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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su Jan 28. 2023

12. 화가의 여행

Canmore, CANADA

한국을 떠나온 지 15일째,

나는 오늘 제일 나다운 여행을 했다.


어젯밤에 숙소에 들어가니 세명의 룸메가 생겼다. 딱 봐도 피곤해 보였고 딱 봐도 연배가 있어 보였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도시이동 버스를 타야 하기 때문에 그들이 잠들기 전에 부랴부랴 짐을 정리했다. 호스텔이라 별 수없는 일이지만 그들에게 최대한 긴 잠을 선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침 일곱 시 반, 나만 일어났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들의 침대에서도 빛이 희미하게 나오고 있었고 화장실에 다녀오니 방불은 이미 켜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제일 긴 시간을 함께 보낸 룸메와 인사를 하고 숙소를 나섰다.


오늘은 캘거리와 한 시간 반정도 거리에 있는 캔모어로 떠난다. 실제로 한 15년 전쯤 한국에서 유행을 했던 빙수집인 캔모아의 모티브가 되는 곳이다. 캔모어와 가까이 있는 밴프에서 지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컸지만 밴프의 숙박비가 말도 안 되게 비싸기도 하고 캔모어에서 버스를 타고 밴프를 다녀올 수 있기 때문에 숙박비를 저렴하게 묵을 수도 있고 대중교통도 이용해 볼 수 있고 두 도시도 볼 수 있어 일석이조라고 생각했다. 어제 투어 할 때 봤던 풍경을 그대로 따라 캔모어에 도착했다. 이렇게 많은 짐이면 앨버타에 한 달은 머무냐는 그의 질문에 아주 짧게 캐나다를 일주하고 있다고 설명했더니 날씨가 따뜻해서 다행이라며 또 내게 러키걸이라는 말을 해주었다.


내가 이박삼일동안 지낼 캔모어호텔&호스텔은 캔모어에서 제일 오래된 호텔로 나름대로의 히스토리가 있는 곳이었다. 4시 체크인인데 도착을 10시에 하는 바람에 아주 난감하긴 했지만 나는 무료로 룸 업그레이드도 받고 얼리체크인도 할 수 있었다. 친절한 호스트 덕분에 오늘 나의 폰은 캔모어의 정보에 대한 알람으로 계속해서 알람이 떴고 나는 그때마다 감사인사를 하기 바빴다. 짐을 내려두고 마트에 가서 저녁거리 장을 본 뒤 곧장 카메라와 드로잉 북을 가지고 밖으로 향했다. 어제 봤던 풍경인데도 왠지 모를 이상한 기분이 온몸을 감쌌다. 아마 누군가와 함께였어서 내 감정에 충실하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 근처에 있는 기찻길 옆 트레일 코스를 따라 목적지 없이 걸었다.


그래도 꽤 많은 것들을 보면서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또 처음 마주하는 것들이 내 앞에 있었다. 두려움에 떨었던 날들도 복잡한 고민들 속에 파묻혔던 날들도 너무 기대되어 좋고 설레지만 표현하지 못했던 모든 지난날들을 뒤로하고 이곳을 마주했다는 생각에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여행을 하지 못했던 지난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캔버스를 채우는 날들 동안 겨울의 이곳을 상상하며 지내왔었는데 생각 보다 더 광대했고 더 위대했다. 알 수 없는 감정 위에서 내 시선을 드로잉 했다. 손이 너무 시리긴 했지만 이곳에서 만큼은 핸드폰에 찍혀있는 사진을 보고 그리고 싶지는 않았다. 교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는 했지만 아직 화가의 여행과 여행자의 그림의 차이점을 잘 알지는 못하겠지만 이 길 위에서 이렇게 내 시선을 담고 내 마음을 담으니 아무쪼록 드디어 몇 년 만의 내가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이 세상은 확실히 아직 내게는 너무도 컸다. 모르는 것 궁금한 것 두려운 것이 너무도 많은데도 괜찮다, 잘한다 말해야 하는 어른이 됐다는 게 너무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도미토리를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우리와 다른 인종들처럼 보이는 것 말고 보는 것을 중시하는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손에 알 수 없는 상처와 멍이 한가득이다. 건조한 한 겨울에 많은 짐을 가지고 다닐 때는 무조건 상처가 생긴다고 봐야 한다. 무언가에 집중을 하고 있을 때는 손에 상처가 생긴 줄도 모르지만 숙소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을 때쯤부터 따가움이 느껴지곤 한다. 아픔도 못 느낄 만큼 이곳에 집중했다. 나 아마도 이도시와 사랑에 빠진 것 같다. 몇 년 만에 나를 찾게 해 준 도시, 캔모어의 다른 계절을 위해 꼭 돌아와야겠다.

Jan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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