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筆 라디오 006
“5층 집 가고 시피퍼.” 요즘 루아가 자주 하는 말이다. ‘싶다’는 말을 ‘시피퍼’라고 늘여 말하는 루아는 5층 집뿐 아니라 7층, 10층 집도 가보고 싶단다. 숫자를 알게 된 뒤로 ‘명, 마리, 시’와 같은 단위들이 신기한가 보다.
처음에는 그저 층수를 말해보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떤 곳에 가고 싶은 이유가 꽤 구체적이다. 강릉 할머니 집 안방에 있는 색깔 조명을 보고 싶다 하고, 주영이 이모 집 2층에 있는 회전목마를 보고 싶다 하고, 재진 이모네 베란다 쪽에 있는 식물을 보고 싶다고 한다. 책 속에서도 비슷하다. 아기 돼지를 괴롭히는 늑대보다는 셋째 돼지가 지은 벽돌집이 궁금한 아이. 집 안의 액자, 어항, 식물 같은 것들을 면밀히 살핀다. 루아에게 ‘층’은 단순한 높이가 아니라, 이야기가 켜켜이 쌓이는 세계인 걸까.
나는 가끔 루아가 되어 동네를 걷는다. 아파트 옆에는 ‘땅콩주택’이라 불리는 집들이 모여 있고, 그 뒤로 야트막한 산자락을 따라 스무 채 남짓의 전원주택 단지가 이어진다. 나는 집과 집 사이를 아주 느린 걸음으로 들여다본다.
외벽 재질, 지붕 색, 문과 창문의 모양, 울타리의 유무. 그리고 무엇보다 마당. 어떤 꽃과 나무를 심었는지, 산의 초록빛과 어울리는지, 종종 마음에 드는 수종은 검색해 저장한다. 그렇게 한 시간쯤 걷다 보면, 집을 보고 있는데 어쩐지 이들의 ‘꿈’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든다. 전원주택에 사는 사람들은 마음속에 꿈을 품고 사는 사람들 같다. 이 집을 팔면 얼마가 남을까 하는 그런 계산 보다 지금 내가 심고 싶은 것들, 가꾸고 싶은 것들, 바라보고 싶은 것들에 마음을 두고 사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래서 무기력할 때 아주 천천히 집과 집 사이를 돈다. 그러면 새롭거나 잊고 있던 꿈이 움튼다. 나는 아이에게 꿈을 꾸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아이보다 먼저 나부터 꿈을 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어쩌면 이루기 힘든 꿈일지라도. 훗날 마당에 반드시 무엇을 심겠다와 같은 아기자기한 꿈일지라도. 오늘도 루아처럼 걸었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는 게 아니라, 아이가 그렇게 한번 생각하기 시작하면 세상이 그렇게 되어버리는 거야.” - <은중과 상연>
2025.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