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할아버지가 서울에 올라오신 날이었다.공부에는 흥미가 없다며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오빠가 할머니께 배운 요리를 해드린다며 주방에서 분주했다. 샐러드와 파스타, 챱스테이크를 했는데, 샐러드에는 아보카도가 들어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온갖 과일이 다 나올 때가 아니라서, 생전 처음 먹어보는 거였다. 이상한 씁쓸함과 바람 빠진 생밤맛이 났다. 식사가 끝난 접시에는 아보카도만남겨졌다.그게 본래는 버터처럼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이란 걸 알게 된 것은, 오빠가 며칠 뒤, 다시 한번 같은 메뉴를 만들어줬을 때였다.마치 다른 과일 같았다.아보카도는 후숙이 잘 되어야 한대. 오빠가 저번 요리를 아쉬워하며 말했다.
스스로 성숙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10대면 몰라도, 더 이상 어리지 않은 나이가 되면, 본인의 정신연령과 세상의 잣대가 가져오는 부조화에 놀라는 때가 온다. 모든 사람의 자아는 저마다 몇 살쯤에 멈춰있는 것 같다.자아가 형성되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에 대해서 제법 알게 되는 나이가 되면 더 이상 시간의 흐름이 성숙을 보장하지 않기때문에.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는 정체된 자아가 달아난 시간의 꽁무니를 멍하니 쳐다보게 되는 것이다.
시간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성숙은 관계를 열쇠로 한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성숙한다'는 유명한 말처럼. 타자에 대한 경험과 이해는 나의 세계를 넓히고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성장시킨다.사회적 언어와 문법을,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색다른 시선을, 어쩌면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서 얻는다. 배운다. 각자 보고 듣고 느낀 것들로 쌓아 올려진 두 개체가 한 데 섞인다. 우리에게 책 한 권보다, 인터넷 강의보다, 한 명의 사람이 더 풍부한 콘텐츠임을, 서로가 서로를 더 성장시킨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더 이상 성숙하고 싶지도 않은데에서 온다. 레벨을 올리면 해결해야 할 더 어려운 퀘스트가 몰려오는 게임 세상처럼,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는 대학을 들어가면 취업을, 취업을 하면 결혼을, 결혼을 하면 출산을, 출산을 하면 육아를, 육아를 하면 노후를 고민해야 한다.성숙이라는 단어는 또 다른 의무를 불러일으키는 시작의 말에 불과하다. 평생 철들고 싶지 않고 나만 생각하면서 살고 싶은 요즘 사람들에게 진지한 관계는 부담이다.
비용은 또 어떤가.인간관계는 사치재다.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생각보다 큰 노력을 필요로 한다. 약속을 잡고 만나는 시간, 생일선물이나 경조사에 나가는 비용, 공감하고 공감받느라 소모되는 에너지들. 안그래도 부족한 그런 것들을 관계를 위해 지불하다가 보면, 결국 힘에 부친나머지 SNS 상에 '좋아요' 몇 번 주고받는 것으로 퉁치게 되는 게 현실. 그런 게 어떻게 성숙한 사람을 만들까. 다들 그렇게만 해도 결혼식 하객 머릿수 채우는 용으로는 충분할 테니 오히려 가성비가 좋다고 여기려나.
우리는 과도하게 연결되어 있는 탓에 껍데기만 남아버렸다. 엄지손가락 몇 번만 움직이면 어디서 뭘 하고 사는지 다 아는 이 세상에서, 시간과 돈을 들여 눈을 마주치며 깊은 교류와 성숙을 도모할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한 명의 사람이 팔로워 1이라는 디지털 숫자가 되어버리는 탓에, 타인에 대한 이해도, 배려도, 진심도 사라져 간다. 반면 온갖 불만과 혐오는 커져만 간다. 누구도 성숙하고 싶지 않은 세상. 그래서 미성숙함이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은 세상. 우리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
나도 한때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내가 아보카도도 아니고 꼭 성숙해야 되나? 나는 이대로가 좋고 어떠한 노력도 하고 싶지 않은데. 그냥 부모님의 울타리 안에서 손가락이나 쪽쪽 빨면서 안주하고만 싶었다.내게서 나는 덜 익은 풋내를 참을 수 없어진 건, 나도 넓은 울타리 안에 내 사람들을 두고 지키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다.좀 더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더 나은 내가 되고 싶다. 사람을 알아가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에 가치를 두면서. 더 따듯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될 거다. 단단한 심지를 품고 살 거다. 껍데기는 벗어버릴 거다.내가 아보카도는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