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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놀쓴 Aug 01. 2024

또 나만 남았다.

  내가 다녔던 복싱 체육관은 대학교 근처여서 대학생들이 많았다. 그리고 여느 다른 체육관들처럼 남자 회원들이 대부분이었다. 여자는 많아봤자 20프로 정도였던 것 같다. 그 체육관을 한 9년 정도 다녔다. 그 시간 동안 수많은 여자 회원들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보았다. 특히 봄 즈음에 여대생들이 신규 등록하러 가장 많이 왔다. 여름이 오기 전에 다이어트 목적으로 오는 것이리라. 그렇게 살 빼러 오는 여학생들의 대부분은 길어야 두세 달하고 그만둔다. 살 빼는 게 목적이 아닌 진짜 복싱을 배우고 싶어서 오는 여자들도 간간이 있었다. 이 경우는 대부분 4~6개월 정도 하는 것 같다.


  즉, 내가 보아온 체육관 여자 회원들 대다수는 6개월 안에 그만두었다. 3개월 안에 그만두는 사람이 가장 많고. 6개월 안에는 거의 다 그만두고, 아주 가~끔 1년 넘게 하는 사람도 있는데, 1년을 넘긴 사람은 대부분 좀 더 오래 하는 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체육관에서 나는 단연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여자가 별로 없는데 그것도 유일하게 샌드백을 맛깔나게 잘 치는 여자니까 눈에 띌 수밖에. (사실 은근히 그 시선을 즐기는 관종이었음을 고백해야겠다.) 그러하니 나는 체육관 여자 회원들 사이에서 '멋있는 언니'가 되었다. 귀여운 대학생들이 와서 '언니 어떻게 그렇게 잘해요?', '언니 나중에 제가 실력이 늘면 저랑 스파링 해주세요.', '언니 이거 이렇게 하는 거 맞아요?', '언니 너무 멋있어요!'를 자주 들었다. 그럴 때마다 시크하면서도 인자한 미소로 '네~그래요~고마워요^^' 이렇게 화답해 주었다.


  그리고 몇 달 있으면 한두 명씩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열심히 해서 나랑 스파링 하겠다더니...ㅠㅠ) 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와서 똑같이 '언니 너무 멋있어요!'를 시연하고 또 어느 순간 사라지고 이런 게 계속 반복이었다. 그중에 유일하게 오래 하는 동생 한 명이 있었는데, 지방으로 취업하게 되면서 체육관을 그만두었다. 그즈음 여자 회원들 대부분이 그만두고, 신규가 한동안 안 들어오면서 여자 회원이 거의 없었다. 운동하러 가면 체육관에 여자가 나 혼자 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또 얼마 안 있다 금세 또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왔다.


  새로운 사람들이 끊임없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9년 동안 나만 그 자리에 그렇게 오랫동안 있었다.




  회사 근처로 이사를 오고 난 이후로는 퇴근 후에는 매일 피아노 학원에 간다. 골목에 있는 아이들이 다니는 작은 동네 피아노 학원인데, 저녁 시간대는 대부분 취미로 피아노를 배우는 성인들이 왔다. 학원생들이 거의 다 초등학생들이니 대부분은 늦어도 저녁 8시 전에는 다들 마치고 집에 간다. 저녁시간대는 성인들이 피아노 치는 시간이다. 여기 처음 다닐 때부터 저녁시간대에 오는 성인들이 몇 명 있었다. 나처럼 매일 오진 않더라도 주 1~2회 정도씩은 오는 분들이었다.


  저녁 8시가 넘어가면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는 사라지고, 성인들이 각자 피아노 연습하는 소리만 들렸다. 나처럼 버벅거리면서 피아노 연습하는 소리를 벽 너머로 들으며 동질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나만 못하는 게 아니라는 건 꽤 큰 위안이 된다.) 한 번은 20대 후반~30대 초반 정도 보이는 남자분 한 분이 밤늦게 학원에 오신 적이 있었다. 각방에 피아노가 총 6대 있는 작은 학원이다 보니 복도에서 선생님과 얘기하는 게 다 들린다. 그분은 근처 사는데 일 마치고 취미로 피아노를 배워보고 싶다며 오셨다고 했다.


  어렸을 때 피아노를 오래 쳤던 사람이 아니라면, 성인이 피아노 배워보고 싶은 이유야 비슷비슷한 것 같다. 그 이후로 저녁에 주 2회 정도씩 나와서 그분은 바이엘을 치고 계셨다. 아마 성인이 돼서 피아노를 처음 배우시는 것이리라. 한동안 아이들이 없는 조용한 피아노 학원에서 그분의 바이엘 치는 소리와 내가 연습하는 피아노 소리가 뒤엉켜 들렸다. 그때 예감이 들었다. 저분 몇 달 못 하고 나갈 것 같다고.


  역시 내 예감 짬밥은 무시 못 한다. 한 3개월 정도 나오시더니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으신다. 그럴 수밖에 없다. 다 큰 성인이 초등학생들이 치는 바이엘을 치고 있다는 건 영 폼도 안 나고 재미도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일 끝나고 피곤한 상태로 와서 밤에 연습해야 한다면 더더욱 하기 힘들다.


  저녁에 가끔 나오셔서 늘 뉴에이지 연주곡을 치시는 여자분도 한 분 계셨는데, 어느 날인가부터 보이지 않으셨다. 대학생처럼 보이는 20대 여자분도 한 1년 다닌 것 같은데 지금 두세 달째 보이질 않는다. 저녁 9시 전후로 선생님까지 퇴근하고 나시고 나면, 이젠 텅 빈 학원에 내가 치는 피아노 소리만 울려 퍼진다.


  어느 날 정신 차리고 보니, 저녁에 늘 나 혼자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처음엔 좋았다. 소리에 예민한 나는 옆방에서 들리는 다른 피아노 소리 없이 내 피아노 소리에만 집중해서 연습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내 피아노 소리가 끊기는 순간, 무거운 적막감이 확 덮쳐온다.


아, 또 나만 남았네.




  이럴 땐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 "역시 이렇게 꾸준히 오랫동안 하는 나는 정말 대단해!" 하면서 으쓱해진다. 그러다가 어느 날에는 "꾸준히 하기만 하면 뭐 해? 특출 나게 잘하는 것도 아니고. 너는 그냥 조금 꾸준히 한다는 것 말고는 잘하는 것도 없잖아." 하면서 의기소침해진다.


  그러다가도 또 "꾸준히 하는 게 어디야? 봐봐 다들 저렇게 몇 달하고 그만두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이렇게 몇 년씩하고 있잖아!" 그럼 또 다른 자아가 "그렇게 몇 년씩 할 정도로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거야? 다른 사람들이 그만둔 시간에도 했으니까 뭐 대단한 거라도 성취했어? 차라리 그만두고 그냥 푹 쉬는 게 낫겠다." 하고 반격한다.


  텅 빈 피아노 학원에서 밤 10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 내 감정 두 개가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쓸쓸하기도 하고 평화롭기도 한 시간이다. 나는 혼자 무얼 하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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