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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 닿지 않을 빛을 향한 기록

F. 스콧 피츠제럴드, 욕망이라는 영원한 결핍에 대하여

by 신세연

개츠비는 매일 밤 같은 곳을 바라봅니다. 호수 건너 데이지의 집 끝에서 깜빡이는 초록 불빛. 그는 그 빛을 향해 잔을 들어 올리지만, 불빛은 언제나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멀리 있습니다. 《위대한 개츠비》는 어쩌면 그 닿지 않는 거리를 좇은 한 남자의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이 소설을 단순한 사랑 이야기로 읽었다면, 아마도 그건 소설의 표면만을 읽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개츠비가 바라본 건 데이지라는 한 사람이 아니라, 그녀가 상징하는 세계였습니다. 그가 경멸하면서도 결국 닮고 싶었던 세계. 부와 세련됨, 여유와 품격이 섞인 모든 것. 개츠비는 사랑이라는 가장 고귀한 이유로 그 안으로 들어가려 했습니다. 사랑은 그에게 감정이 아니라 하나의 언어였고, 동시에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욕망은 언제나 되돌아가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겉으로는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자리하고 있죠. 개츠비가 데이지를 되찾은 뒤에도 만족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사람을 되찾으려 한 게 아니라 시간 자체를 되돌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복구되지 않습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흔적이자 증거일 뿐이니까요. 욕망은 그렇게 상실의 흔적을 딛고 다시 자라납니다.


개츠비가 ‘위대한’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그 순진함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좇는 꿈이 허상이라는 걸 몰랐고, 오히려 그 허상을 믿음처럼 붙잡았습니다. 세련됨을 흉내 내면서도 진심만큼은 잃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그를 가짜라고 불렀지만, 정작 누구보다 진심이었던 사람은 개츠비였습니다. 피츠제럴드는 그 모순을 정면으로 바라봅니다. 욕망의 위선 속에도 진심이 있고, 진심의 끝에도 허상이 있다는 것을요.


1920년대는 ‘재즈 시대’로 불렸습니다. 전쟁의 폐허를 벗어나, 산업과 소비가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사람들은 부와 쾌락을 새로운 종교처럼 숭배했습니다. 뉴욕의 밤거리는 빛으로 넘쳐났지만, 그 아래에는 늘 허무가 깔려 있었죠. 《위대한 개츠비》는 그 시대의 들뜬 환희와 무너지는 윤리를 동시에 포착한 작품입니다. 피츠제럴드는 화려한 샹들리에와 비어 있는 샴페인 잔 사이에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잃어가는지를 보여줍니다. 개츠비의 파티는 결국 시대 그 자체의 축소판이었습니다. 모두가 웃고 있었지만, 아무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피츠제럴드가 그린 그 허무는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이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현실보다 조금 늦게 살고, 조금 앞선 욕망을 따라갑니다. 그 미묘한 시차가 인간을 앞으로 밀어붙이지만, 동시에 끝없는 불안을 만들어냅니다. 욕망은 도착의 언어가 아니라, 끝없이 미뤄지는 약속의 언어입니다.


지금의 우리도 각자의 초록 불빛을 좇으며 살아갑니다. 누군가는 사랑의 이름으로, 누군가는 인정의 이름으로, 또 어떤 이는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증명하려 합니다. 그러다 보면 ‘무엇을 원하는가’보다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를 더 고민하게 됩니다. 그 순간 욕망은 방향을 잃고, 우리는 조금씩 자신을 잃어갑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지만, 누군가 제 글을 읽고 “이 사람, 괜찮다”라고 말해주길 바랐습니다. 그 마음이 순수한 열정인지, 아니면 인정받고 싶은 욕망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습니다. 밤새 문장을 고치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글을 올리면서도 그 초록 불빛을 본 적이 있습니다. 누가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믿음이 저를 계속 쓰게 만들었습니다.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저도 데이지를 좇은 게 아니라, 그 불빛 자체를 사랑하고 있었던 거라는 걸요.


개츠비는 결국 세상의 냉소 속에서 쓰러지지만, 화자인 닉 캐러웨이는 그 믿음을 끝까지 기억합니다. 세상이 비웃었던 개츠비의 순진함 속에서 그는 오히려 인간의 가장 고집스럽고 낭만적인 본능을 봅니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인간의 욕망이 가진 시간의 비극을 완벽히 요약합니다.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 새 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개츠비의 진짜 비극은 그 꿈이 헛된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 꿈이 이미 과거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록 불빛은 언제나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있거나, 이미 지나간 어딘가에 있습니다. 인간은 ‘지금’에 완전히 머물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노를 젓습니다. 닿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 불빛을 향해.

그 불빛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의 이야기도 멈추니까요.

어쩌면 욕망이란 결핍의 또 다른 이름이고, 인간은 그 결핍을 증명하며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s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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