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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su Jun 27. 2024

11. 헤맨 밤들

istanbul, Turkey

그의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 코가 석자이긴 하지만 내가 다 긴장이 되고 있었다. 그의 앞날이 화창하길 바랐다. 독일의 한 멋진 성 앞에 드넓게 펼쳐져 있는 정원에 피크닉매트를 깔고 누워 책을 읽기 딱 좋은 날처럼 말이다. 그래서 오늘은 그 혼자 공부를 하게 냅 두기로 했다. 며칠 전 그와 처음으로 떨어져 하루를 지내기 위해 아이친을 만나러 가던 도중 지하철에서 말을 걸어오는 남자들 때문에도 전철 안에서 동냥을 하는 어린아이들 때문에라도 사실은 혼자 나다니는 게 겁이 나기는 했지만 사실 지금까지 너무 온실 속 화초처럼 이곳을 여행했기에 지금까지의 내 여행경력을 따져보면 사실 내게 여행지에서 혼자 나가는 일은 식은 죽을 먹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미술관에 함께 다녀온 지난날, 지루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의 그를 보고 현대미술관은 무조건 혼자 방문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비가 온다. 날도 춥고 바람도 불지만 날씨를 탓하며 집에서의 쉼을 택하기엔 이곳에서의 시간들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고 있기에 그냥 그렇게 하루를 보낼 수는 없었다. 비가 와서 어디를 가면 좋을까 하다가 이런 날은 실내를 가야지하며 현대미술관을 가기로 했다. 요 며칠 불똥 튄 강아지처럼 돌아다녔으니 차근차근 조용조용 작품들을 감상하며 내 작업에 대한 고찰을 할 시간을 가져야 함이 분명했다.


현대미술관에서는 세 개의 층으로 분류해 여러 종류의 작업들을 전시하고 있었고 루프탑에는 갈라타 타워를 볼 수 있는 멋진 뷰가 펼쳐져있었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 누군가의 영향을 받는 것을 선호하지 않아서 전시를 많이 관람하지 않았는데 대학원에 오면서 점점 더 전시관람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는 요즘이었다. 작업의 형태를 떠나서 디스플레이의 방식이나 재료의 다양성 같이 관객에게 나의 작업이 어떻게 보이냐도 아주 큰 작가의 난재임의 분명하기 때문이다. 공모전에 지원을 하더라도 전시기획서를 보는 경우도 태반인데 작업이 주는 감동을 배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작가의 재능임에 틀림없어서 많은 것들을 보고 익히고 알아가는 것도 나에게 하나의 숙제였다.


전시를 관람하고 전시장 일층에 있는 카페에서 책을 읽고 간단한 드로잉을 하기로 했다. 사실 그가 없었다면 나의 한 달 반은 온통 이렇게 채워졌을 텐데 오랜만에 마주하는 이 시간이 낯설기도 새롭기도 또 반갑기도 했다. 이스탄불에서는 생각보다 영어를 듣는 일이 쉽지 않았다. 영어가 만국 공통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사실 내가 혼자 있었다면 더 많이 들었겠지만 터키어를 할 줄 아는 사람과 함께 있어서 더 영어를 들을 일이 없었는데 카운터에 주문을 하기 위해 서서 큐알코드로 된 메뉴판을 사진을 찍고 보고 있는데 내 앞에서 영어가 들려왔다. 듣자 하니 입장티켓에 붙어있는 쿠폰으로 프리쿠키를 받을 수 있는 거 같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영어를 내뱉는 내가 낯설었지만 그녀에게 어떻게 하면 프리쿠키를 받을 수 있는지 물어봤고 쿠키를 받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여행지에서 혼자만의 시간은 아주 고요했다. 미술관에 안에 있는 일층에서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니 지나가는 이들이 나를 쳐다보긴 했지만 그 마저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날은 춥지만 포기할 수 없는 아이스아메리카노와 내가 좋아하는 바나나브레드를 시켰다. 빵은 푹신하고 맛있었으며 약간의 목 막힘을 해소해 주는 데에는 아이스아메리카노가 아주 적당했다. 책 속의 글도 그려지는 나의 그림도 너무 순조로웠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나의 매일이 이렇게 고요하고 포근했으면 했다. 지금 당장의 나는 아무 걱정 없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부잣집 딸내미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스스로를 속이는 것만큼 쉬운 거짓말을 없지만 말이다.


친구를 만나고 공부를 하고 나를 데리러 와준 그와 미술관 앞에서 만났다. 고작 반나절 만에 만나는 건데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는 그의 모습이 너무 완벽한 하루를 만들어주었다. 그냥 이렇게 시간이 터키에서 멈췄으면 했다. 그냥 아끼는 순간이 지나가는 것을 그 순간에 닿자마자 아쉬워하는 욕망 없는 그리움이었다. 불가능에 대한 안타까움 같은 것 말이다. 근처 식당에서 아주 유명한 생선케밥을 먹고 맥주를 한잔 한 뒤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길가를 걸으며 하는 실없는 농담들도 아잔 소리가 들리면 나도 모르게 따라 부르는 나의 이상한 소리들도 비와 함께 흐르고 있었다. 밤 공기가 차가워졌다. 나의 하루들은 이렇게 아쉽기만 한데 터키에 이제야 겨울이 슬며시 오고 있었다.

Jan 10


오히려 인생이 한쪽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것에 감사하기도 하다. 시간과 고난은 어떻게든 흘러가니까 말이다. 이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돌아가도 똑같이 살아간다고 수차례 말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금은 지루하지 않을까? 모든 연령대를 마주하자니 징그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어깨가 무겁고 앞이 캄캄하다. 언제부터 이렇게 여행지에서 설렘을 빼고 내 인생의 하루들을 아쉬워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지만 이곳에 와서 앞으로 더 큰 꿈을 꾸게 되니 앞이 캄캄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이는 점점 먹어가니 말이다.

어젯밤 그가 기타를 쳐주었다. 여러 번 연주해 주겠다고 말했는데 붕 갈로하우스를 빼면 이번이 처음이었다. 곡의 흐름의 언어도 이해를 못 했고 내 스타일도 아니었지만 내 눈치를 보며 기타를 치는 그의 모습에 흐뭇한 얼굴을 숨길수가 없었다. 집에 들어와 갑자기 복잡한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휘감았지만 결국엔 웃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단골 카페에 가서 평소처럼 나는 글을 읽고, 쓰고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고 그는 공부를 하기로 했다. 이런 시간들이 내게는 붐비는 사람들 틈에서 나의 길을 찾는 것처럼 중요하니 여행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시간을 가지며 나의 숨을 고르는 것도 분명히 중요했다.

얼마나 공부를 했을까 그의 절친한 친구가 왔고 그들은 함께 독일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들이었지만 그들의 반응과 제스처에 정답을 맞혔는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점점 허기의 자리가 커졌던 우리는 갑자기 서로에게 점심을 언제 먹었냐 묻기 시작했고 치킨라이스를 그들의 말을 무시한 채 우리는 코코레치를 먹으러 향했다.

익숙하지 않은 향과 언어들이 내 눈앞에 서성인다. 편하지 않는 어떤 것들은 나를 어딘가 불편한 의자에 앉힌 듯 계속해서 불안하게 만들고 자세를 바꾸게 만들지만 피하지 못한다면 즐기라는 말처럼 나는 그 속에서 내가 아끼고 좋아할 만한 것들을 찾았다. 그중에 하나가 코코레치였고 말이다.

내가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건 여행을 하고 깨달았는데 우리 엄마는 이런 사실을 두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차라리 다행이라고 했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이 세계 곳곳의 오지에 갔을 거라나. 아무튼 다시 코코레치 이야기로 돌아가 나는 그 바삭한 빵 안의 정체 모를 고기들도 양념들도 너무 사랑했다. 꼭 맥주와 먹어야 좋을 것 같은 이 핫샌드위치 같은 음식을 먹을 때마다 나는 맥주 생각에 뇌가 가득한데 요거트같은 음료와 같이 먹는 그들을 보면 신기할 뿐이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술을 먹은 사람들이 귀갓길에 이 음식을 포장해 간다는 것이었다. 대부분 나이 든 아저씨들이라는 옵션도 덧붙여져 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일본에서도 덮밥을 좋아하는 내게 테츠라는 일본인 친구가 덮밥은 회사 점심시간에 아저씨들이 먹는 음식 같은 거라고 했는데 그때부터 아무래도 내 취향은 달콤한 디저트 같은 건 아닐 거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해가 중천일 때 집에서 나섰는데 코코레치를 먹고 나니 어느새 밤이 쏟아지고 있었다. 길거리 사람들이 피워댄 담배 연기 속에서 겨울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우리에게 애초에 오늘에 대한 계획은 없었지만 우리는 그의 룸메이트와 함께 갑작스럽게 시티로 향했다.

이스탄불시티의 밤거리는 유럽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으로 생겨나는 건물의 그림자도 모스크를 비추는 조명들도 우리를 선뜻 집으로 가게 만들지는 않았다. 아니 우리가 아닌 나만이 느끼는 느낌일지도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우리는 그 밤에 그 불빛에 그 거리에 취하고 있었다.


바뀌지 않았으면 하는, 옛것들이 가득한 그 술집에서 우리는 라크를 마셨다. 아니스(미나리과)의 향이 가득한 터키의 증류주인 라크는 발칸반도에서 인기가 많은 주종인데 그는 내게 해산물과 치즈를 곁들여 먹어 내가 좋아할 거라고 했다. 투명해 보이는 라크는 물을 섞으면 우윳빛으로 색이 변하는데 그 마법 같은 매력에 나는 홀려버렸다. 이스탄불에 있는 라크를 파는 바에 들어가면 한국의 한상차림처럼 여러 종류의 안주들이 작은 플레이트에 나온다. 그중에 내가 먹을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지만 나를 위해 추가로 메뉴를 주문하기도 했고 우리는 그 오랜 옛것의 고풍스러움에 녹아들고 있었다. 먼지가 수북이 쌓여있는 돌벽 틈에 있는 액자조차 사랑스러웠다. 그 필름사진 안에 들어있는 얼마나 컸을지 모를 아이가 이 식당의 오랜 세월을 일깨워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간 이 식당도 이 아이도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았을까 하고 시끄러운 대화 속에서 문득 혼자 생각했다. 타지에서 이렇게 장기간 타국의 언어로 술을 먹고 대화를 하는 건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나의 언어를 못 알아들을 때면 벌게진 나의 얼굴에 나타나는 술기운을 탓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밤이 컴컴해진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래저래 감출 수 있는 게 많았으니까 말이다.


길거리에 목적지 없이 헤매는 어린아이들에게 눈길을 주면 안 된다는 그의 말을 명심하고 길을 걸었다. 음흉한 눈빛들의 사내도 금방이라도 말을 걸 것 같은 아이들도 내게는 두려움, 회피의 대상이었지만, 아무래도 오래된 것들을 고스란히 지키고자 하는 타지의 것들을 내 마음속에 고스란히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한동안 집에 돌아가지 않고 이 밤을 헤맸다.

Jan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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