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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원 Jul 22. 2019

오래 사세요

만수무강하라는 덕담은 철 지난 이야기


 'OECD 보건통계 2019'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2017년 기준 출생자의 기대 수명이 82.7세로 OECD 국가 평균보다 2세 정도 높았다. 이 결과는 우리나라의 의료 서비스가 꽤나 양호하다는 점을 반증하는 듯하다. 그러나 여전히 인구 10만 명 당 자살률이 24.6명으로 2위에 랭크되어 있다는 것은 역시 우리에겐 얼마나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한 이슈임을 확실하게 한다.

 

 다들 그런 경험이 있나 궁금하다. 할머니, 할아버지께 덕담이랍시고 "만수무강하세요"했다가 되레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핀잔을 들었던 기억. 재작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항상 여기가 쑤시고 저기가 아프다는 말씀을 달고 사셨다. 그러시면서 한 소리 더 하셨다. "얼른 죽어야지". 당시엔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나 했지만 1년 가까이 요양원에서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하시다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미련 없는 편안한 얼굴에 그때 하셨던 말씀이 진심이셨다는 걸 알아버렸다. 이렇게 인간에겐 몇 해 더 사는 게 아니라 스스로 얼마나 인간으로서 가치 있는 삶을 사는가가 더 큰 의미를 지닌다.



적당히 건강하라


 나고 나오키의 저서 <적당히 건강하라>에선 인간은 평균 수명과 관계없이 70세 이후부터 급격히 죽음과 가까워진다고 말한다. 70세를 기점으로 건강 상태가 이전보다 빨리 악화된다는 것이다. 이 견해가 옳다면, 단순하게 평균 수명을 연장한다는 것이 평균 건강 수명의 연장을 의미하진 않는다. 오히려 평균 수명이 연장되는 만큼 70세 이후 비건강 수명이 연장될 것이 분명하다. 앞선 기대 수명 상승이 반증하는 바가 의료 서비스 질의 상승이라 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는 70세 이후 건강 수치 그래프의 하향 곡선을 상향 곡선으로 바꿔놓는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저 건강 수치가 '0', 죽음으로 가기까지의 하향 곡선의 기울기를 완만하게 해 줄 뿐이었다. 혹은 죽음 직전인 건강 수치 '1'의 무의미한 유지를 의미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이번 OECD의 기대 수명 발표가 마냥 달갑게만 느껴지진 않는다.



스위스의 디그니타스


디그니타스 홈페이지. 디그니타스는 라틴어로 ‘존엄’이란 뜻이다.

 


 스위스 취리히 소재의 디그니타스 병원은 죽을 권리를 주장하는 환자에게 조력자살을 지원하는 단체이다. 그동안 받은 의료 기록을 제출하고 일정 금액의 입회비와 연회비를 지불하면 스위스 내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까지 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도 2012년 이후 18명이 스위스로 넘어가 죽음을 선택했다. 디그니타스는 환자에게 직접적으로 독극물을 주사하는 등의 적극적 안락사를 행하는 것이 아닌 죽길 원하는 환자에게 치사량의 약물을 처방하고 환자 스스로 그 약을 먹는 선택을 하게 하는 조력자살 형태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한국뿐 아니라 사실상 안락사와 조력자살이 법적으로 불가능한 여러 국가에 현재 7700여 명의 회원이 있다고 한다.

 

 이 단체를 보고 있자니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의 윤여정 배우가 생각난다. 영화에서 윤여정 배우가 연기한 '소영'은 예전에 인연이 있었던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 있는 한 노인을 농약을 먹여 죽인다. 자신의 힘으로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노인은 죽음을 선택하지도, 삶을 이어갈 용기도 가지지 못한 채 누워있어야만 했고, 자신을 찾아온 소영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한다. 거듭 거절하지만 결국 소영은 그 노인의 입에 농약을 흘려보내며 스스로 적극적인 디그니타스, 죽여주는 여자가 된다. 영화의 결말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소영은 살인죄로 교도소에 수감된다. 소영의 선택은 디그니타스의 환자 개인에 대한 존엄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자신의 삶도 죽음도 선택할 수 없었던 인간에 대한 인간의 연민에서였을까?



삶의 무게


 죽음은 신의 주관 아래에 있고 인간은 그저 삶에 충실해야 한다는 신학자이자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은 잔인하리만큼 '살아만 있는' 이들로 하여금 무거운 짐을 지운다. 어떠한 행복과 안녕감을 느끼지 못한 채 지고 있는, 그렇다고 버리기도 힘든 82.7세란 삶의 무게는 어쩌면 죽음의 무게보다 무거울 것이다. '오래 사세요'가 덕담이 아닌 악담이 되어가는 백세시대를 사는 우리는 어떻게 살지 나 스스로 결정할 수 없고 앞으로 얼마나 살지 불분명할 때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떠한 보상도 없이 삶의 무게에 충실한 누군가 때문에 많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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