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 23절~26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5:23~26)
들어가며
사도행전 8장에는 돈을 주고 성령의 능력을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마법사 시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드로는 시몬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사려하느냐고 호되게 질책하였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고팔 수가 없습니다. 성령뿐인가요, 복음도 선물입니다. 선물은 공짜라는 생각해 값어치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그 선물은 독생자를 희생한, 가장 고귀하고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 것이지만 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누구나에게 알려진 음식 레시피처럼 값싼 은혜입니다.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사과와 용서, 화해에 대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너희의 큰 죄를 값없이 용서했으니 너희도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요?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도 용서하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용서하면 화해가 금방 이루어지던가요? 이러다가 내가 병들어 죽을 것 같아서 상대방을 기억에서 지우려고 하는 노력이 용서 아닌가요? 무엇인가 잃지 않기 위해 인내하면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할 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화해입니다. 저는 기독교인들이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 늘 죄책감이 빠지는 것은 또 하나의 율법주의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섣부르게 용서와 화해를 권유하는 것은 매우 위험해 보입니다. 하나님이 그랬으니 용서하라고 화해하라고 권하는 것은 듣는 사람, 특히 피해자에게는 큰 상처로 다가옵니다. 어떻게 보면 남을 용서하고 화해하고 싶지 않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기도하는 것이 옳습니다.
사과와 용서, 화해의 여정에는 값없는 은혜가 넘치기보다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에서 선행되어야 하는 일정한 채무 조건이 있어 보입니다. 그냥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었다면 예수님은 비유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마태복음 5장의 말씀으로 이런 궁금증을 풀어보려 합니다.
1. 사과는 어떻게 하는 걸까요?
사과는 흔히 인간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구사하는 가장 진화적인 기술로 꼽힙니다. 사과는 구체적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방에게 진심 어린 반성을 전달하는 행위입니다. 효과적인 사과는 관계를 회복하고 신뢰를 재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일반적인 사과의 원칙은‘CAT’란 세 글자의 영문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Content[내용], Attitude[태도], Timing[타이밍]입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성 있게. 빨리 사과하라는 말입니다. 올바른 사과를 위해 일반적으로 말하는 구체적인 팁이 크게 다섯 가지 정도 있습니다.
첫째, ‘미안해’라는 말 뒤에 ‘다만’ ‘하지만’ 등의 표현은 절대 하지 말 것.
둘째, ‘무엇이’ 미안한지 구체적으로 밝힐 것.
셋째, ‘내가 잘못했다’고 명확하게 인정할 것.
넷째, 재발 방지를 약속하고 보상의 내용을 상세하게 표현할 것.
마지막, 늦지 않게 최적의 타이밍을 찾을 것.
사과는 참 어렵습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먼저 고개를 숙이는 것은 더 힘든 법입니다. 그럼에도 이왕 사과를 하기로 용기를 냈다면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남에게 상처와 고통을 떠넘겨 지켜진 자존심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독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2. 스키틀즈와 국민의 힘의 사과
사과하면 떠오르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2023년, 다국적 기업인 스키틀즈는 ‘무지개에게 사과드립니다(Apologize the Rainbow)’라는 캠페인 광고를 했습니다. 스키틀즈에서 만든 젤리 사탕을 아마 아이들 키우면서 한 번 정도는 먹어봤을 겁니다. 이 제품은 1974년 영국에서 최초로 개발되었고 우리나라에는 1987년에 들어왔습니다.
스키틀즈 오리지널의 맛은 모두 5가지로 딸기맛, 레몬맛, 포도맛, 오렌지맛, 라임맛입니다. 그런데 스키틀즈가 2013년 그린애플(Green Apple)맛을 새롭게 출시하면서 기존의 초록색 사탕인 라임(Lime)맛을 제품 패키지에서 빼버렸습니다. 그러자 라임맛을 좋아했던 기존 소비자들이 엄청 반발을 했습니다. 스키틀즈의 발표에 따르면 정확히 13만 880명의 고객들이 트위터에서 9년 동안 비난을 퍼부었다고 합니다.
결국 스키틀즈는 9년 만에 소비자들의 바람대로 라임맛을 복귀시켰습니다. 스키틀즈는 공개적으로 고객들을 무시한 자사의 실수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이벤트를 열었습니다. 기자회견장 같은 세트를 마련하고 돌아온 라임맛 사탕을 플라스틱 투명 바구니에 가득 담았습니다. 화면 왼편에는 ‘생중계-라임 스키틀즈가 돌아오다(Live–Lime Skittles Are Back)’라는 자막을 깔았습니다. 스키틀즈 홍보 최고 책임자가 직접 자리에 앉아 사과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먼저 “2013년 라임맛을 없애면서, 많은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라임맛은 돌아왔습니다. 불편함을 끼친 모든 분께 사과드립니다”라고 하고는 트위터에서 스키틀즈를 비판했던 모든 문구들을 하나하나 읽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면 “000님, 스키틀즈는 그린애플 만드는 것을 당장 멈춰야 합니다. 그건 너무 끔찍해”라고 말씀해 주셨네요. 사과드립니다. “000님, 스키틀즈 제대로 미쳤다”라고 말씀해 주셨네요. 사과드립니다. 이런 방식으로 35분 동안 트위터에 올라온 비난글을 하나하나 읽고 다 “아임 소리”를 붙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스키틀즈를 비난한 13만 880명의 유저들 중 83,868명의 계정 하나하나에 사과의 댓글을 달았습니다. 또 이들에게는 모두 새로운 스키틀즈를 선물했습니다. 이 방대한 양의 사과 댓글은 옥외 광고로도 공개했는데 길이가 약 5미터 정도로 다 읽는 데에만 무려 10시간 55분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 사과 캠페인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해당 캠페인의 방송 누적조회수는 566만 건을 기록했고 구글에서 ‘스키틀즈’ 관련 검색어는 1000%, 스키틀즈 오리지널 팩의 매출은 21% 이상 급증했습니다. 스키틀즈는 젤리 캔디 맛 하나 잘못 선택한 것에 대해서도 사과를 이렇게 극진히 했습니다. 감동도 있고 재미도 있었습니다. 한 대기업이 농간을 부려 사과방송을 마케팅으로 써먹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과거의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브랜드의 진성성에 스키틀즈의 팬들이 크게 호응을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것과는 참 대조를 이루는 사과도 있었습니다. 국민의힘 원내대변인을 맡고 있는 박수민 의원은 새 정부가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지난 6월 5일 기자들을 모아놓고 반성문을 읽었습니다. ‘국민의 힘은 탄핵 반대당, 계엄 옹호당이라는 낙인을 우리 스스로가 찍었다. 국민의힘 의원 중 빨리 한 명이라도 사과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저부터 릴레이로 하겠다’고 말하며 돌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올렸습니다. 이 릴레이 사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6일, 최형두의원, 8일 최수진의원으로 끝났습니다. 국민의 힘은 애초부터 사과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5,200만 국민을 계엄의 공포로 몰아넣고 대선을 말아먹은 정당이 릴레이 사과를 한다니 그것도 3일 만에 끝이 났습니다. 감동도 없고 재미도 없고 어처구니까지 없습니다.
3. 성경에 '사과'란 말이 나올까?
성경에 사과란 말이 나올까요? 개역개정 성경을 기준으로 검색해 보니 ‘사과나무’란 말은 나와도 ‘사과’란 말은 안 나옵니다. ‘사과’ 와 비슷한 어휘로 ‘사죄’라는 말이 두 번 정도 나옵니다. ‘사과’하면 언뜻 떠오른 이야기는 야곱과 에서와 해후하는 장면(창세기 33장)이나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용서를 구하는 장면(창세기 50:15~21)이 있지만 본문을 읽어봐도 직접적으로 “미안하다”거나 “사과한다”는 표현은 찾기 힘듭니다. 성경에는 오늘 함께 읽은 마태복음의 본문에서처럼 사과라는 말 대신 화해, 화목이란 말이 더 나오고, 그 보다 더 ‘용서’라는 말이 훨씬 많이 나옵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사과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용서’라는 말속에 이미 ‘사과’의 행위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성경은 주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는 ‘사죄’라는 말이 있을지언정 ‘사과’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아서 일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화목죄로 십자가를 지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신과 인간의 화해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와 구별해 ‘용서’를 제시합니다. ‘용서’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본질적 표현입니다. 용서란 다른 이들이 당신에게 진 빚을 탕감해 주는 것과 같으며 당신에게 저지른 해악에 대해 복수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8장 비유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말미암아 일만 달란트의 죄의 빚을 탕감받은 자로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빚진 오백 데나리온의 죄를 탕감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는 웬만해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빚인 일만 달란트를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공짜로 보이지만 결코 무료가 아닙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은 최소한 오백 데나리온은 손해를 봐야 합니다. 삭개오는 어땠나요? 구원이 삭개오의 집에 이르렀지만 삭개오는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속여 빼앗은 재물은 네 곱절이나 갚겠다고 했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은 다시는 이 같은 죄를 범하지 말라는 예수의 권유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용서는 엄청난 은혜이고 선물이지만 예수는 대가가 있다고 말합니다.
*** 용서와 화해의 구별. 용서라는 단어는 그리스어로 ‘아페시스’(aphesis)인데 이는 ‘빚을 면제해 줌’을 뜻한다. 용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빚에서 해방되게 해주는, 그래서 서로 주고받는 일종의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는 예수의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이는 용서가 사실은 죽음만큼 어렵다는 사실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는 누구도 따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존 바클레이(John M.G. Barclay)가 말하는 선물로서의 은혜를 극대화시키는 여섯 가지의 요소 중에서 비상응성(incongruity), 비순환성(noncircularity)의 개념과 연계시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용서는 엄밀히 하나님에게만 속한 일이고, 인간은 궁극적인 지향점으로서의 하나님 용서를 흉내 낼 수 있을 뿐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상반절)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사과를 요구하지 않으셨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용서가 상대방이 사과하는 행동에 종속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즉 용서는 상대방의 사과 여부와 관계없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용서는 사과를 초월한 행위입니다. 용서는 사과에 의존하지 않고 일방적이고 독립적이며 주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신약에는 상대방의 사과 여부와 관계없이 용서하라고 합니다. 이는 사과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주체적이고 초월적인 은혜와 사랑을 반영합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심지어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여기에는 큰 의문이 존재합니다. 죄를 지어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면 사과는 불필요한 것인가? 인간관계에서 사과라는 행위는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인가?
일상생활에서 용서는 사실 피해자보다 진정으로 사과하지 않는 가해자에게 더 유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피해자가 상처로부터 벗어나는 가장 위대한 방법은 예수님처럼 위대한 사랑으로 상대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용서를 통해 피해자의 내적 자유를 강조하는 점은 머리로 이해할 수 있지만 사과받지 않고 용서하는 일이란 현실적으로 너무나 어렵습니다. 더구나 사과하지 않는 상대라면 더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도 알 것입니다. 용서를 해도 피해받은 사실은 절대 잊히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용서하지도 잊지도 않는다. 순진한 자는 용서하고 잊는다. 현명한 자는 용서하나 잊지는 않는다.”(The stupid neither forgive nor forget; the naive forgive and forget; the wise forgive but do not forget.) - 토머스 사즈(Thomas Szasz)
심리학에서는 치유의 과정에서 사과와 용서를 한 쌍으로 이해합니다. 사과는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과정이며,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서 벗어나 자유와 회복을 얻는 과정입니다. 용서는 사실 상대방이 용서받을만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는 그것이 자신의 내면을 살리는 평화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사과보다 용서가 독립적으로 강조됩니다. 죄를 사함 받는 하나님의 용서가 인간에게 자유를 허락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과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성경이 개인적 문제 해결보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더 큰 그림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잘못을 사과하는 것이 쉬울까요? 아니면 사과받지 않고 상대를 용서하는 것이 쉬울까요? 저는 사과하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합니다. 용서는 사과의 여부와 상관없는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진심이 담긴 사과를 받는다면 어떨까요? 용서하기가 좀 더 쉽지 않을까요?
4. 마태복음 5장, 예수님의 관점
예수님은 분명 ‘사과’라는 말보다 ‘화해’, ‘화목’이란 말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화해’는 사전적으로 ‘싸움하던 것을 멈추고 서로 가지고 있던 안 좋은 감정을 풀어 없앰’, ‘민사상의 분쟁을 재판 이외에 당사자 간에 해결하는 일. 또는 그 화해 계약.’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생각하게 됩니다. 용서했다고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화해하려면 분명 사과를 하고 사과를 받는 행위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원망 들을 만한 일’은 곧 다른 사람에게 정신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상처 준 일을 말합니다. 그런 일이 없으면 원망 들을 일이 없습니다. ‘거기서’라고 한 것은 ‘예물을 드리려고 제단에 갔을 때’라는 상황을 가정한 것입니다. 제단에 나가는 일은 유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례입니다. 다른 상황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예배드리러 가는 일 앞에서조차 자신의 잘못이 생각나면 속히 가서 ‘화해하라’는 것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화해’는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우리 화해하자’라고 말한다고 화해가 절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적어도 앞에서 말한 오해를 풀고, 잘못을 인정하고, 진정성 있게, 잘못에 대한 재발 방지 약속을 할 때 가능합니다. 만약 다른 사람에게 물질의 손해를 입히거나, 인격을 모욕한 행위 등의 피해를 일방적으로 주었다면 화해를 위해 상대방이 납득할 때까지 사과를 해야만 가능합니다. 본문에서 ‘생각나거든’이란 말은 자기조차 잘못을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치는 상황이 올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혹은 성령께서 그 잘못을 생각나게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그런 잘못은 별것 아닌 것처럼 넘어가는 사소한 일이기 쉽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잊지 못할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잘못은 누구나 알게 모르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을 바로 잡으려고 하는 노력은 별개입니다. 논어의 위령공편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是謂過矣)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 것, 이것이 잘못이다.
예수는 잘못을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깨달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와 화목하지 않고 제단에 예물을 바칠 생각을 하지 말라. 그런 사람은 주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마5:25).
이 말씀은 가해자에게 하는 경고처럼 들립니다. 남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 피해자를 만나면 ‘급히’, 즉 자발적으로 타이밍 놓치지 말고 빠르게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화하라’(ευνοεω)는 ‘너의 잘못된 행위에 대해 고소한 사람과 친구가 돼라(make friends with the person who has accused you of doing wrong-CEV성경)’는 뜻입니다. 화해는 마지못해 하는 형식적인 사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친구의 관계로 나간다는 것은 상대가 받아줄 때까지 사과했다는 말입니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5:26).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처 준 일은 쉽게 잊어버리는 반면 상처받은 일은 오래 기억합니다. 여기서 ‘한 푼’(κοδραντης)은 ‘지극히 작다’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한 푼까지도 다 갚아야 한다’고 한 말은 무심코 한 언행으로 남긴 작은 상처라고 할지라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의미가 됩니다. ‘거기서’는 ‘감옥에서’라는 말입니다. 감옥에서 나오려면 사과하고 실질적 행위, 즉 갚는 행위를 통해 용서를 빌어 화해하는 것입니다. 채무자의 채무이행과 같습니다. 공짜가 아닙니다.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듯’ 완전하고 철저해야 하는 것처럼 사과와 보상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감옥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말씀을 보면 사과하라는 말만 하지 않았지 사과의 5단계를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5. 사과 없는 용서? 공짜는 없다
사과받지 않는 용서가 가능할까요? 예수님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우린 그렇게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피해자가 용서를 통해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가해자에게 은혜를 베풀며, 자신의 내적 자유를 얻는 과정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족을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서로 묵묵히 희생하고 상처를 안고 살아가면서 사과 없이도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복잡한 감정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과 없는 용서는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거나,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행위로 비칠 위험이 있습니다. 사과받지 않고 용서할 수 있지만 분명 한계가 있어 보입니다.
예수님은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마18:22). 이는 상처받은 사람 곧 해를 입은 사람이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결코 죄를 범한 형제가 사죄하지도 않는데 찾아가서 계속 당신을 용서하겠다고 말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말을 하셨을까요? 상처 준 사람이 사과하면 그것을 외면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상처받은 사람은 마음이 힘들어도 상대방이 사과할 때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함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요?
만일 가해자가 진정한 사과의 마음이 없다면 용서해야 할까요? 마음에 사무친 상처는 사과를 받는 것 자체가 큰 아픔입니다. 사건은 잊혀도 상처는 그대로 각인되기 때문입니다. 피해자라면 미흡한 사과에 더 격분하기 마련입니다. 용서할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는 오로지 피해자에게 있습니다. 가해자가 죄를 회개했다고 하나님이 진짜 용서하셨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또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손을 가지고 지옥으로, 그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지체장애인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저는 발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막9:42~47 표준새번역)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자 한다면 마가복음 9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범죄 한 손과 발을 잘라내고 범죄 한 눈을 파버려야 할지 모릅니다. 적어도 그런 각오가 있어야 용서를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용서하기 위해 독생자 예수를 희생제물이 되게 하는 막대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하면 뚝딱 용서가 이루어질까요? 면죄부를 받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거면 예수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으면 눈에 보이는 피해자에게 몇 곱절 사과해야 옳습니다. 형제와 화해하고 예배에 참여하라는 말씀처럼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지난 윤석열 정부는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외면한 대일 굴욕외교로 지탄을 받았습니다. 일본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했습니다. 사과하지도 않는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강요하는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나약한 피해자를 향해 용서하라고 그럴 것이 아니라 그럴 힘이 있거든 용기를 내서 힘센 가해자를 향해 사과하라고 요구해야 마땅할 일입니다. 용서는 피해자가 하는 것이며, 누구도 용서를 하라고 피해자에게 강요할 수 없습니다. 용서는 가해자의 태도와 맞물려 피해를 입을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 힘겹게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글을 마치며
남을 존중하고 사과하고 용서하고 마침내 화해하는 일은 구원의 여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얼마 전 선종을 맞은 프란시스코 교황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사과할 수 없다면 이는 우리가 용서할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If we cannot apologize, it means that we are unable to forgive.)
사과할 수 있을 때 용서도 할 수 있습니다. 빚을 탕감받아본 사람이 남의 빚도 탕감해 줄 수 있습니다. 사과와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악순환을 반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무조건적 용서는 평화롭고 감동적일 것 같지만 실제로 이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거칠고 사나우며 혼란스러운 세상입니다. 사과는 용서로 가는 지름길이지만 용서를 통해 가해자의 과오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피해자의 상처도 그대로 있습니다. 용서했다고 증오와 미움이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들을 생각날 때마다 끝없이 마음 밖으로 밀어낼 따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용서받기에 앞서 사과할 줄 알아야 하고 사과는 궁극적으로 용서를 넘어 화해로 나아가야 합니다.
다만 유의해야 할 것은 용서는 일방통행이지만, 화해는 양방향이란 사실입니다. 우린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지만 모든 사람과 화해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지 못하거나 적절한 배상을 할 줄 모르고, 자신의 존엄과 신체적 안전을 위협하는 사람과는 화해할 수 없습니다. 현실에서는 서로 거리를 유지하고 피해야만 합니다. 그런 사람을 늘 곁에 두어야 한다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입니다. 용서는 화해로 향해 가기 위한 첫걸음이고 화해를 향해 열린 문입니다. 사고와 용서에 머물지, 아니면 화해로 더 나아갈지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8:18)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6:31)
예수님은 인간이 가야 할 궁극의 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이 이어지는 화해의 길이고 예수님이 이어 놓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해 주었으니 적어도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 정도는 빚을 탕감해 주어라, 구원을 선물로 받았으니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용납하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태복음 6장 12절)라는 구절을 주기도문에서 빼고 외워야 할지 모릅니다. end.
*영어로는 "우리가 빚진 자를 용서하였으니 우리의 빚도 용서해 주세요.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forgive our debtors)."라는 말이다.
* 독일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를 말살하려고 했었다. 폴란드내 유대인을 가두고 절멸시키려 했던 것은 물론, 폴란드 지도층, 지식인, 성직자, 교사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계획을 세웠다. 이로 인해 1939년 폴란드에서는 500만 명 이상이 학살됐다. 당시 무릎을 꿇었던 브란트 총리는 나치 독일에 저항하고, 망명했던 당사자로서 폴란드나 다른 지역에서의 전쟁범죄에 기여하지 않았지만, 총리로서 짊어진 짐 중 독일의 과거사가 가장 무거웠다고 밝힌 바 있다. 1970년 12월 7일 폴란드와의 관계 정상화를 위한 바르샤바 조약 체결을 위해 독일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폴란드를 방문했던 이 사죄는 오늘날까지 상징적인 장면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