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통의 보편성과 시.
포기하지 말기
자이언트 세쿼이아 브리슬콘 파인 크레오소트 관목 모하비 유카 꿀버섯 박스 허클베리 파머 참나무 판도 상원의원 나무 지도 이끼 야레타 알레르세 뇌산호 포팅갈 주목 100마리 말의 밤나무 포시도니아 해초 올리부 나무 가문비 나무 조몬 삼나무 스리마하 보리수 시베리아 방성균 바오밥 나무 지하 삼림 웰위치아 남극 너도밤나무 다즈마니아 로마티아 휴언 파인 유칼립투스 스트로마톨라이트 엘리펀트섬 이끼 사우스조지아 섬 이끼...... 인류가 자신들의 시간을 영으로 되돌린 기원 전부터 광엄하게 존재해온 이들의 거대한 이름들을 소리내어 읊어본다 가슴 저 안에서부터 온 몸으로 그 울림이 퍼져 나가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의 끝까지 손가락 발가락 끝까지 피부 숨구멍 솜털 한 올 한 올의 끝까지 그것이 온전히 도달할 때까지 소리내어 읊어본다 풍요로운 원시지구 빙하기 지각변동 홍수 가뭄 그리고 무지한 인류가 야만적으로 지구를 범하기 시작해 지금에 이른 그 모든 순간들을 경험한 그대들의 고대로부터의 숨이, 그 지고한 인내와 지혜의 정수가 담긴 결이 혹시 이 보잘 것 없고 하찮고 미미한 생의 명에도 찬찬히 곱게 성기고 굵게 생겨날까 바라면서 이 오만하고 겁 없는 바람에 그 숨결을 조금이라도 담아 보리라 고요히 눈을 감고 앉아 그대들의 이름을 읊어 본다 격동하고 뜨겁고 시리고 시원하고 녹아가고 다시 태어나고 꺾이고 바스러지고 피어나고 사그라들고 다시 또 흙과 중력을 밀어내고 솟아오르고 기꺼이 비와 바람을 맞으며 흔들린다 벅차오른다 허리가 숙여진다 눈물이 흐른다 그렇게 다시금 모든 생이 찬란해졌다 생이 찬란하다.
4월 마지막 주가 지나갔다. 한 주가 어떻게 지나가졌는지 모르겠다. 함부로 자신의 가지에 깃든 생명들을 비워내지 않는 어떤 나무를 생각하며 나또한 온갖 생의 무게감으로 굽고 휘어지더라도 열심히 살아내 보리라 마음결을 가다듬었던 지난 주의 글을 다시 읽어 보았다. 그래도 힘든 건 힘든거였나 보다. 굽고 굽어서 그만 내 고개가 다시 저 바닥을 내려다 보고 있었던 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내게는 이번 한 주도 여전히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쳐서 꽤 힘겹게 매일을 버텨내었던 그런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커피와 배달음식으로 끼니를 채워댔고, 침대에 널브러진 채 유튜브와 인스타 알고리즘에 정신줄을 맡기곤 했다. 몸도 마음도 더 쳐지고 무거워져만 갔고, 그저 견뎌내는 것으로 채워나가곤 했더랬다. 나만 그랬던 건 아닌가 보다. 함께 시치유 공부를 하고 계시는 분께서 이런 화두를 나누어 주셨기 때문이다. 이제는 <흥부와 놀부>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새로운 관점으로 읽혀지는 것처럼 푸쉬킨의 <삶>에 나오는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 오리니’와 같은 시구들도 새롭게 읽혀져야 하는 것은 아닌지, 시치료를 기반으로 하는 심리학적 관점에서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읽어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이 된다는 내용이었다. 몇 주 전, <곰과 호랑이>라는 시를 적어 내려가면서 나또한 이런 고민을 한 적이 있었고, 그에 대한 내 나름의 해답을 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주 내내 다시금 또 ‘견뎌내기’를 그저 시연하고 있었던 터라 이 화두에 대한 오늘의 배움이 내겐 꼭 목마른 사슴이 찾은 깊은 산 속 옹달샘 같은 느낌이었다. 수업을 다 듣고 나서도 책상 앞에서 자리를 뜨지 못하고 수업자료들을 읽고 또 읽었더랬다. ‘참고 견디면’이라는 표현이 내 안에서도 치료와 회복의 언어로 읽혀질 때까지 읽고 읽고 또 읽었더랬다. ‘참고 견디면’이라는 시구 하나에 한정적으로 몰입하려 하는 나 자신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었고, 푸쉬킨의 시 <삶>을 통째로,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번 읽고 또 읽어야만 했다. 스승님께서 재해석해주신 시치료적 관점에서의 푸쉬킨의 시는 그렇게 읽혀졌기 때문이다. ‘참고 견디면’에만 에너지를 쏟게 되면 정말 ‘참고 견디’게 되어 버리게 된달까. 푸쉬킨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 시를 통째로 읽고 또 읽으며 삶을 이렇게 재해석하는 관점으로 바꾸어내야만 했다. 스승님께서 내주신 과제에는 실은 이와 동시에 하나가 더 있었다. ‘인생을 살다 보면, 삶의 어떤 순간에 어떤 종류의 고통이든 겪게 되는 것은 인생의 본질 중 하나일 뿐, 고통이 곧 나 자신이 아니며, 고통에 대한 나의 반응이나 태도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나는 고통을 원치 않으며,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고, 내가 뭘 잘못했느냐’고 악다구니를 해대는 자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고통은 보편성을 가지고 있음을, 그것은 삶을 살아내고 있는 존재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임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해내야만 했더랬다. 그것을 해내지 못하면, 삶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고통을 긍정해내지 못하면,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새로운 이상만을 추구하는 상태인 파랑새 증후군에 빠져 몽상이나 하면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신경증적 현상인 욕구불만, 갈등, 스트레스, 심리적 긴장감이 발생해 피로감과 무기력감에 자신을 통째로 먹이로 내어주게 될 뿐임을 이해해내야만 했다. 머리로는 이 모든 내용들이 이해됨에도 불구하고 부정과 거부, 저항만이 가득한 ‘난 고통이 싫어. 삶이 고통이라면 난 차라리 삶을 거부하겠어. 난 삶이 싫어. 삶이 고통이라니. 너무 재미없다. 살기 싫다. 의미없다. 지겹다.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니. 그것이 계속된다니. 끔찍해.’라는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혀댔다. 그런 내면의 소리들을 들으며 여전히 이 안에 참으로 오만하고 교만한 자아가 독사마냥 똬리를 틀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뭐라고, 나라는 존재가 뭐 그리 잘났고 특별하다고 다들 겪는 일들에서 벗어나겠다고, 그 과업에서 제외되고 싶다고 악악거려대고 있는지 참으로 딱할 노릇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그 소리들을 멈추게 하지 못하는 나를 보며 푸쉬킨의 <삶>을 읽고 또 읽었다. 내 안에서 끊임없이 악악대는 자아에게 '삶이 우리를 속이는 것 같지만,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필요 없다'고, '그런 순간들을 참고 견디면 기쁨도 온다'고, 미래에 살고 있는 이 마음, 과거의 슬픔에 살고 있는 이 마음, 이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자나갈 것이며, 실없게도 지나간 그것이 다시 그리워지기도 하는 게 인생이라고 읽어주고 또 읽어주었더랬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문득, 그리고 번뜩! 내가 지금 참고 견디고 있는 것이 나의 소중한 생이 아니라 어리석고 오만한 자아의 말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아버렸다! 그러고는 ‘아, 이건 참고 견딜 필요 없어. 내버려, 이 녀석!’하고 단호하게 뱉어냈고, 드디어 드디어! 비워진 그 자리에 ‘고통은 보편성이다’라는 씨앗을 심는데 드디어! 성공했더랬다. 그랬더니 정말 푸쉬킨의 시어처럼 그 자리에 기쁨이 피어났다. 그 씨앗이 자라 듬직하고 푸르른 나무가 되어가는 것을 상상했다. 그 푸르름을 얻기까지의 여정이 고통이 아나리 거룩함으로 변모하였다. 문득 무척 좋아하는, 레이첼 서스만의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나무 이야기: 위대한 생존>이라는 책이 생각나 꺼내어 펼쳤다. 책의 목차에 나오는 모든 나무들의 이름을 읊었다. 오늘 내 안에 심은 이 나무도 그 나무들의 뿌리에서 나온 어떤, 아직은 너무 보잘 것 없고 작지만, 분명 그런 나무일거라 혼잣말을 하였더랬다. 책에 가득 실려 있는 생명체들의 싱그러운 사진들을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다시 나의 생도, 몸과 마음도 싱그러움을 조금씩 되찾아 갔다.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가서 시원한 물 한 잔을 벌컥벌컥 마셨고, 냉장고로 가서 사과 하나를 꺼내어 뽀도독하게 깨끗이 씻어 껍질 채 꼭꼭 씹어 넘겼다. 그 다음에는 화장실로 들어가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와서 위의 시를 적어내려갔고, 이 글을 썼다. 아, 살 것 같다. 오만한 악바리 자아의 소리를 참고 견뎠던 시간의 끝에서 결국에는 삶의 기쁨을 길어 올리는 데 성공했다! 오늘도 시치유의 마법은 효과를 발휘해 주었다.
이번 주 시치료 수업에서 또하나 배웠던 시, 엘리자베스 아펠의 <위험>이라는 시가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가슴에 닿는다. 속된 말로 가슴이 웅장해지는 것만 같다. 꽃을 피워냈을 때 겪을 고통이나 어려움이 두려워 봉오리 속에 단단히 숨어있으려 했던, 그것이 안전하고 안락할거라는 달콤한 속임수에 속아 나를 나태와 도태로, 피로감과 무기력으로 몰아 넣었던 시간들이 더 고통스러운 날들이었던 것임을 이제는 정말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깊디 깊은 지혜의 어딘가에 아주 조금은 가 닿은 듯한 느낌이다. 오늘도 오늘의 배움 앞에서 이렇게 또다시 너무나 감사해진다.
시여, 부디 계속해서 제게 이 감사 가득한 여정의 지도가 되어 주소서. 그 지도를 꼭꼭 숨겨 감추어 지니고 있는 강인하고 아름다운 그대가 이 세상 여기저기에 퍼져 나가 더 많은 이들이 주어진 생을 이렇게 감사함으로 걸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감사하다. 안다. 알고 있다. 이 세상에는 시인들과 시가 넘쳐나게 있음을. 만천하에 한껏 드러내주고 있으면서 동시에 모든 걸 감추며 그 정수를 잘 보호하고 지켜내고 있는 수많은 시들... . 읽어내야 할 것들, 배워야 할 것들이 무한하다. 내일도 열심히 걸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