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을 나서서 북쪽으로 가면 논과 밭들이 있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정류장과 시골장터가 있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잰걸음으로도 고작 10분여의 거리, 그날이 되면 엄마는 최고로 치장하고 나섰다. 그 몇 안 되는 목적지를 오가며 지낸 세월이 평생이다. 지구 몇 바퀴를 돌만큼의 거리를 늘 익숙한 고향땅에서 수천번, 수만 번을 되돌아다니며 걸어 다녔다. 그 길이 닿도록 닿아도 우리 엄마의 경계선은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고향집에서는 언제나 우리 엄마였는데, 조금 큰 도시의 마트에 모시고 갔더니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나와는 손깍지를 꼭 끼고, 걸음걸이는 느려지고, 보이는 화려한 것에도 아무런 흥을 못 느낀다. 막내딸과 손주를 위해서 뭔가를 사주고 싶어 하셨다. 그리고 좋아하시는 떡을 조금 사셨고, 일 년간 드실 마늘이 필요하다 하셨다. 도시의 마트는, 엄마에게는 별 볼 것이 없는 곳이 되었다.
우리 아버지는 요즘 수시로 잠을 주무신다.
올백으로 넘긴 머리칼은 애초에 백발이 되었고, 흰 셔츠에 흰 파자마를 입으신 모습은 꼭 신선 같다. 요는 늘 펼쳐져 있고, 주무시는 옆으로는 휴대폰, 집전화기, 리모컨 그리고 지팡이도 함께 뉘어져 있다. 좀 먼 거리에 있는 것들은 지팡이가 효자손 노릇을 톡톡히 해준다. 텔레비전은 늘 켜져 있고, 방안의 불은 끄지 못하게 하신다. 불안하신 건지, 적적하신 건지... 한 번은 너무 곤히 주무시길래 텔레비전도 끄고, 전등불도 껐더니 새벽에 일 보실 때 어두워 넘어지셨다고 한다.
그렇게 자주 주무시는 우리 아버지를 벌떡 일어나게 하는 일들이 아직도 있다.
일주일에 한 번은 6.25 참전용사협회의 대표 자격으로 읍내로 출타하시고, 얼마 전에 끝난 군에서 열린 게이트볼 경기에서는 면대표로도 활약하신다.
그리고 어떻게 논으로 밭으로 가셔서 꼴을 베고, 고추를 따는지 직접 보지 못한 나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아무튼 농사에서도 완전히 손을 떼시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나서는 뒷모습을 보면 아직도 청년이신 것 같다. 몸은 지팡이를 짚고 조심조심 걸으시나, 마음이 어찌나 활달하신지 결국 누워있던 몸도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따라가는 것 같다.
요즘 들어 잘 드시고, 잘 주무시는 나의 예쁜 엄마, 아버지를 모시고 도시의 사진관에 갔다. 다음을 기약하기보다는 지금 꼭 하고 싶었고, 해야 할 일이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 부부의 연을 맺었는데, 그럴듯한 두 분의 사진이 없다. 거의 70년 전, 혼례식을 올리고 부부가 되신 두 분, 하도 까마득해 그때의 계절도 잊어버리고 살아오셨다.
아버지야 원래 멋지시지만, 새삼 엄마를 꾸며놓고 보니, 너무나 고우시다. 평생 입어볼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저 딸들이나 입는 건 줄 알았는데, 막상 본인이 입어보시니 구름에 둥둥 떠있으신 것 같다. 배고프실 텐데 설레서 간식도 마다하시고, 거울을 보시는 모습이 고운 꽃 한 송이다. 살결이 하얀 어깨를 드러내고, 목에서부터 연결된 깊게 파인 쇄골은 아름답다. 양어깨 아래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레이스는 젊은 사람이 입은 것보다도 생기 있고, 자연스럽다. 마른 엄마에게 맞춰 꽉 조여진 드레스를 입은 자태가 한없이 청초하기만 하다.
엄마가 짓는 미소가 너무나 부드럽고 환해서, 잊어버리고 있었던 나의 웨딩촬영 때가 오버랩된다. 엄마 표정을 보다, 서른 살의 나도 저 때 저런 표정을 지었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와 난, 똑 닮아있었다.
아버지와 엄마가 마주 보신다. 그 눈빛 속에는 그동안의 세월이 다 담겨 있다. 평생을 부딪치고 넘어지고 상처 주며 지내왔던 세월이 알고 보니, 사랑이었다. 너무 고운 사람, 너무 멋진 사람...
먼저 가지 않고 곁에서 버티어주고 살아주는 사랑,
고운 정보다도 미운 정이 더 많아 미워하려다가도 아기처럼 변해가는 서로를 눈짓으로 바라보게 된다. 지나간 세월은 허무하기만 하고, 남아있는 세월은 야속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