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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su Dec 13. 2021

사랑의 온도

이천 이십일 년 십이월 십삼일 새벽 한 시 오십이 분

학교로 내려가는 버스 안에 따뜻한 온기가 가득하다. 바깥과 온도차로 습기가 번진다. 창문에 창문의 눈물이 고였다. 창밖에 불빛이 모두 윤슬을 닮은 기분이다.


잠잠해질 기미가 전혀 없는 코로나가 세상을 휘젓고 다녀도 여행에 대한 내 마음은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점점 더 커져만 가는 이 마음이 겁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나 졸업 여행은 정말 양보 못해!!! 입학하고 10년 만에 하는 졸업인데 코로나고 뭐고 무조건 갈 거야!!'

주변에 있는 모두에게 선전포고라도 하듯 여기저기에 일 년 뒤의 졸업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다녔고 주기적으로 알바도 하지 않고 용돈을 적게 받는 나는 돈을 모을 궁리를 하다가 단기 알바를 하기로 했다. 타이밍 좋게 12월 한 달 동안 주말 알바를 하게 됐고 이날은 알바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 엄마와 닭발에 맥주를 한잔 걸친 날이었다. 이른 점심에 배가 고파 허겁지겁 맥주와 닭발을 먹은 터라 배가 불러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은 어느덧 새벽 한 시. 아빠는 언제쯤 오는 거지 나도 이제 자야겠다 싶을 즈음 거래처 사장님과 술잔을 거하게 부딪힌 아빠가 집에 들어오셨다. 부스럭 부스럭 - 무언갈 사 오셨는지 비닐봉지 소리가 들렸고 그걸 식탁에 두는 소리가 들렸다. 내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난 자는 척을 했다.


어릴 적 아빠가 술에 취한 모습을 무서워했다. 가정폭력을 했다거나 심각한 일을 저지르신 것도 아닌데 어린 마음에 눈빛과 말투가 바뀌는 모습이 이상했던 거 같고 사춘기 땐 유난히 아빠랑 자주 싸우고 그래서 혼이 자주 났는데 그런 날 저녁이나 다음날이 되면 아빠는 무조건 술을 드시고 오셨었다. 그래서 나는 술에 취한 아빠가 집에 들어오실 때면 항상 자는 척을 했다.


내 방에 들어온 아빠는 '아이고 우리 수연이 우리 큰딸' 하면서 대충 덮은 이불을 가지런히 덮어주셨고 등이 돌아져 있어 몰랐지만 아빠의 시선이 느껴졌다. 10초 정도 흘렀을까 아빠는 조용히 내 방에서 나가셨다. 아빠가 나가고 5초 정도는 '휴 안 들켰다.'라는 마음이 들었는데 그 뒤로 갑자기 코 끝이 찡해지더니 이유모를 눈물이 났다. 이 눈물이 왜 나는 걸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거실에서 아빠의 혼잣말이 들렸다.

'아유 우리 수연이 내일 학교 가는데...' 내 생각이지만 내일 학교에 가서 또 며칠간 얼굴을 못 보는데 술을 먹고 들어와 학교에 가기 전 얼굴을 제대로 못 봐서 속상해하시는 말 같았고 그 말을 뱉고 몇 초 뒤 아빠는 또 내 방에 들어와 다시 한번 내 이불을 덮어주고 나가셨다.

호랑이 같았던 우리 아빠가 말라지고 약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몇 년 전부터 내 마음이 이상해지는 게 느껴졌었다. 오늘 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곧 서른 살이 되는 딸이 뭐가 걱정돼서 와서 이불을 두 번이나 덮어주고 가시는 건지 요즘 아빠를 보면 가까운 거래처라도 다 낡아빠진 오토바이가 아닌 제대로 된 자동차 좀 몰고 다니셨으면 하는 마음밖에 안 드는데 말이다.


그런 아빠의 행동들을 보면서 내가 어른이 되어가니 아빠와 정말 많은 에피소드가 있어서 일까 어릴 적부터 계속해서 아빠의 사랑을 이런 마음으로 이해했더라면 지금 이런 눈물 따위 나지 않고 온전히 아빠의 마음을 받을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싸워가며 미워하며 보냈던 사춘기 때의 시간들, 깊은 마음에는 없던 가시 돋친 말들, 차마 하지 못해 쌓여있는 사랑한다는  아쉬움과 슬픔 미안함이 마음속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취해 늦은   방에 들어오는 아빠의 발걸음이 숨고 싶은 피하고 싶은 방문이었는데 어느덧 따뜻한 사랑의 온도라고 느껴졌고 사랑받고 있다고 느껴졌다.



알바를 끝내고 버스에 올라타니 버스 안이 습기로 가득했다. 이어폰에서 문득 아빠가 떠오르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워진 버스를 가림막 삼아 눈물을 훔쳤다. 우리 서로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맞이했던 딸이고 아빠였는데 이제라도  어리숙함을 이해하게 되어 왜인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하루빨리 정리해 제주도로 내려가고 싶어 하는 아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빠 ~ 내가 많이 사랑해 우리 건강하게  소소하게 제주도 가서 좋아하는  하면서 살자 조금만 힘내!!' 답이 없는 아빠지만 어떤 마음이었을지 알기 때문에  마음이 전해졌기만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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