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해서 기적 같은 나날들 Ep.1
나의 대학 시절을 충만하게 한 것들이 있다. 클럽과 라운지 바 그 언저리에서 애매한 포지션으로 회기의 밤을 뜨겁게 달군 인디 펍, 명색이 중앙 동아리 건물 이건만 행색은 다 쓰러져 가는 7층짜리 잿빛 건물에 위치한 동아리방의 공기, 남자 친구와 대학 시절을 함께한 옥탑방에서의 나날들, 그리고 그곳에서 보던 무한도전이 대표적이다. TV를 산 이유도 아마 무한도전을 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중고나라에서 2만 원을 주고 사 온 그 TV는 투박한 브라운관이 몸집의 절반을 차지하는 데다, 버튼을 누를 때마다 딸깍 딸깍 날카로운 소리를 내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옛날 TV였는데 우리는 그것을 처음 가져온 날 물티슈로 애지중지 쓸고 닦고 털어내며 무한도전 본 방송을 볼 생각에 한껏 들떠있었다.
무한도전을 하는 날이면 약속이라도 한 듯 얼음장 같이 시원한 캔맥주를 까고 치킨을 먹었다. 사실 나는 그를 만나기 전까지 무한도전을 토요일 저녁마다 챙겨볼 정도로 애청자는 아니었는데 평소 진중하고 침착한 그가 무한도전을 볼 때면 치열이 고르지 않아 꽁꽁 감춰두었던 치아를 훤히 드러내고 눈물까지 흘리며 꺼이꺼이 웃는 모습이 사랑스러웠고 그래서 더 무한도전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비교적 연애 초반에 그와 방귀를 트게 된 것도 무한도전 때문이다. 그가 벽에 기대어 앉아 다리를 A자로 펼치면 나는 그의 가랑이에 몸을 포개어 가슴팍을 등받이 삼아 앉거나 눕는 형태로 무한도전을 보았는데 그가 실없는 웃음과 폭소, 눈물 단계를 거쳐 웃음 무장 해제 상태에 이르러 그만 방귀를 뀐 것이다. 그때가 첫 방귀를 튼 날이자 새삼 방귀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게 된 날이기도 하다. 그의 가랑이에 포개어져 있던 내 등이 5cm가량 붕 떴기 때문이다. 그는 과장이 심하다며 펄쩍 뛰었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정말 그랬다.
그에게는 4살 터울 진 형이 한 명 있는데 대학 시절 여자 친구랑 심하게 싸운 날 냉전 상태에서 곁눈질로 상상플러스를 보다가 빵 터져서 그 뒤로 연인 관계가 끝났다는 웃픈 에피소드를 들려준 적이 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형제가 참 예능에 취약하네 싶다가도 형의 여자 친구에 빙의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나 같아도 헤어질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무한도전을 보다가 내가 그의 형이 되고 말았다. 어제저녁 사소한 이유로 토라져 있었는데 호르몬 탓인지 뭔지 그 감정이 점점 부풀어서 자기 전에 그만 울고 말았다. 그는 어쩔 줄 모르며 반성 모드에 돌입했다. 임신 후에 어떤 이유에서든지 일단 내가 서운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져주기 때문에 그로서는 더 답답하기도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내일 이야기하고 싶다는 내 말에 우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대에 멀찌감치 떨어져서 잠이 들었다. 나는 발끝이라도 닿을라 치면 신경을 한껏 곤두세워 피하기를 몇 번. 새벽에 갑자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종종 꾸는 슬픈 꿈의 연장선상이었다. 나는 얼핏 들었지만 몸이 무겁기도 하고 아직 고집스러운 마음이 부유하고 있어서 쉽사리 그를 안아주지 못했다. 미안한 마음에 그가 새벽 운동을 다녀온 시간에 맞춰 도시락을 후다닥 쌌다.
태연하게 침대에 누웠지만 그와 풀고 싶은 마음 반, 새벽에 운 이유가 궁금한 탓에 잠이 오지 않아 괜히 핸드폰을 만지작 대다 유튜브를 튼 것이 화근이었다. 유튜브 알고리즘 녀석이 용케도 <무한상사 회식 박명수 편>을 상단에 올려두었는데 초반부터 자꾸만 입꼬리가 씰룩 씰룩거렸다. 영상을 끄지는 못하고 마음속으로 명수 아저씨한테 제발 그만 웃겨달라고 되뇌기를 반복하다 결국 입 밖으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황급히 베개로 얼굴을 막고 하품으로 승화했지만 출근 5분 전 그가 내게로 다가와서 물었다.
- 아까 뭐가 그렇게 재밌었어? 예진아, 같이 좀 보자. 웃으니까 보기 좋더라.
이미 그는 화장대 거울을 통해 나의 실없는 웃음을 본 모양이다. 퇴근까지 새초롬하게 토라져있겠노라 한 나의 굳은 다짐은 허무하게 끝이 났지만 한편으로는 종영한 지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무한도전은 우리의 삶을 5cm 붕 뜨게 만드는 마법 같은 힘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2022.08.25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