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자식의 우주'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인데, 안타깝게도 나의 우주는 광활하고 아름답지 않았다.
장녀로 태어났지만 부모님과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나는 편이다. 엄마는 철없던 20대 초반, 7살 차이 나는 아빠를 만나 10년 뒤에 힘겹게 나를 낳았다. 4년 뒤엔 '동생이 생겼으면 좋겠다'라고 떼를 쓰던 나를위해 쌍둥이 동생들을 제왕절개로 출산했다. 그들은 어렵게 가진 우리 셋을 애지중지 키웠다. 그런데 서로의 역할이 분명하게 달랐다. 아빠는 경제적인 지원을, 엄마는 그 외 모든 일을 담당했다. 고된 노동을 끝내고 온 그는 씻고 나오면 늘 거실에 누워있었다. 담배를 피우러 나가거나 화장실, 식사할 때를 빼고는 리모컨을 쥐고 TV 채널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마냥 그곳을 벗어나지 않았다. 집에서 해야 할 모든 일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자식과 남편의 삼시 세끼를 차리고 치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녀의 끼니는 늘 뒷전이었다. 요즘도 "엄마, 음식 식기 전에 앉아서 같이 먹자"는 우리의 제안에 "나는 나중에 먹어도 되니까 너희 먼저 먹어"라는 답이 돌아오곤 한다. 설거지를 끝내면 청소와 빨래를 한다. 물론 엄마는 전업주부였기에 가사노동을 담당하는 게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육아 또한 그녀만의 일이었다는 점이다.
우리 셋을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놀아주고 재운 사람은 늘 엄마였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초등학교를 등원시키고 나서야 그녀는 잠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우리가 집에 돌아와 그날 친구들과 있었던 이야기를 재잘거리면 식사를 준비하거나 청소를 하며 들어주곤 했다. 훈육 또한 마찬가지였다. 동생과 놀다가 싸우거나 울음을 터뜨리면 따끔하게 혼을 내거나 달래주었다. 나와 동생들은 예의와 상식 모두 대부분 그녀를 통해 배우며 자랐다.
아무리 자주 생각해 봐도 아빠와 놀았던 기억이 다섯 손가락 이상 떠오르지 않는다.당연히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던 경험도 있을 리 만무했다. 놀이동산에서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목마를 태워주거나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상황을 늘 꿈꿔왔지만 현실화된 적은 없었다. 오히려 우리 가족은 여행을 가는 족족 다퉜다. 차 안에서 설레는 마음에 동생과 떠들기라도 하면 아빠는 운전에 방해가 된다며 조용히 하라고 화를 냈다. 오랜만에 외식을 하러 나갈 땐 식당에서 조금이라도 기분 나쁜 상황이 생기면 직원이 아닌 우리에게 온갖 불평을 쏟아냈다. 덕분에 나는 가족여행이라면 치를 떨었고 아빠와 외출할 일이 생길 때마다 늘 기가 죽어 있었다. 이런 유년기를 보내면서 자연스레 그와 멀어지고 엄마랑 더 가까워졌다. 나는 "다녀오세요", "다녀오셨어요", "안녕히 주무세요" 같은 형식상의 말만 그에게 전했다.
아빠를 이해할 수 없었던 또 다른 부분은 엄마를 대하는 태도였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는 반려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신입 부하 직원 대하듯 그녀를 대했다. 아빠는 직접 물을 떠 오는 대신 항상 엄마를 시켰다. 엄마도 이를 당연하게 여기듯 물이 담긴 컵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옛날 아침 드라마를 보면 남편이 출근 준비를 할 때 아내가 넥타이를 매 주거나 입을 옷을 챙겨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우리 집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빠는 일어난 순간부터 회사에 가기 전까지 대부분의 준비 과정을 엄마에게 맡겼다. 혹여나 빠뜨린 게 있으면 호통을 쳤다. "양말 어디 있어!", "빨래 좀 미리 해놓지!" 그가 직장생활을 얼마나 완벽하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엄마의 업무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
자라면서 그들이 어떻게 연애란 걸 하고 결혼해 가정을 이루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는 부모가 스킨십은커녕, 다정한 말 한마디조차 나누는 장면조차 목도하지 못했다. 대화의 목적은 당장 원하는 욕구를 말하면 들어주는 게 주였다. 서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들기보단 상대에게 상처가 되는 말들을 마구 던지는 횟수가 더 많았다.
서로 고맙고 미안한 일을 겉으로 표현하는 데 굉장히 인색해했던 만큼, 상처를 치유하고 화해하는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한바탕 난리를 치면 최소 이틀간 대화가 단절됐다. 거실에선 TV 소리가, 부엌에선 물소리와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불편한 공기를 메웠다. 그때마다 나와 동생들은 눈치를 보았고 각자 방 안에 틀어박혀 엄마, 아빠의 화가 풀리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이러한 환경은 곧 자식인 우리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어린아이들이 대개 그렇듯 서로 잘 노다가도 사소한 일로 매일 싸움이 벌어졌는데, 몇 시간 뒤 화가 풀렸더라도 누구 하나 먼저 사과를 하지 않았다. '이러이러해서 미안해'라는 말 대신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거나 함께 노는 방식을 택했다. 이런 식으로 다툼을 회피하다 보면 곧 문제가 생긴다. 오해하거나 서운한 점을 대화로 충분히 풀지 않으면 다음 갈등이 일어날 때 더 큰 감정을 소모할 수 있다. 뒤에서 풀겠지만, 첫 연애 때 나의 갈등 회피 성향으로 나도, 그도 많은 고생을 했다.
'주양육자'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거부감이 든다. 외벌이일 경우 경제적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 집안일을 주로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은 부모 모두가 분담하여 책임져야 한다. 가부장 시대에서 자란 남자들은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돈을 벌어오는 것'으로 한정하는 경향이 굉장히 많은데, 이렇게 되면 아이들은 친부와 정서적인 유대감을 형성하지 못하고 물리적 거리 또한 멀어진다. 가부장제를 끊어내지 못하면 대물림되고 이는 결국 출산율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 시절엔 몰랐지만 지금은 얼마나 성차별적인 제도인지 알아버렸으니까.
요즘 여동생이 옛날 시트콤에 빠져 있다. 어느 날 '순풍 산부인과' 영상을 유튜브로 내게 보여준 적이 있는데 그곳엔 앞서 언급한 상황 외에도 다양한 가부장제 예시가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남편이 아내에게 호통을 치면 그저 웃긴 상황에 불과하듯 방청객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부엌과 거실 신이 나올 때면 늘 의자에 먼저 앉아 있는 사람은 남편이었다. 박미선 배우는 설거지를 하거나 과일을 내오며 가족과 대화를 나누었다. 또한 대략 20년 전의 대가족 형태를 보여주듯 시부모가 함께 살았다. 그 시절엔 그런 풍경이 너무나 익숙했기에(우리 엄마도 치매가 오신 할머니를 돌아가시기 전까지 홀로 돌봤다) 아빠가 가족을 대하는 모습은 불편했지만 사회 문제라고까지는 인식하지 못했다. 우리 가족처럼 험악한 분위기는 아니니 오히려 화목한 가족이라며 부러워했던 것 같다.
가부장제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명절'이다. 다행히 내가 성인이 될 즈음부터 '전'같이 요리하기 힘든 음식은 시판용을 구매하여 제사상에 올리고 있지만 그전까진 매년 엄마가 손수 장을 봐와 전을 부치고 나물을 무치고 과일을 깎았다. 나와 여동생은 엄마 옆에서 조금씩 거들곤 했다. 하지만 절을 할 때 앞에 나와 있는 사람은 아빠와 남동생이었다. 우리 셋은 늘 뒤에 서 있었다. 동명의 작품, '명절 편'을 보면 웃픈 기분이 든다. 미달이 아빠와 시아버지가 추석상을 준비하는 아내와 시어머니 앞에서 대놓고 음식을 주워 먹다가 혼쭐이 났다. 시어머니는 '이번에는 남자들이 음식을 준비해 보라'며 화를 내는데, 이에 그들은 큰소리치며 요리를 시작한다. 하지만 미숙한 경험으로 엉망진창인 상황이 되자 여자들 몰래 음식들을 사 오는데, 결국 허무하게 들키고 만다. 여자 셋은 미처 끝내지 못한 추석상 음식을 마무리하는 동안 남자 셋은 쭈뼛거리며 그들을 바라본다. 시아버지역 오지명 배우가 시어머니역 선우용녀 배우에게 머쓱한 표정으로 한 마디 하며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용녀, 무지하게 존경해."
이제는 안다. 고작 그 한 마디 칭찬으로 용녀처럼 피식 웃어넘겨버리면 안 되는 일이란 걸. 알아주고 고마워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그들도 '공동양육자'로서 자녀를 돌보아야 하고 가사노동에 참여해야만 한다. 물론 '순풍 산부인과'같은 분위기가 사라지고 있는 추세라는 걸 알고 있다. 맞벌이 부부가 증가하고 남편도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며 명절엔 며느리가 차례상을 차리는 대신 온 가족이 해외여행을 떠난다. 이렇게 뚜렷한 가부장제는 사라졌지만 애매한 가부장제는 찝찝하게 우리 주변을 계속 맴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