그리는 재미에 빠져있다. 그림은 첫사랑이라서 어릴 적 꿈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유치원 모래밭부터 종이에 이르기까지 드레스 입은 여자를 수없이 그렸고, 학교 쉬는 시간마다 교과서 귀퉁이에 낙서 삼아 끄적이던 순간들은 아련한 추억이자 꿈 그 자체였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가을꽃은 국화이다. 봄에는 프리지어, 겨울에는 안개, 가을은 국화. 여름은 날이 더워 꽃이 시들기 쉽다고 꽃 사면 아깝다 하신다.
황금국화가 공동구매로 저렴한 가격에 나왔길래, 냉큼 주문했다. 국화의 장점은 향이 짙고, 날이 추워도 금세 시들지 않고 오래도록 형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매일 줄기 밑을 사선으로 자르고 물을 갈아준 후, 조금씩 시들어가는 기미가 보여 더 늦기 전에 그림으로 남기자고 마음먹었다.
드로잉 재료는 가격이 있는 편이다. 그러나 더 이상 미루다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아 과감하게 질렀다. 수채화 물감과 붓, 일제 도자기 그릇을 팔레트 삼아 프랑스산 코튼지에 슥슥 그린다. 입시를 위한 미대준비생도, 공모전에 낼 작품도 아니라서 자유롭게 그렸다. 크로키 삼은 밑바탕에 손 가는 대로 터치한다.
지난 토요일 부산 현대미술관에 길눈 밝은 지인의 가이드로 힐마 아프 클린트의 <적절환 소환> 전시회에 다녀왔다. 워낙 길치라서 혼자 지하철도 못 타기 때문에 지인의 찬스가 없었다면 용기 내지 못했으리라. 벼르고 별러 날 잡고 잡아 어머니 검정 원피스 입고, 청남방 걸치고 오랜만에 힐링했다.
힐마는 최초의 추상화를 그린 화가지만, 남성들에 가려진 건지 드러나지 않다가 어느 전시회를 통해 혜성처럼 나타났다고 한다. 자신이 죽고 20년이 지난 후, 작품을 공개하라는 유언까지 남겼다니, 보통 위인은 아니었나 보다. 그래서 그럴까? 그녀는 우주 속 신적 존재와 접신하듯 강한 정신적 에너지를 화폭에 옮겼다.
스승과 친구의 영향으로 그림에 대한 애정을 죽을 때까지 놓지 않았던 사람. 연대기별로 전시된 그림을 보면서 무언가에 몰입하면 저리 될 수 있구나,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
오늘 완성한 '황금빛 가을'도 에너지가 폭발하듯 물감이 번져 재미있게 표현된 게 아닐까? 자화자찬해 본다.
자궁근종 치료로 아무거나 먹을 수 없기 때문에 미리 사놓은 쌀소면과 튀김가루. 물론 100% 완전한 쌀제품은 아니겠지만, 밀가루보다 속이 덜 부대끼고 편안하다. 어머니 쌀국수가 딸의 시선에서는 하나의 예술작품 같아 찍었다. 흩어진 가락과 오이 고명에 버무려진 소면이 청량한 느낌을 준다. 이 모든 것이 행복을 이루는 요소.
그러나 세상은 늘 아름답기만 한 게 아니다. 어느 젊은이가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열정 다해 일한 결과는 과로사. 그 일이 남일 같지 않은 것은 동생도 현장에서 열심히 일해도 보상 못 받고 쫓겨나듯 그만둔 경험이 있어서이다. 조카들도 나중에 현장에서 일할 지도 모르는데, 누구보다 진심으로 노력하고 애쓴 청춘이 그토록 아프게 세상을 떠난 점이 서글프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물들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서글픈 일도, 애석한 일도 끊이지 않는 이 가을. 노란 은행빛과 황금빛 국화처럼 작은 온기라도 나눌 수 있다면 행복하다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해도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는 작은 힘은 생기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