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가 알려주는 ‘착한 어른’의 껍질을 벗고 나로 태어나는 이야기
어릴 적 우리는 세상을 오히려 쉽게 생각했습니다.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봤으니까요. 선과 악. 밝고 따뜻한 세계와 어둡고 금지된 세계. 우리는 그 경계에서 안쪽의 안락함을 누리면서도 이상하게 바깥의 혼란과 어딘가 모를 신비로운 위험함에 끌리곤 했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속 주인공도 그랬습니다. 이 소설은 안전한 울타리라는 경계를 깨고 나온 한 소년, 싱클레어의 이야기입니다.
싱클레어는 모범생이었지만 사소한 거짓말 하나로 어두운 세계에 발을 들입니다. 그때 데미안이 나타나 말하죠. 우리가 배운 선과 악은 절대적인 게 아니라고. 세상이 악하다고 낙인찍은 것, ‘카인의 표식’이 실은 강인함과 고유함의 증거일 수 있다고요. 그 한마디에 싱클레어가 믿어왔던 안전한 세계에 처음 금이 갔습니다.
헤세가 말하는 성장은 결국 알을 깨는 일입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이 문장은 《데미안》의 심장과도 같은 구절입니다. 알은 우리를 보호하는 울타리이자 동시에 우리를 가두는 감옥이기도 하죠. 부모의 기대, 사회가 말하는 정답,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들. 그게 우리가 깨야 할 알입니다.
성장은 결국 그 안락함과의 결별에서 시작됩니다. 모두가 옳다고 말하는 길을 벗어나 나만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그 길은 종종 어둡고 외롭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 길을 ‘틀렸다’고 부릅니다. 데미안은 말합니다. 진짜 성장은 빛과 어둠을 함께 품는 일이라고. ‘아브락사스’처럼 둘을 함께 껴안을 용기가 필요하다고요.
우리는 어쩌면 너무 오래 정답을 배우며 살아온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실패하지 않는 법, 미움받지 않는 법, 무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법. 그렇게 우리는 내면의 어두운 면을 애써 덮어두고 ‘착한 아이’라는 껍질 속에, ‘괜찮은 어른’이라는 알에 자신을 가둡니다.
저에게도 그런 알이 있었습니다. ‘글로는 먹고살 수 없다.’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현실적인 알이었죠. 생계의 기로에서 저는 매일 고민했습니다. ‘밝고 따뜻한 세계’로 돌아가야 하나, 그러니까 안정적인 일을 찾아야 하나. 글쓰기는 너무 어둡고 불확실해 보였으니까요.
그때 제 인생의 데미안이 나타났습니다. 한 친구가 제게 자격증을 활용해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일을 소개해줬습니다. 하지만 정말 저를 구한 건 그 일자리가 아니라 그 친구의 말 한마디였습니다. “넌 자신감을 가져야 해. 네 글을 알아줄 시대가 결국 올 거야. 조금만 버텨.”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울컥했습니다. 믿음이라는 게 이렇게 따뜻한 온도를 가질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그 말은 세상의 기준으로 쓸모없다 여겨지던 제 글쓰기에 카인의 표식을 찍어준 것과 같았습니다. 그건 낙인이 아니라 ‘너는 다르다’고 말해주는 증표였죠. 저는 그제야 제 안의 불안을 껴안은 채로 그래도 계속 써보기로 했습니다. 그 어둡고 불안한 시간 속에서 쓴 글이 훗날 책이 되고 영화가 될 줄은, 그 알 속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 했습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싱클레어는 깨닫습니다. 데미안은 밖에 있던 인도자가 아니라 결국 자기 안에 있던 목소리였다는 걸요. 헤세가 말하는 ‘자신의 길’이란 결국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입니다. 세상의 기준과 다르더라도, 심지어 고통스러울지라도요.
제 친구의 목소리가 그랬던 것처럼. 또 제 안에서 아주 오래 울리던 ‘그래도 쓰자’라는 목소리가 그랬던 것처럼요.
100년 전 소설인 《데미안》이 지금 더 아프게 읽힌다면, 아마도 ‘나’로 살아가기가 이토록 어렵고 또 이토록 중요해진 시대이기 때문일 겁니다. 새는 고통 없이 알을 깰 수 없습니다. 진짜 나는 어쩌면 가장 아프게 부서진 그 세계의 잔해 속에서 겨우 모습을 드러나는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건 그 잔해 위에 다시 무언가를 써 내려가는 일인지도요.
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