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영 작가의 작업에 대한 비평문
아이의 탄생
아이들 소리가 들리는 골목. 바람 스치는 강둑. 물벌레 꿈틀대는 연못. 보랏빛으로 물든 노을. 하얗게 식은 연탄재. 곰팡이와 나프탈렌 냄새가 풍기는 다락방에서, 나는 태어났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존재들은 누군가와 같이 살게 된단다. 마음에 들건 들지 않건 말이야. 웃음소리가 무섭게 들릴 때를 아니? 등 뒤로 들리는 웃음소리, 아니면 저만치 앞에서 들리는 웃음소리 말이야. 그 웃음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닐 때도 나는 그랬단다. 나와 사는 존재들이 등을 돌리고 웃으면 혹시라도 나를 비웃는 게 아닐까 겁이 났어. 그들이 나만 두고 앞으로 뛰어나가면 외로움을 느꼈어.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느낄 수 있는 차가운 공기. 그 때문에 내 웃음 끝에는 한 방울의 눈물이 매달리게 되었어.
몸과 마음이 허약했던 나에게 세상은 늘 가혹했고, 나는 흙먼지 속에서 부서지고 깨지기를 반복했어. 수많은 조각으로 나뉘어졌지만, 깨트릴수록 많아지는 유리 조각처럼, 거품기로 지칠수록 공기를 끌어안는 크림처럼, 부서져도 여전히 넓은 바다처럼, 나는 부활했단다. 부서진 나의 단면에는 세상의 아름다움과 추악함이 비추어졌어. 나는 부서진 채 엄마가 되었다가, 아빠도 되었다가, 오빠와 동생이 되었어. 그게 싫증 나면 또 다른 나를 친구 삼아 놀았어. 그렇게 소꿉놀이를 하며 가족과 친구라는 세상을 비추어 보았어.
모래톱의 모양이 바뀌듯, 여럿이 된 나는 시간이 흘러 점차 흩어져 갔어. 그리고 가장 소심했던 나도 흙먼지 밖을 내다보게 되었지. 먼지 사이로 올려다본 하늘에는 그림자 없는 아이들. 태양에게 존재를 허락받지 않은 아이들이 비눗방울처럼 떠돌아다녔어. 먼저 나를 떠난 또 다른 나였어. 나는 나의 일부였던 아이들이 그리워졌어. 하지만 가위에 눌린 듯, 슬픔에 몸이 눌려 움직이지 않았어. 한 발짝도 떼지 못한 채 한참을 눈동자만 굴렸어. 그날 이후 내 눈 하나는 왼쪽, 다른 하나는 오른쪽을 바라보게 되었어.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슬픔에 지친 내 얼굴을 노을이 비추었어. 노을은 쓸쓸하고도 따스한 빛을 흘려보냈어. 빛의 온기 때문인지 몸이 녹기 시작했어. 바깥에서부터 안쪽까지, 몸의 구조를 바꾸어버릴 만한 커다란 변화였어. 두 팔과 몸통 사이의 살갗이 주욱 늘어나 날개를 닮은 모습이 된 거야. 휘저은 팔에는 하늘을 날 만큼의 바람이 담겼어. 천사처럼 고상한 날개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만족스러웠어. 나는 몸을 일으켜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로 날아올랐어.
공중에 떠오르자마자 나는 또 다른 내가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어. 탄생을 함께했기 때문인지 나는 수많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었어. 아이들도 꼭 같은 생각을 하는 듯 어떤 한 지점으로 날아갔어. 그렇게 아이들과 향한 곳에는 무척이나 큰 공허가 있었어. 우리는 공허 속을 물고기 떼처럼, 벌떼처럼 휘돌아다녔어. 그렇게 또 다른 나를 마주하며 수많은 나를 알게 되었어. 참으로 이상하게도, 이곳에서 만난 아이들은 어떤 짓을 해도 밉지 않았어. 아이들은 나를 때리고 울릴지언정 나를 혼자 두지 않았어.
어느 날 공허에 색이 머물고 어두움이 찾아왔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도록, 격렬함을 숨기기 위해 색이 제 몸을 감춘 듯했어. 아이들 간에 일어난 폭동과 전쟁으로 사방에 검은 피가 튀었어. 아이들은 순수한 악의로 못된 짓을 벌였고, 혼돈 속에서 나를 몇 번이나 죽였어. 그러나 장검에 머리가 잘려도, 꼬챙이가 허리를 관통해도, 살아있는 나머지 아이들의 힘 때문인지 나는 곧 되살아났어. 나는 수많은 나와 다투고, 싸우고, 죽이고, 사랑하며, 낳으며 공허를 채워나갔어.
그러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폭력의 굴레는 조금씩 변했어. 아이들의 감정이 조금씩 가라앉았기 때문인가 봐. 우주처럼 진공 상태였던 공허에 은은한 바람이 불었고, 산소를 머금은 아이들의 뺨에는 홍조가 올라왔어. 몸을 잃고 머리만 남은 아이들이 여전히 많았지만, 자신의 생존을 알리려는 듯 두 눈을 깜박였어. 아이들은 호기심에 저지르던 행동을 조심스럽게 바꾸었고, 아주 가끔, 포옹과 애도의 몸짓을 하기도 했어.
최근 이곳은 눈 내리는 아침처럼 차분해졌어. 무언가 사건이 일어나고 있지만 고요하게 느껴지는 공간처럼 말이야. 대기의 밀도는 높아졌고, 하늘 높이 떠돌던 아이들은 점차 고도를 낮췄어. 땅에는 나무가 단단히 심기고 그림자가 드리워졌어. 나무가 이룬 숲에서 아이들은 함께 만들고 꿈꾸었던 폐허를 찾아갔어. 구름이 떠 있는 높이에서는 모든 게 작아 보였어. 저 멀리 모여있는 아이들이 보였어. 나는 가장 너른 하늘을 한 바퀴 휘돌아, 아주 오랜만에, 나를 닮은 네가 다져놓은 땅 위에 내려앉을 수 있었어.
여자/아이
그녀는 한 초등학생 여자아이의 교과서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놀 사람이 없던 아이가 TV 속 주인공 캔디를 동경한 나머지 자기 교과서에 그녀의 모습을 연필로 따라 그린 것이다. 80년대 어린이들 사이에 선풍적 인기를 끌던 캔디의 이복 쌍둥이는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왔다.
알다시피, 교과서는 도덕이나 정치, 사회, 역사를 위한 책이다. 유수의 학자들이 연구에 연구를 거쳐, 에센스의 에센스만 쥐어짠 이야기를 믿음직한 활자체로 박아 넣은 책이 교과서다. 그러나 한 여자아이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그녀는 애니메이션의 본래 줄거리와도 무관할뿐더러, 모두가 귀 기울일만한 중대한 이야기도 없었다. 흑백 사진 속 위인들과는 달리, 연필로 그려진 그녀는 조그마한 지우개는 물론이거니와 아이의 손에 난 땀에도 뭉개질 것만 같았다.
낙서에 불과한 그녀의 존재는 태생부터 불안정했다. 하지만 여자아이의 소망 때문이었을까. 자신이 처한 악조건과 반대로 그녀는 너무나도 대범했고, 아이가 감히 하지 못하는 일을 종이 위에서 척척 해치웠다. 연필 선 몇 가닥으로 이루어진 그녀는 어디든 갈 수 있었다. 교과서의 활자를 징검돌 삼아 뛰어갔으며,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에서 미끄럼을 타고, 자신을 좀체 포용하지 않는 교과서를 비웃기라도 하듯 콧수염 난 남자의 얼굴 옆에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지루해질 때면 아이를 통해 줄 공책, 갱지 연습장, A3 스케치북으로 또 다른 쌍둥이들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나도 많은 그녀를 보고 어른들은 매우 놀랐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그는 그녀가 그려진 책이란 책을 모조리 쌓아 놓은 뒤 아낌없이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태우면 영영 사라지리라. 불태워서 그림 같은 건 꿈에도 꾸지 못하게 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몰랐다. 진짜 마녀는 불에 타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자아이는 그녀의 부재에 충격을 받았고, 그림을 그릴 종이쪽이 사라져 한동안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참을성이 아주 많았고, 눈치 보지 않고 그림을 그릴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 아이는 어른이 되었고, 그리는 재능을 살려 화가가 되었다.
이후 그녀는 반짝이는 큰 눈에 금발 머리를 하고 화가의 그림에 등장했다. 이복 쌍둥이 캔디 혹은 다른 여자아이들의 모습을 한 채였다. 그녀는 온 동네 아이들 머릿속에 수동적 소녀상을 주입한 '나쁜 년'-캔디가 되었다가, 캔디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여자아이 자신이 되었으며, 이름도 출신도 없는 소녀가 되기도 했다. 그녀들의 겉모습은 다양했으나 얼굴에는 슬픔이 맺혀있었다. 하지만 그림 속 수많은 존재가 모든 구멍에서 체액을 흘리는 판국에는 눈물 또한 몸에서 흘러나온 한 종류의 액체일 뿐이었다. 눈물과는 반대로 올라간 입꼬리에는 세상에 날리는 비웃음과 사랑받기 위해 짓는 억지웃음이 번갈아 나타났다. 울면서 웃는 얼굴은 사람들이 기대한 소녀와 달랐기에 어떤 이들은 불편함과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녀는 성적으로 과감해서 사람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엉덩이를 불쑥 내밀거나, 두 다리를 벌리는 것은 일상이었다. 사람들이 얼버무려 미화하는 여성과 달리, 그녀의 음부는 갈라졌으며 까맣게 음모가 났고 체액을 흘렸다. 엉뚱하게도, 애니메이션에서 장면 미화에 쓰였을 장미꽃은 그녀의 국부에 피어나 겹겹의 속살을 드러냈다.
그러나 표현의 과감함과 다르게 그녀의 몸통은 인형처럼 딱딱했고 손발은 잘려 있었다. 어깨는 아름다웠지만 누군가를 안아 들 팔이 없었고, 가슴은 비어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쾌락과 고통을 오가며 몸을 뒤틀어야만 했다. 그녀는 폭력의 굴레에서 미처 태어나지 못한 이들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그 애달픈 마음을 물풍선에 가득 담아 젖가슴처럼 가슴께에 드리웠다. 조금 우스워 보일지라도, 배고픈 누군가가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이곳에도 시간이 흐른다는 점을 독자는 알고 있을 것이다. 감정의 폭풍이 잔잔해지는 날이 늘었고, 그녀는 이전처럼 자신을 자주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와 그녀의 성을 은유하던 장미만이 너른 풍경화 속 덤불로, 혹은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는 꽃으로 나올 뿐이었다. 정물화에서도 장미는 차분한 빛깔을 띤 채 단단한 화병에 담겨 있었다. 그럼에도, 장미는 웃으면서 울었던 때와같이 아름다운 줄기에 가시 세우는 일을 잊지 않았다. 화가는 오랫동안 마주해온 화폭이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었음을, 자신이 그녀였음을 알았다.
만지기-만들기-만나기
순영 씨는 화가다. 하지만 순영 씨는 만드는 사람이기도 하다. 내가 순영 씨를 그렇게 본 이유는 단지 스컬피를 만들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림 속 세계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라서도 아니다. 그녀가 작업을 통해 존재들을 태어나게 하기 때문이라 표현하면 더 맞는 이야기일까? 내가 '태어나게 한다'고 말한 이유는 이들의 근원이 바로 그녀의 머릿속일뿐더러, 그녀에게는 이 모든 이야기와 존재가 진짜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나는 그녀의 작품을 묘사할 때 '만든다'를 '조작하다'나 '없는 것을 지어낸다'는 뜻으로 쓰지 않고,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을, 재료를 변화시켜 현실화한다'는 의미로 쓰고 있다. 되새겨 보아야 할 또 다른 면은 그녀가 바탕재의 전처리부터 액자 제작까지 거의 모든 공정을 수작업으로 한다는 점이다. 타인의 손을 빌리거나 기계를 쓰는 일 또한 당연히 '만들기'이고, 작가의 수작업이 반드시 작업의 예술적 가치를 보장하지는 않지만, 나는 순영 씨의 작업에서 손으로 직접 만드는 행위가 작업의 내용과 연결되어 있으며 중요한 의미를 만들어 낸다고 본다.
'만지기-만들기-만나기'. 세 가지 연동된 행위로 그녀의 작업을 살펴보면 좋겠다. 먼저 '만지기'는 만지는 사람의 입장이 담긴 능동적 행위다. 만지는 행위를 떠올리면 누군가가 목표물을 향해 팔을 내미는 모습이 연상되기도 한다. 나는 순영 씨의 만지는 행위에 상대를 만나려는 감정이 담겨 있다고 본다. 그녀는 버려진 물건을 줍거나, 생활용품점의 저렴한 물건들을 구입하여 재료를 모은다. 그리고 집으로 데려온 재료를 자신이 생각하기에 조형적으로, 감성적으로 가장 적절한 자리에 배치하고 결합한다. 남루한 쓰레기는 누군가와 잠시나마 함께했던 물건이고, 저렴한 상품은 일꾼들이 적은 대가를 받고 힘들게 노동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자신의 물건 사이에 남의 물건을 데려오는 일. 그녀는 이를 타인과 만나는 자신만의 방법이라 말한다. '만난다'는 그녀의 표현인데, 그녀와 대상의 접촉을 표현하기에 어울리는 말이다. 왜냐하면 '만나기'에는 두 가지 이상의 살아있는 존재가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를 마주한다는 뉘앙스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볼 때 순영 씨는 물건을 물건의 주인을 떠올리는 매개체로 삼을 뿐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로 대하는 것 같다. 이런 상상력이라면 더 나아가, 데려온 물건과 기존의 물건이 서로를 만난다고 상상해 볼 수도 있겠다.
한편, '만지기'는 '만들기'의 시작뿐 아니라 과정에서도 일어난다. 만짐으로써 재료를 완성이라 믿는 상태로 바꾸는 행위가 '만들기'다. 순영 씨는 손의 체온으로 스컬피를 녹이고 반죽하며 형태를 만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재료에 손의 지문이 남게 된다. 구운 뒤 사포로 밀어 완전무결한 형태를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만남의 흔적을 지우지 않는다. 형태가 적당해졌다고 느끼면 스컬피를 오븐에 굽고, 밑칠을 하고, 색을 칠한 다음 표면을 다시금 사포로 밀어 물감층을 벗긴다. 물감이 벗겨져 드러난 스컬피는 공교롭게도 인간의 삶과 닮은 색을 띤다. 까이고 긁힌 상처. 남아있는 손자국. 이 때문에 딱딱하게 구워져 움직이지 않을 사물에는 인간적인 속성과 함께 기이한 생동감이 부여된다.
순영 씨는 자신이 그린 아이들을 만져보고 싶어 스컬피를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몇몇 스컬피들은 다시 그림 속에 등장하기도 한다. 스컬피건 그림이건, 그녀는 자신에게 지극한 현실을 우리의 몸이 자리한 곳에 소환하는 것이다. 그녀에게 그림 속 세계와 그림 밖 세계는 모두 지극한 현실로 이어져 있다. 그 때문에 그림에는 또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기도 하고, 그림 속 존재는 그림 밖을 향해 팔다리를 뻗기도 한다. 두 세계가 나뉘어 있지 않다는 점은 줍거나 구입한 물건을 작업에 적용하는 방식에도 반영된다. 작가가 그림에 붙인 오브제들은 그림이 환영임을 증명하고자, 그림 속 세계와 그림 밖 세계를 구분하고자 붙인 물건이 아니다. 그녀의 작업에서 그림 표면을 장식한 레이스는 그림 속 레이스와 닮았다. 무늬 박힌 천과 구슬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그림 밖과 그림 안의 세계를 연결해 준다.
촉각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만지기-만들기-만나기'라는 행위는 순영 씨가 작업을 만드는 과정에서 일어날 뿐 아니라 내가 작업을 감상할 때도 상상하게 되는 행위다. 그녀의 그림은 촉각을 여러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환기한다. 터져 나온 내장과 늘어진 가슴, 신체가 잘리거나 찔리는 모습은 반복하여 등장하는 모티프다. 자주 등장하는 성적인 표현도 촉각을 자극한다. 하지만 최근 그녀의 작업에는 통각보다는 '품다', '안다', '돌보다'와 같이 정서적 유대감을 바탕으로 한 촉각적 행위들이 등장하고 있다. 작업의 내용뿐 아니라 형식 또한 변화해 왔는데, 과거 작가는 사물의 형태를 연필 선이나 먹선으로 묘사해 재질감을 나타내곤 했지만, 최근에는 붓질을 최소화하거나 물감을 여러 번 겹쳐 손에 잡힐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일례로 최근의 정물화에서는 꽃잎의 가벼움, 고래의 미끈함, 도자기의 단단함과 매끄러움이 느껴진다. 이 같은 변화는 그림자가 등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대상의 물리적 속성을 묘사함으로써 작품에 현실감을 부여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끝으로 그녀의 종이가 전하는 감각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순영 씨는 종이를 고를 때도 일부러 가장 저렴한 한지를 고르고 쓸만한 종이로 만들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순영 씨의 태도에는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물들에 대한 관심이 담겨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한지는 푸석하며, 때로는 물감이 먹어 들어가 흐리멍덩하고 남루해 보이는 재료다. 그러나 그녀는 한지를 반수하고, 붓질을 가감함으로써 물감이 쌓이고 스며드는 정도를 조절한다. 여러 차례의 손길을 거친 한지에는 맨 종이에는 없던 표면 질감이 생긴다. 전과 비교해 최근 몇 년 간의 작업에서는 그림의 질감 변화가 느껴지는데, 그녀는 종이를 붓으로 경쾌하게 훑는 대신 여러 색을 공들여 겹쳤고, 물감은 맑게 남는 대신 종이 깊숙이 스몄다. 이러한 변화는 그녀가 남겨둔 그림 외곽의 흰 부분을 보며 느낄 수 있다. 물감 층의 축적이 드라마틱하기 어려운 한지와 수채 물감을 다루지만, 아교 반수만을 거친 종이와 병치함으로써 물감의 겹침을 드러내는 것이다. 끝으로 그녀가 작은 종이에 그리는 이유도 있지 않을까. 작은 종이에 그려진 넓은 공간에서 미미한 존재들은 더욱 작아 보이고, 때문에 이들의 외로움과 소망은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공교롭게도 그녀의 작은 그림은 대체로 가슴에 안길 만한 크기다. 게다가 그림들은 나무 조각이나 천 조각으로 감싸여 있다. 어쩌면 그녀는 그림 자체를 보살피고 돌보아야 하는 아이처럼 대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순영 씨를 머릿속에 떠올릴 때 작은 그림을 가슴에 품고 길을 걷는 사람을 상상하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테다.
작품 밖에서
'아이의 탄생'과 '여자/아이'는 가짜이면서 진짜인 이야기입니다. 두 이야기에는 화가이자 생활인인 권순영의 개인사가 반영되어 있지만, 필자의 상상과 개인사가 투영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를 보고 작가의 전기를 작성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두 글은 작품과 작품에 등장하는 존재들의 이야기에 더욱 가까우니까요. 한편, '만지기-만들기-만나기'는 세 가지 행위를 구실로 작품을 분석한 글입니다. 관점과 어투가 딱딱하기에 달라 보일 수 있지만, '만짐이 허락되지 않은 작품의 표면을 만진다.', '그림 속 공간에 손을 넣어 존재들을 만진다'고 생각하며 썼으므로, 이 글에서도 감각과 상상은 작동합니다. 저는 세 글이 작가의 작품을 닮기를 원했습니다. 일견 판타지처럼 보이는 권순영 작가의 작품이 현실이듯, 동화처럼 보이는 이 글도 일말의 진실을 담기를 바랍니다.
이 글은 권순영 작가를 위해 쓰인 비평문입니다. 이 글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습니다. 인용 시에는 출처 표기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