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이 없어 반성이." 뉴스를 보다가 아버지가 한 소리 한다. 연일 일본의 수출 규제에 관련된 뉴스가 쏟아져 나온다. 수출 규제의 영향이 무엇인지, 왜 아베 총리가 이런 선택을 강행했는지는 워낙 다양한 분석과 견해가 있기에 그 부분은 차치해두고 우리 국민이 왜 이토록 일본 수출 규제에 분노하는지, 분노할 수밖에 없는지 이야기하고 싶다.
수출 규제 첫날, 또 한 번 절실하게 느꼈다. 결국 그들은 반성이 없었고 아직 우린 그들을 용서하지 못했다고. 일제강점기 당시 그들의 만행은 여전히 우리의 가슴속엔 큰 상처로 남아있다. 일본 관련 뉴스들이 화제 됨과 동시에 '우리가 잊으면 안 되는 일본의 만행'들에 관련된 글이 여러 사이트에 다시금 등장하는 것만 보아도 우린 일제강점기와 지금의 수출 규제를 따로 떨어뜨려 놓고 생각하기 힘들다. '그런 만행을 저질러 놓고 사과와 반성은커녕 정치적, 경제적 전략으로 또 우릴 이용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단순히 수출 규제만으로도 이해하기 힘든 상황인데 분노는 몇 곱절은 더해진다.
왜 일본은 사과가 힘들까? 세종대 호사카 유지 교수는 일본 정부와 보수층이 2차 세계대전 당시 한국에 대한 일본의 행위 자체를 잘못이라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오히려 일본은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불가피한 결정이었고 당시 서구 열강으로부터 아시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함이었다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상황이다. 전형적인 '인지부조화' 상태이다. 강제 징용, 위안부, 학살 등 인간이 인간에게 해서는 안 될 짓임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이를 잘못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인정하게 되면 현재 일본의 정체성 전체에 붕괴를 가져오는 상황에서 위의 잘못한 사실과 인정하기 싫은 욕구, 이 두 가지 인지 사이에 갈등으로 불편함이 생긴다.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인지를 양립하게 하는 방법은 여기에 한 가지 인지를 더 추가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식민지 근대화론과 전시상황의 특수성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인지는 일본의 만행이 합리적으로 변모시킴과 동시에 사과의 필요성을 지운다. 이에 더해 현 일본 보수층의 결집을 위해선 앞서 언급한 부분을 '신사 참배'나 '한국 때리기'를 통해 자극하는 것이 무엇보다 효과적이고 아베 총리는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수출 규제가 한국에 대한 보복 조치가 아니란 일본 정부의 입장이 한국 국민들에게 변명이 아닌 설명으로 받아들여지려면 일본 정부의 진정한 반성과 사과가 선행되어야 한다. 몇 푼의 배상금이 아니라 고개 숙인 사과. <어쩌다 한국인>에서 허태균 교수는 '사과가 가지는 의미'가 한국인에게 더욱 특별하다고 설명한다. 관계주의적인 한국인에겐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사과가 문제 해결의 중심이자 시작이다. 피해자의 슬픔에 대한 가해자의 정서적 공감이 더해진 사과가 가장 핵심인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친구의 옷을 빌렸는데 실수로 잃어버렸다 치자. 이때 내가 친구에게 옷을 다시 사준다는 식으로 사과를 하기보다는 아끼는 옷을 소중히 다루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사과를 하는 편이 관계 회복에 더 나으리라. 한국과 일본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은 항상 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한다고 말한다. 이번 수출 규제의 이유가 강제 징용 판결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한다. 그러나 이미 갈등의 골이 깊어진 현 상황에서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의 이유가 반도체 소재의 원재료가 사린가스 제조에 사용될 수 있어서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강제 징용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가 가장 큰 이유라는 기존 한국의 해석에 변화가 일어날 여지는 전혀 없어 보이는 것도 여전하다.
이번 사건으로 한일 관계는 더욱 멀어졌다. 정부 간의 신경전을 넘어서 일본에선 혐한 여론이, 한국에선 일본 불매 운동 여론이 조성되고 있다. 일각에선 우리가 일본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한국 정부에 해당한다. 정부는 최대한 우리 국민과 기업이 피해를 적게 보도록 현명한 판단과 행동을 해야만 한다. 국민들도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말자? 결론만 말하자면 무리다. 우리가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아야 할 때는 일본이 한국인의 감정을 헤아려주고 아픔에 공감했을 때이다. 그저 과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새로 시작하기 위해 해결되지 않은 과거는 결국 매듭지어야만 한다. 건물의 갈라진 틈을 메우지 않는 것은 결국 그 건물의 무너짐을 의미하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