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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하 Oct 22. 2024

나는 사랑 그런 거 다 미디어의 선동이라고 생각해.

사랑과 연애


나는 사랑 그런 거 다 미디어의 선동이라고 생각해.


뭐 사실 대단한 감정이랄 것도 없는데 온 세상 노래가 다 사랑 노래니까. 온갖 영화, 드라마에서도 죽고 못 살 것처럼 묘사하니까 사람들이 진짜 그런 줄 아는 거야. 솔직히 주변에서 다들 연애하니까 나도 해야 되나 하면서 연애하는 거지. 뭐 거창하고 비범한 감정으로 만나나 다들? 그냥 좋게 말해선 우정, 극단인 표현으로는 성욕인 거 아닌가?


어느 겨울날이었다. 한창 연애 중이었던 나는 비연애를 외치는 친구와 술집에 앉아있었다. 도대체 어떤 줄기에서 튀어나온 말인지는 기억에 나지 않지만, 모처럼 재밌는 대화 주제였다. 연애를 해볼만큼 해 보고 나서 비혼을 결심한 그녀는 사랑에 대해 연신 혹평을 늘어놓았다. 사랑은 결코 대단히 아름답고 찬란한 무언가가 아닌 그저 그런 여러 감정 중 하나일 뿐이라고. 안 하고 살아도 된다고. 그때 나는 어떤 대답을 했더라.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인 소리 아니야? 자신들이 느낀 감정들이 너무 특별하고 소중해서 노래하고 영화를 만들게 되고 그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또 사랑을 하고. 그렇게 반복된 걸 수도 있잖아. 적어도 난 사랑이라는 게 이전과는 다른 꽤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고 생각하거든. 네가 아직 진정한 사랑을 못 만난 게 아닐까?


기억을 돌이켜보면 난 그때 만나던 남자친구를 어지간히 좋아했던 게 틀림이 없다. 이 사람은 다르다. 이 감정은 특별하다. 고 생각하니까 저런 대답을 했겠지. 이 이후에도 몇 번의 대화가 오고 갔고 서로의 의견차는 좁히지 못한 채 작은 토론은 마무리 됐다. 하지만 이 날의 대화에서 나는 사랑에 대해 불신의 씨앗을 심게 되었다. 내가 혹여 미디어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사랑의 사전적 정의는 무엇을 아끼고 애틋하게 여기는 마음이라고 한다. 나는 그의 무엇을 아끼고 있는가? 그의 얼굴? 그의 성격? 그의 배경? 그렇다면 닮은 얼굴, 비슷한 성격의 비슷한 배경을 가진 사람이라면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할까? 알고 보면 그가진 것들은 그만이 가질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그의 속성이 아니라 그때 그곳에 그가 나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 그 사실만이 무엇과도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함을 갖는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그때 그곳에 그가 아닌 누군가가 있었다면 나는 그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순간을 좋게 만들어주는 사람이라면 그게 누구든. 뭘 가졌든. 우리가 함께 있는 순간이 혼자 있는 순간보다 즐겁고 소중하다면.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런 사랑이 우정과는 뭐가 다를까? 친구들과도 우린 제법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않는가. 연인은 친구보다 좀 더 약속된 사이 같다. 우리 좀 더 서로에게 오지랖을 부리고, 얘기를 들어주고 관심 가져주자 하고 약속된 친구사이. 이 험난한 세상, 제각기 1인칭 시점으로만 살아가기에, 서로를 알아줄 존재가 필요해 서로 그러기로 약속한 사이. 개인의 취향 몇 가지와 즐거운 시간, 그리고 약속. 이 세 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 발생하는 게 사랑이라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건 사실 그 사람이 아닌 '옆자리'의 존재. 누군가로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어떤 역할'일지도 모른다. 


몇 년이 지나고, 몇 번의 이별을 겪은 뒤, 나는 그 친구에게 패배를 실토했다. 너의 말이 맞는 것 같다고. 사랑은 아주 특별할 것도 없는 주제에. 미디어가 부풀린 실체 없는 풍선 같은 감정이라고. 우린 그냥 홀로 살아내기가 무서워 다른 무언가에 이끌릴 뿐인 것 같다고. 필요에 의해 꾸며낸 감정 일수도 있다고. 그러자 그녀수줍게 웃었다. 사실 자기는 그동안 생각이 바뀌어서 히려 내 말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요즘 만나는 남자친구가 너무 좋다며. 정말로 많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니 알겠다며.


우리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결국 우리는 사랑을 할 때에는 최선을 다해서 그 특별함을 믿고 있다가 헤어지고 나서는 사실 별거 아니었며 자위하고 있는 게 아닌가. 특별함을 주는 것도 거두어들이는 것도 내가 내 입맛대로 하는 것일 뿐, 객관성이란 눈을 씻고 찾아볼 수가 없다는 말이다. 랑 노래도 영화도 드라마도 그저 이 우스움의 기록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동하는 건 나다. 이 감정이 특별했으면, 그래서 외로운 세상을 둘이 되어 살아갔으면 하는 나. 착각에 빠진 나. 착각임을 알면서도 속고 싶은 나.


사랑뿐 아니라 모든 것이 그렇다. 내가 의미 두는 것만이 나에게 의미를 가질 수 있기에. 그 대단한 사랑의 목줄도 내가 쥐고 있음에. 만일 내가 사랑한 것이 나를 아프게 한다면 그에게 내린 특별함을 손수 거두어들이자.  아프게 할 권력을 그의 손에 쥐어주지 말자. 나의 외로움에 선동당하지 말자.  그녀와 나는 잔을 부딪히며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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