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죽음을 추모하며
삶은 무겁고, 죽음은 가볍다
작년 1월,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유언은 남기지 못하셨다. 실오라기 같은 숨만 겨우 이어가시다, 잠들듯 조용히 떠나셨다. 병상에서만 2년이었다. 뇌수술 후 회복이 조금씩 찾아왔을 무렵, 어머니가 가장 자주 하셨던 말은 "네 아버지 때문에 고생 많이 했다"였다. 곱게 자란 이장집 딸로 태어나 맏며느리로 시집와 겪어야 했던 고초들이,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고 어머니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어머니의 가장 솔직한 유언이라 믿는다. 아버지와 그 형제들과의 불화는 어머니의 삶을 더욱 힘겹게 만들었다. 장례식 내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아버지의 형제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노가 치민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길래 마지막까지 이토록 무심할 수 있는 것일까.
장례를 마치고,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했다. 제일 많았던 건 옷가지들이었다. 그중 3분의 1은 한 번도 입지 않은 새것 같았다. 멀쩡한 옷은 이모님들께 드리고, 나머지는 모두 헌 옷으로 버렸다. 장롱 밑 서랍에는 돌잔치, 환갑 등 기념 문구가 새겨진 수건이 잔뜩 쌓여 있었다. 언제 쓰려고 모아두신 걸까. 싱크대 아래엔 다리미로 다린 듯 가지런한 재활용 검은 봉투들이 작은 상자에 빽빽이 들어 있었다. 진열장 위에는 태그도 떼지 않은 한국도자기 슈퍼스트롱 그릇 세트가, 수십 년 전 그 상태 그대로 올려져 있었다. 당시에는 최고급 제품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일상에서는 ‘들어오는 것’은 있었지만, ‘나가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렇게 쌓인 물건들은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다시는 사용되지 못할 최후를 맞이했다. 죽음은 그렇게, 켜켜이 쌓인 묵은 때를 벗고 가볍게 세상을 떠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누가 죽음을 가볍게 맞이할 수 있을까.
화장을 마친 어머니의 유골은, 한 줌 조금 넘는 뼛가루로 남았다. 납골당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유골함을 한 시간 넘게 품에 안고 있었다. 떨어질까 봐 조심스럽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놓기 싫었다. 유골함은 아직 따뜻했다. 뼛가루에 남은 화장의 열기 때문이었겠지만, 그 온기에서 어머니의 체온이 느껴졌다. 그 따스함이 남은 내 삶의 무게를 지탱해줄 것만 같았다.
삶은 무겁고, 죽음은 가볍다 했다. 태어남과 죽음은 삶의 과정이자, 서로를 향한 수미상관이다. 삶을 진중하게, 무겁게 살았다면 죽음만큼은 가벼워도 괜찮지 않을까. 마치 일상처럼 죽음을 맞이해도 이상할 것 없는 삶. 어머니는 그렇게 떠나셨다. 나도 인생의 반세기가 지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쌓으려고 애쓰던 삶이었다면 이제 남은 인생은 비우고 덜며 살아야 할 것이다.
어머니를 위한 자장가 (정호승)
잘 자라 우리 엄마
할미꽃처럼
당신이 잠재우던 아들 품에 안겨
장독 위에 내리던
함박눈처럼
잘 자라 우리 엄마
산 그림자처럼
산 그림자 속에 잠든
산새들처럼
이 아들이 엄마 뒤를 따라갈 때까지
잘 자라 우리엄마
아기처럼
엄마 품에 안겨 자던 예쁜 아기의
저절로 벗겨진
꽃신발처럼
“가볍게 죽기 위해서는 미리 정리해 놓을 일이 있다. 내 작업실의 서랍과 수납장, 책장을 들여다보았더니 지금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의 거의 전부(!)가 쓰레기였다. 이 쓰레기 더미 속에서 한 생애가 지나갔다. 똥을 백자 항아리에 담아서 냉장고에 넣어 둔 꼴이었다. 나는 매일 조금씩, 표가 안 나게 이 쓰레기들을 내다 버린다. 드나들 때마다 조금씩 쇼핑백에 넣어서 끌어낸다. 나는 이제 높은 산에 오르지 못한다. 등산 장비 중에서 쓸 만한 것들은 모두 젊은이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나머지는 버렸다. 책을 버리기는 쉬운데, 헌 신발이나 낡은 등산화를 버리기는 슬프다. 뒤축이 닮고 찌그러진 신발은 내 몸뚱이를 싣고 이 세상의 거리를 쏘다닌 나의 분신이며 동반자이다. 헌 신발은 연민할 수밖에 없는 표정을 지니고 있다. 헌 신발은 불쌍하다. 그래도 나는 내다 버렸다. 뼛가루에 무슨 연민이 있겠는가.” - 김훈, 『허송세월』, 「재의 가벼움」
* 건강은 좋지 않지만 겨우 조심조심 살 수는 있다. 술을 못 먹게 되니까 말(言)을 많이 하지 않게 되어서 복되다. 술을 먹지 못하게 되니까 세상이 너무 환해서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