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을 바쳐라!(신조오 사사게요)
프롤로그
아침부터 대학생 아들이 외출을 준비중이다. 방학이라면 보통 이 시간에 일어날 리 없다. 이유를 물으니 한 햄버거 프랜차이즈가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과 협업해 세트 메뉴를 판매한다는 것이다. 그 정도 일로 왜 그렇게 서두르느냐고 했더니, 세트를 구매하면 조사병단 망토 담요와 키링을 한정 증정한단다. 아들은 매장당 10개 한정이라는 망토 담요를 노리고 있었다.
검색해 보니 프랭크버거가 지난 22일부터 〈진격의 거인〉의 명대사 “심장을 바쳐라!(신조오 사사게요·心臓を捧げよ)”를 이벤트명으로 내걸고 콜라보 세트를 판매 중이었다. 외출한 아들에게 급히 연락해 보았지만 이미 늦었다고 했다. 한정 굿즈를 노린 소비자들이 매장 개점 전부터 몰리면서 준비된 물량이 빠르게 소진되었다는 것이다. 굿즈가 동나자 중고 거래 플랫폼에서는 정가의 수십 배에 달하는 가격으로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프랜차이즈에서 상품에 덧붙여 제공하는 굿즈는 대부분 캐릭터만 앞세웠을 뿐, 품질 면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경험이 많다. 조사병단 망토 담요 역시 원가가 만 원 남짓일 것이라는 짐작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이렇게 몰리는 걸까. 겉으로 드러난 이유는 단순하다.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강력한 팬덤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 역시 이 작품의 팬이다. 작년 넷플릭스에서 전 시즌을 거의 몰아보듯 시청했다. 그렇다면 묻게 된다. 〈진격의 거인〉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일까?
1. 진격의 거인에 대하여
만화 <진격의 거인(進撃の巨人)>은 이사야마 하지메(諫山創)의 작품으로 고단샤(講談社)의 소년 매거진(別冊少年マガジン)에서 2009년부터 연재되었으며,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의 제1기(전 25화)가 2013년부터 MBS(每日放送)에서 방영되었다. 2017년에 제2기(전 12화)가, 2018년부터 2019년까지 제3기(전 22화)가 방영되었으며 2020년부터 22년까지 제4기(전 28화)가 OTT서비스인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 동시 방영되었다. 단행본은 2021년 6월에 완결되었으며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은 2023년 11월 4일, NHK(NHK総合テレビジョン)에서 완결 편이 방영되었다. <진격이 거인> 만화책 단행본은 11년 7개월간 총 35권, 139화가 발매되었고 애니메이션은 총 94화로 10년간 방영되었다. (* 25분 94화의 애니메이션을 정주행 하느라 2주의 시간이 걸렸다.)
<진격의 거인>의 인기에 대해 한 기자는 “치밀한 복선과 암시, 이미 결론까지 구상을 마친 탄탄한 스토리에 더해 거친 펜 선으로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액션 연출이 백미라는 것과 식인 거인을 바탕으로 한 종말론적 세계관과 기존의 코믹스에서 찾아볼 수 없는 박진감을 선사한다는 점, 원작자가 신인이라 오히려 기존의 관습에서 벗어나 물불 가리지 않는 장면의 연출과 다양하고 정교한 설정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김병수, ‘진격의 거인’, 한반도로 진격하다. 시사저널 2013)
* 왼쪽부터 크리스타 렌즈, 유미르, 사샤 브라우스, 애니 레온하트, 미카사 아커만, 코니 스프링거, 에렌 예거, 아르민 알레르토, 마르코 보트, 장 키르슈타인, 라이너 브라운, 베르톨트 후버. 훈련병단 104기 주인공들
<진격의 거인>은 압도적인 힘을 가진 거인과 이에 맞서는 인간들의 싸움을 그린 다크 판타지물로 인류가 거인으로부터 위협받는 현실 속에서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삼중의 벽(월마리아, 월로제, 월시나)을 쌓고 살아가는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작품은 벽 ‘안’의 안온한 100년이 파괴되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이전까지 굳건하게 인류를 지켜주던 벽은 거인이라는 강대한 적에게 무너진다. 이전까지 벽 ‘밖’의 세상을 동경하여 밖으로 나가고자 했던 주인공, 에렌과 아르민에게 그들의 예상보다 더 잔혹한 ‘밖’이 들이닥친다. 준비하지 못한 채 맞이한 ‘밖’의 폭력에 ‘안’의 인류는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삶의 터전을 빼앗긴다. 거인에 의해 가족을 잃게 된 에렌과 아르민, 그리고 이들의 친구인 미카사는 방벽 너머를 수색하고 정찰하는 조사병단에 입단하여 이 세상의 모든 거인을 한 마리도 남김없이 구축(驅逐)하겠다고 결심한다.
진격의 거인 속 갈등은 거인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의 전반부와 밝혀진 후의 후반부를 기점으로 달라진다. 전반부는 갑자기 나타난 거인들에 의해 삶이 파괴되며 거인들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주인공 에렌을 위시한 조사병단과 거인들의 충돌이라면, 후반부는 ‘유미르의 백성’이라 불리는 에르디아인과 과거 에르디아 제국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제국을 세운 마레인의 충돌, 그리고 마레 제국과 다른 나라들의 충돌이 나타난다. 즉, 전반부의 갈등이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와의 막연한 싸움이었다면 후반부의 갈등은 거대권력과의 싸움이다.
2. <진격의 거인>의 세계관과 땅울림
에르디아 부족의 노예였던 유미르는 알 수 없는 무언가에 거인의 시조가 되었다. 에르디아인들은 거인의 힘을 이용하여 세계를 정복하고, 이후 거인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내전이 벌어진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본 칼 프리츠 왕은 그동안 에르디아인들이 인류에게 저지른 죄에 대해 속죄하며 마레국의 인물을 영웅으로 내세워 에르디아 제국을 멸망에 이르게 하였다. 칼 프리츠는 자신의 뜻에 동의하는 에르디아인들과 다른 민족의 백성들을 모아 파라디 섬으로 이주하고, 마레국은 전쟁에 승리하며 거인의 힘을 손에 넣는다. 칼 프리츠는 자신과 백성들, 나아가 후손들을 보호하기 위해 거인의 힘으로 세 개의 방벽을 쌓고 거인들을 벽속에 감추어 놓았다. 전쟁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시조 거인의 힘으로 부전(不戰)의 맹세를 만든 후, 방벽 안의 백성들의 기억을 조작하여 방벽 밖의 인류가 거인에 의해 멸절되었다고 믿게 하였다.
대륙에 남은 에르디아인들은 죄인으로 취급받으며 차별과 멸시를 당하였다. 이는 마레 제국의 역사 교육과 맞물려 파라디 섬에 거주하는 인물들을 증오하는 결과를 낳았다. 마레 제국에서 불순한 사상을 가진 에르디아인들은 ‘낙원형’에 처해지는데, 이는 거인이 되는 약을 주입 당해 거인이 되어 파라디 섬으로 쫓겨나는 형벌이다. 식인 거인은 거인이 된 에르디아인들이며, 거인인 상태로 ‘아홉 거인’을 계승한 사람을 잡아먹으면 그 힘을 계승하였다. 마레 제국은 세계 정복을 위해 자신들이 가진 아홉 거인의 일부와 에르디아인들의 거인이 되는 성질을 무기로 사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나갔다.
3. <진격의 거인>이 말하려고 하는 것
주인공 에렌 일행이 마주한 벽 밖의 세계는 흐르는 물이나 얼어붙은 대지가 있는 신비한 곳이 아닌 죽고 죽이는, 자신들이 도망쳐 온 곳과 다를 바 없는 곳이었다. 구축(驅逐)해야 할 대상이었던 거인들은 동족이었고, 그들이 전쟁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에렌은 파라디 섬의 안전을 위해 섬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의 파괴를 결심한다. 에렌은 자신이 소유하게 된 시조 거인의 힘으로 인류 말살 계획인 ‘땅울림’을 감행한다.
에렌은 끝없이 자유를 갈망하였다. 방벽 밖을 나가는 조사병단의 별칭이 ‘자유의 날개’라는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이다. 작중에서는 거인으로부터의 자유를 외치지만, 이는 엄밀히 말하면 자유를 위한 수단으로써의 목표이며, 생존 경쟁을 위한 거인과의 투쟁은 생존을 넘어서 외부, 즉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몸부림에 가깝다. ‘진격’이라는 단어는 이 지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진격의 거인’은 작품 이름이며 동시에 주인공 에렌이 거인화한 이름으로 자유에 대한 갈망을 상징한다.
<진격의 거인>은 파이널 시즌에 이르면 에렌과 에렌의 땅울림을 지지하는 예거파와 이를 막으려는 조사병단과 거인들의 최후일전이 벌어진다. 어제의 전우가 적이 되어 싸우고 인류의 멸망 앞에 에르디아인과 마레인들이 일시적 평화를 이루어 땅울림 거인들과 맞선다. 에렌의 각성은 제거의 대상을 거인이 아니라 파라디 섬을 위협하는 벽밖의 인류로 바꾸게 하였다. 에렌의 배다른 형인 지크가 거인의 안락사와 소멸을 계획했던 것과는 반대로 에렌은 초대형 거인들이 지상의 모든 것을 밟고 나가 세계를 멸망시키는 ‘아무것도 없는 자유’를 추구한다.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려 폭력을 용인하지 않는 상태로 돌아가려는 이 행위는 일종의 운명론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에렌은 시조의 힘을 통해 미래를 볼 수 있었고, 파라디섬의 ‘자유’를 위해서는 밖의 세계를 파괴하여 ‘평평하게 바꾸는 것’이 유일한 길임을 깨닫는다. 벽으로부터의 자유, 거인으로부터의 자유, 에르디아인들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들로부터의 자유를 에렌은 땅울림을 통해 구현하지만, 이는 밖의 인류 전부를 몰살하는 것이며 에렌 자신이 피해자에서 학살자가 되는 길이기도 하였다. 자유를 갈망하던 소년이 어느새 그 자유를 인류의 자유를 빼앗는 것을 위해 사용하는 부조리한 아이러니가 이 만화의 핵심에 자리한다.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보다 더한 구원은 없다. 나는 자유를 얻기 위해 세상의 자유를 빼앗을 것이다.”
“난 말 그대로 벽 바깥의 인류를 근절시키려 하다가 너희에게 저지당하게 돼. 그 결과가 80퍼센트였지. 바깥 세계의 문명은 파라디 섬 수준으로 떨어질 거야. 그러니까 한쪽의 일방적인 보복 전쟁이 되진 않겠지만 이 싸움은 끝나지 않아....너희가 구할 수 있는 인류는 20퍼센트야. 이미 정해져 있어...나도 이미 몇 번이나 시도하고 실망한 건데, 미래의 기억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어. 아르민 네가 말했던 대로 난 자유의 노예야.”
에렌은 가장 자유롭고 싶었지만 가장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말았다. 에렌은 자유에 탐닉하다가 자유에 속박된, ‘자유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바깥 세계에 대한 꿈과 동경은 끝없이 서로 싸우고 증오하고 권력을 탐닉하는 자유의 허상을 깨닫게 되면서 자유를 위해 선택할 수 있었던 단 한 가지 방법은 다른 이를 짓밟고 그 위에 서는 것이었다. 에렌이 품은 극한의 자유주의는 세계의 평화를 위해 거인족 스스로를 멸절하려는 지크의 공리주의적 사고와 대척점에 서 있다. 에렌은 멈추기에 너무 멀리 와 있었다.
에렌은 끊임없이 진격할 뿐이다. 자유는 속박을 넘어서 파멸이 되었다. 에렌은 자유란 나의 선택뿐 아니라 타인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을 무시했다. 자유는 누려야 할 것이고 쟁취해야 할 것이지만 오직 자유만이 목표가 될 때 자유에 대한 욕망이 이성을 마비시키고 타인의 선택을 용납하지 않는 폭력과 억압이 발생한다. 애니메이션에서 죽어가는 케인이 리바이에게 남긴 말은 그래서 유효하다.
“넌 무엇에 취해있지?”
애니메이션은 거인이 사라지고 인류가 80% 사라진 후에도 또다시 새로운 타자를 만들어 싸움을 이어가는 인류의 이야기로 끝이 난다. 세상의 자유와 구원은 에렌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에렌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던 미카사가 실버 라이닝(silver lining)의 희망이었다. 거인의 시조였던 유미르는 프리츠 왕을 사랑하여 모든 자유를 왕에게 바쳤다. 그것은 복종이고 희생이었지만 거인이 세상을 지배하게 하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녀는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기를 그 누구보다 꿈꿨으면서도 정작 절대적인 자유의 힘을 얻은 다음에는 자진에서 다시 노예가 되기를 선택하였다. 절대적인 힘을 갖게 되었지만 그 정체는 의미가 없는 노예였던 것이다.
유미르는 스스로 복종의 사슬을 끊어내지 못하고 에렌에게 땅울림을 선물하며 자멸하였다. 미카사도 유미르가 그랬던 것처럼 에렌을 위해 헌신하였지만 그것은 복종이 아니었다. 미카사는 에렌이 멈추어야 함을 알았다. 미카사는 마침내 에렌의 목을 쳐서 인류를 구하였다. 미카사는 에렌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 에렌은 미카사가 자유의 노예가 되어 멸망으로 치닫는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이라 믿었는지 모른다. 미카사는 에렌의 잘린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 에렌의 얼굴이 평안함을 찾았다. 진정한 자유를 얻는 순간이었다. 애니메이션을 보고 나면 파라디섬 방파제에 이르러 바다 끝을 바라보며 에렌이 중얼거렸던 독백이 떠오른다.
“저 너머에 있는 적들을 모두 죽여 버리면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굳이 ‘에렌’을 떠올리지 않아도 분노하기 쉬운 세상이다. 그 기저에는 언제 엄습해 올지 모르는 불안전한 미래, 이에 동반하는 광기와 공포가 있다. 만화에서 인류로 대변되는 등장인물들이 거인과의 사투에서 맛보게 되는 절망이 그것이다. 만화 속의 등장인물들은 거인과의 대결에서 시원스러운 승리로 쾌감을 느끼기보다 거인의 수와 압도적인 능력에 무기력감과 패배감을 느낀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분노는 “심장을 바쳐라!”(心臓を捧げよ! 신조오 사사게요!)를 외치는 조사병단의 외침만으로 거인과의 대결에서 연속되는 위기감을 극복할 수가 없다. 거인과 마주하는 인류는 현재 우리가 당면한 냉혹한 현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해하기보다 먼저 분노한다. 불행하게도 우리 주위에는 마음만 먹는다면 피하려고 하더라도 접할 수밖에 없는 분노의 이유들이 넘쳐 난다. 입으로 허망한 자유만을 외치다 나라를 망쳐놓고 쫓겨난 집권자를 보면서, 무고하게 죽어간 이태원 골목의 불쌍한 청춘들이 남긴 이야기를 들으면서, 실업과 불황이 이어지고 나아질 줄 모르는 형편에 직면하면서, 누군가의 선택과 누군가의 침묵에 존재의 위협을 느끼면서 분노한다.
<진격의 거인>은 묻는다. 당신은 무엇에 분노하는가? 당신의 생각과 선택은 옳은가? 타인의 고통 위에 세워진 자유와 평화는 유효한가? 공동체가 추구하는 정의는 옳은가? 진정한 자유는 어떻게 오는가?
[여담] 진격의 거인과 이마이 아리후미
아라키 테츠로(荒木哲郎) 감독은 <진격의 거인> 3기 22화까지 연출했다. 그가 이끄는 WIT STUDIO에는 이마이 아리후미(今井有文)라는 걸출한 작화가가 있었다. <진격의 거인>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할 때 가장 큰 우려는 원작에서 참신한 콘셉트로 인기를 끌었던 조사병단의 ‘입체기동’ 장면을 어떻게 애니메이션에서 연출할 지의 문제였다. 이마이 아리후미는 눈으로 좇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격렬한 입체기동신을 3D로 표현하는 대신 원화를 직접 그렸다.
<진격의 거인>은 이마이 아리후미에 의해 재탄생했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다. ‘어떻게 액션을 구성하는가?’ 라는 질문에 그는 “원작을 읽고 움직임을 이미지화하거나, 영화와 게임의 영상에서 자극을 받아 생각한 재료를 바탕으로 그림 콘티를 그려낸다”라고 대답했다. 3기 2화에 나오는 리바이대 케니의 장면은 실제로 작업에 들어가기 전 몇 달이 걸린 장면으로 고속 회전카메라를 돌린 듯한 역동적 연출과 롱테이크의 극적인 액션으로 유명하다.
진격의 거인 3기 2화 롱테이크 액션신
https://www.youtube.com/watch?v=DT_T1Hix7U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