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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su Sep 20. 2022

무덤덤하게 맞이하는 좋아하는 것들

2022.09.20

아득히 높아지는 하늘이 점점 멀게만 느껴진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날씨의 변화가 무덤덤해진다. 살짝 부는 찬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그 상쾌한 기분을 좋아했는데 내가 어느샌가 나만의 작은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 서른에 맞이하는 가을은 조금 쓸쓸하면서도 편안하지 못하다.


나는 가을이 되는 과정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온도차가 심한 날엔 콧물을 훌쩍이기도 하지만 무더운 여름을 물리치고 내게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상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왠지 더 이 계절이 되면 더 이쁘게 느껴지는 노을도 한몫하고 말이다.

오늘은 제법 날씨도 쌀쌀해졌고 낮부터 하늘이 푸르른 색을 띠고 햇살이 가득해 산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학기가 시작하고 이렇게 여유로웠던 적이 있는가 싶었다. 무언가에 의해 꽉 찼던 숨통에 에어포켓만큼의 자리만 남아 아등바등, 겨우겨우 팔구월을 보내왔는데 피부에 와닿게 가을이 와서야 조금이지만 시원하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온몸의 면역에 무너지더니 삼 년을 걸리지 않고 버틴 코로나가 찾아왔다. 건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무너지니 이때다 싶어 침투한 바이러스가 날 죽어라 괴롭혔다. 격리가 끝나도 컨디션이 돌아오지 않아 쓰러지기도 했고 그 덕에 오랜만에 손에 바늘도 꽂았다. 주변의 챙김을 받으니 한 달 동안 못 본 가족들이 보고 싶기도 했고 코끝이 찡해지는 순간도 많은 근래였다.


가을이 오고 온몸이 저릴 정도의 겨울이 오면 사 년 만에 혼자 여행을 떠난다. 날씨의 변화가 무덤덤해지면서 좋아하는 계절이 오는 것에 대해 별 기대가 없었는데 결국 시간이 지나 기다리던 겨울이 오면 그때는 어떤 기분의 내가 있을까.

내게 여행은 행복을 찾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삼십 대가 돼서 처음으로 하는 여행은 내게 어떤 존재로 어떤 의미로 남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면 밤잠을 설치곤 한다. 마음이 백 프로 좋지 않은 이유는 알 수가 없다. 그렇게 기다리고 원했던 여행인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이 마음을 꺼내어 지금 너는 어떤 기분인 거냐고 묻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자전거를 타면서 알게 된 사실은 이어폰에서 여행지에서 듣던 노래가 흘러나오니 코끝이 찡해졌고 나는 작은 행복감을 완전히 잊지는 않았다는 거였다.


이 고대하던 배낭여행이 내 인생에 어떤 길을 만들어줄지 모르겠다. 커다랗게 부푼 이 마음이 일상으로 돌아오면 현실과 부딪혀 터질까 품에 고이고이 간직하고는 있지만 그곳에서의 나는 이십 대 때의 나처럼 아니 보다 더 웃었으면, 행복했으면, 뿌듯했으면, 자신감을 얻었으면, 사랑스러웠으면 한다.

며칠 전 전화가 와서는 여행을 떠날 때 용돈을 주겠다는 엄마를 말렸다. 지금까지 부모님의 큰 도움 없이 혼자서 여행을 했기에 이렇게 뿌듯한 나 자신을 마주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나를 지키고 싶었다. 조금 부족해도 못 먹어도 그때의 나는 그 부족함도 여행의 일부분이라 뿌듯했으면 뿌듯했지 전혀 부끄럽지도 않았고 누군가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제스퍼에서 밴쿠버까지 하루를 걸려 이동하는 침대방이 있는 기차를 보고 마음이 반짝였고 엄마에게 용돈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pm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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