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술을 끊었습니다.유방암 덕분입니다.

고마운 암.

by 세렌디퍼

수십 년간 부어라 마신 소주가 얼마나 될까? 성인이 임박했음을 알리던 그쯤부터 마흔 중반이 되던 해까지 나름 이슬만 마시는 여자라 자부하며 우쭐대던 시절이 이제 추억으로 남는다.


술을 벗으로 지냈다. 혼자 시작한 반주 한잔이 한 병이 되고 빨간 오리지널 뚜껑을 좋아하게 됐으며, 최후에는 독주를 즐겨 마셨다. 별 다른 이유나 취향은 없었다. 그저 몽롱하게 취하는 기분을 빨리 갖고 싶었을 뿐. 술의 종류에는 거창한 가치나 신념 따윈 필요 없었다.


그렇게 평생 마실 술을 다 마셨나 보다. 총질량의법칙이랄까?

이제는 술잔대신 책을 집어든다. 우아한 척도 있어 보이는 척도 아니고 생존을 위한 방법으로 가장 안전한 세이프존에 입성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흔들린다. 다시 엉망으로 취해보고 싶다는 생각, 현실을 도피하고 싶은 작정이 들 때면 독주를 들이붓던 그 시절에 서고 싶다. (사람은 정말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 얄팍한 동물임을 나를 통해 배운다.) 내가 나를 흐릿하게 볼 수 있는 유일한 시간과 자격을 얻어 하염없이 빠져드는 나를 그 누구도 막을 순 없던 그때로.




벌써 1년이 넘게 간혹 논알코올맥주로 마시고 싶은 허기짐을 달래 본다. 알코올대신 커피가 늘었으며, 간식 없인 힘들고 엄청난 단맛에 중독되어 안 먹던 군것질을 하는 대체중독에 빠졌지만 운동도 열심히 하니까, 하며 합리화하며.


생각을 더듬어보니, 알코올중독을 암이 막아준 꼴이다.

그 무엇도 20년이 넘게 마시던 알코올을 stop 시켜 주지 못했는데 그 어려운 걸 아이러니하게 ’ 암‘이 해냈다. 하, 참나 웃플 뿐이다.



이젠 술 없이도 눈물이 나고

이젠 술 없이도 내 이야기를 하고

이젠 술 없이도 노래를 부른다.

이젠 술 없이도 아픔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는 용기가 생겼다.


진통제를 맞듯, 고통이 시작될 기미가 보이면 핑계 삶아

아, 오늘은 한 병이면 되겠어,

아, 오늘은 독주로 가야지,

아, 오늘은 가볍게 맥주로 달래야지!

(써 내려가다 보니, 창피함이 몰려온다.)


지금의 나는 셀프 독서처방을 한다.


위로가 필요할 땐, 에세이.

느슨한 마음을 다잡을 땐, 자기 계발서.

주말엔 시간 순삭되는 소설.

무식함을 포장하고 싶을 땐 사회과학.

삶의 깊이를 배우고 싶을 땐 인문고전.


오늘도 술잔대신 커피를 내려 책을 집어 들고 나의 주치의인 나는 꿈을 꾼다.


에세이 출간작가가 되어 , 나의 작은 책방에서 북토크를 하는 그 장면을.


너무 늦어지면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 아무도 만나러 오지 않으려나.

그럼 어떠한가.

살아생전 결국 이뤄낸 꿈인 것을.












keyword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