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가 없는 나로서는 항상 궁금하다. 신을 믿고 행하는 자들의 심리가. 다들 정말로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만물을 창조하고 이토록 어지러운 세상마저 창조했다고 믿는 걸까? 아니면 종교활동을 하면서 알게 되는 인적 네트워크가 유용하기에 사회활동의 일종으로 계속 신앙생활을 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성경 같은 교리책들에서 가르침을 얻는 걸 좋아하는 걸까? 종교생활의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다들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지만.
얼마 전, 집에는 엄마 친구분이 일주일간 머무르다 가셨다. 성격도 쾌활하시고 집안일을 거들며 엄마에게 기운을 불어넣는 이모셨지만, 나로서는 조금 피곤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전도였다. 엄마의 약해진 마음을 아는지, 원래 이모의 캐릭터인지 모르겠지만. 이모는나와 엄마를 앉혀두고 굉장한 에너지로 성경 말씀을 말하고 기도의 효험이나 신앙의 기쁨을 잔뜩 설파하고 가셨다. 나 같이관심 없는 얘기에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지루한 연설 같은 것이라 아무런 효과가 없었지만 엄마에게는 무언가 자극이 된 것 같다.엄마는 그 뒤로 성경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3개월째, 아직도 종종 혼자 몰래 눈물을 훔치는 엄마는. 무엇을 믿기로 한 걸까?
믿음은 기대다. 어떠한 대상에게 믿음을 주는 일방의 관계인 것 같지만 사실은믿음을 급부로 대상에게 반대급부의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이다. 반대급부는 꼭 물질적인 무언가일 필요는 없다. 예를 들면, 네가 잘 해낼 거라고 믿는다는 소리는 네가 잘 해내길 바란다는 소리이고 누군가의 존재를 믿는 것은 누군가가 존재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이 조금 쉬워진다. 엄마는 무엇을 바라고 있을까.
물론 아빠를 다시 만나는 것을 바라겠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니까 제외하면, 엄마는 사후세계가 존재해서 그곳에서 아빠가 평안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요즘 부쩍 나중에 아빠를 만나면 혼자 늙은 모습일 텐데 어쩌냐며 실없는 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해서라도 그와 다음 만남을 기약해 보는 것 같다.아니면 신도 사후세계도 아무것도 믿지 않을 수도 있다. 믿지 않지만 믿음의 행위를 흉내 내면서 스스로 위로를 얻는 것일 수도 있다. 성경을 읽는다는 행위 그 자체에 몰두하면서 아빠 생각을 잊고 싶을 수 있고 반대로 기도를 하며 내내 아빠 생각을 하고 싶은 것 일수도 있다.
사실은 어떤 것이든상관없다. 그녀가 무언가를 믿어서 그녀가 어떤 기대를 가지고 남은 생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걸로 좋다.위로가 서툰 딸보다 그런 게 더 도움이 된다면 고마울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바로 그 부분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다. 주변의 가장 가까운 사람인 나보다, 항상 옆에 있는 나보다 다른 것을 믿기로 하는 것. 다른 것에게 의지하는 것. 왜 그걸 택했을까.나는 미덥지 않은 걸까.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이 세상에 믿을만한 게 정말 없구나.
이 세상 모든 우수한 것들에게만 기대를 걸어도 돌아오는 결과가 항상 바라는 대로일 수는 없으니까. 믿음은 꽤나 자주 실망과 좌절을 불러온다.바라던 무언가에게 뒤통수 맞지 않기 위해, 아예 세상의 것이 아닌,증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믿어버린다면, 그래서 믿음의 결과를 영원히 미지의 영역 저 편으로 남겨둔다면, 좌절 없이계속 믿고 바라며 사는 삶이 되지 않을까? 원하는 결과가 없더라도 아직 믿음이 부족했노라 하며 다시 스스로를 북돋을 수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자신의 바람에 집중하며 살 수 있겠다. 그렇다면 눈앞의 일들에 일희일비하지 않겠다. 삶의 먼 곳을 보며 살 수 있겠다.이게 종교인 걸까?
나는 무엇을 믿으며 살고 있나. 어쩌면 내게 있는 믿음이라고는 손바닥 안 스마트폰에게 향하는 것뿐 아닐까. 모르는 길을 가도 사람에게 묻지 않고 지도앱을 켜는 내가. 공기보다 무거운 고철덩어리가무사히 하늘을 날아가 줄거라 믿고 비행기를 타는 내가.그런 내가 가장 믿는 것은 입력한 대로 결괏값을 주는 한 낱 기계가 아닐까. 실망과 좌절을 회피하려는 탓에 직관적이고 확실한 것만을 쫓다가 길을 잃어버린 어린양이 돼버리는 건 아닐까. 이제는 나도 무언가를 믿고 기대하고 바라며 살아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