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 된다. 벌써 겨울의 초입이라니, 일 년이 또 이렇게 간다고? 누가 빨리 감기 버튼을 누른 게 틀림없다. 유튜브를 보는 나처럼 10초 뒤 10초 뒤를 연타하고 있을지도. 어떻게 이렇게 빨리 흐르는 거야? 어쩌면 하루보다 일 년이 빠를지도 모른다. 이상한 생각이지만 체감은 그렇다.이제6시에 퇴근하고 나면 온통 까만 하늘만 보이는 게 말이 되나. 나는 내가 하늘색을 까먹어버릴까 무섭다.
시간을 이기고 싶다. 살면서 누구든 이런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어김없이 나를 앞질러가는 시간 저 새끼 목덜미를 잡아챌 수 있다면, 냉큼 잡아다가 흠씬 혼내주고 앞으로 나를 앞지를 생각 말라며 으름장을 놓고 싶다. 니 뒤통수만큼 얄밉고 세게 후리고 싶은 건 없어. 게으른 백수일 때는 하루가 너무나 길었는데, 일을 시작하고 나니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건 산더미인데 시간은 이미 저 멀리 하루 끝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다. 메롱하고 나를 향해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항상 생각한다. 널 죽이고 싶어. 두들겨 패고 싶어.
정말 생각할수록 억울하다. 먹고살긴 살아야 되는데 진짜 먹고살게만 되는 이 메커니즘이.먹고사는 게 왜 인생의 궁극적 목표가 되어버리는 걸까. 그러고 싶었던 게 아닌데. 회색빛 도시에 회색인간이 되고 싶었던 사람이 어디 있어. 무표정한 어른? 그게 왜 자기소개가 돼버린 건데. 난 분명 어린 왕자 편이었는데이제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도 모르는 바보 같은 30대가 되어버렸다니. 정원에 무슨 꽃이 피었고 얼마나 아름다운 집인지 설명하는 것보다 얼마짜리 집인지가 더 와닿는 사람이라니. 끔찍해라.
어린 왕자는 모를 거다. 인생에서 일하고 잠자는 시간을 빼면 인생의 3분의 2가 날아가버린다는 사실을. 먹고 싸고 움직이는 시간까지 다 빼버리고 나면 스스로 살아가는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기쁘고 슬프고 감동하고 사랑하는 순간들보다 다음 해야 할 일을 생각하는 순간이 더 많다는 사실을.그래서 더 값진 무언가를 자꾸 잊고 미루게 되는 현실을.
살아내지 않아도 살아지는 게 문제다. 내가 뭔가 하지 않아도 하루는 끝나니까. 인생의 주체가 내가 아니야. 나는 시간의 흐름을 관찰하는 관찰자일 뿐이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인 줄 알았는데 그냥 구경꾼일 뿐이었어. 이렇게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가고.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은 느낌으로 시간이 간다. 시간이 간다. 시간이 간다. 지금도. 바로 이 순간도.
네가 문제인 거야 결국. 너는 어떻게 벌어볼 수도 없잖아. 무한하게 공짜로 주어지는 척하지만 사실은 점점 사라지고 있지. 넌 내 젊음 패기 용기 의욕 체력 같은 것들을 야금야금 가져갔지. 앞으로도 많은 걸 가져가겠지. 하고 싶은 건 많은데 하고 싶지 않아져 버려. 꿈? 잘 때나 꾸는 거지. 난 내일 출근하니까. 빨리 밥 먹고 빨리 씻고 빨리 자야 하니까. 다 너 때문이야.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잖아. 네가 나를 자꾸 재촉하니까.
시간을 내서 무얼 해보라고? 자기 계발? 개나 주라지. 시간이 덜컥 본인을 내어주고는 대신 수명이랑 맞바꾸자고 하는 건 아닐까 싶은데. 아아. 그래서 결국 그렇게 능력으로 귀결되는구나. 타고나야 해. 시간에게 체력과 수명과 그 어떤 대체제를 내어주면서 스스로를 갈고닦을 자신이 없다면, 타고나길 효율적 인간이 되어서 남들과 같은 걸 배워도 열을 깨우쳐야 하고 똑같이 일을 해도 눈부시게 성과가 좋아서 30대가 되기까진 그럴듯하게 자릴 잡아야 하지. 그게 시간이 지배해 버린 이세상이지.
잿빛 시간이 인간들을 다 톱니바퀴로 만들고 있어! 꿈도 희망도 표정도 필요 없어 그냥 제 위치에서 잘 굴러가기만 하면 돼! 이 세상은 거대한 시계, 우린 부품에 불과하니까!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시간이 원망스러워지는 것이 아닐까. 젊음을 숭배한다거나'이나이엔 꼭 뭔가를 해야 된다'에 쫓긴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런 것들이 아니라도 절대적 물리적 시간이 나에게 내 삶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나야 누군가의 딸이기만하면 되지만, 결혼을 하거나 아이가 있어 주어진 사회적 역할이 많은 사람들은 어떨까?왕어른인가.내 삶에 내가 없어지는 것만 같은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