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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의 축구 Jun 28. 2015

월드컵, 이란, 특별한 경험

이란 테헤란, 아자디 경기장


Seoul


"저기 저 이정표 보이세요?"


장시간 비행에 따른 '몸붕'으로 버스 의자에 파묻혔던 나는 가이드의 말에 처음으로 커튼을 젖혔다. 길가에 그 흔한 네모 건물조차 보이지 않는 휑한 풍경은 '뭘 기대해? 여기 이란이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래도 나는 이왕 커튼을 연 김에 조금 더 살펴보자는 생각에 두리번 댔고, 스쳐 지나가듯 이정표에 적힌 낯익은 영단어 'Se’oul'을 발견했다. 외국인이 쎄올(또는 쎄울)로 발음하든 말든 나에게 그것은 자랑스러운 서울이었고, 반드시 서울이어야 했다. 가이드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는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안다는듯 말했다.


"맞아요, 그 서울"



이정표를 따라가면 '서울로(路, Road)'에 닿는다는 말, 두 나라에 서로의 수도명을 딴 도로(한국에는 '테헤란로'가 있다)가 수교 과정에서 생겼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출국 전 까다로운 비자 발급에 대한 짜증으로 시작해 테러 위협에 대한 불안 등 온갖 불쾌한 감정들이 내 몸을 감쌌는데, '서울'이라는 단어 하나에 어쩌면 이 나라가 나와 잘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결 홀가분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이란 참 단순한 동물이다.



월드컵 최종예선, 아자디 스타디움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란과 나의 '허니문'은 3일째 끝났다. 십만 관중을 수용하는 테헤란의 아자디 스타디움 입구에 도착했을 땐, 테러와는 전혀 다른 색깔의 공포가 엄습했다. (주: 사실 알고보면 이란은 테러와 거리가 먼 평화로운 나라다)


길거리에서 종종 마주했던 곱디고운 여성들은 코빼기도 안 보였고, 수천 명의 남성만이 우리 일행을 반겼다. 물론 얼굴에 1g의 미소도 띠지 않은 채로.

몇몇은 버스로 다가와 자국 언어로 욕을 하는 것 같았고, 또 다른 무리는 우렁찬 야유를 쏟아냈다. '서울로'의 그 '서울'에서 왔다고 해도 손님으로 대접할 생각은 없는 게 분명했다.


그들은 잠시 후 벌어지는 한국과 이란의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한국이 지는 데만 관심이 있는 듯 보였다. 그리고는 우리가 서울로를 신나게 밟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시나리오를 그렸을테지...


환영받지 못한 이방인, 다른 말로 불청객은 그들에게 최고의 먹잇감이었을 거다. 얼른 커튼을 닫았다. 다신 열지 않으리, 이 커튼.


경기장 안으로 들어와 보니 한국 대표팀 선수단이 느낄 압박감은 훨씬 더 클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원정팀을 향해 외치는 '오빠', '화이팅', '대~한민국' 같은 친숙한 응원들이 경기장을 가득 채운 8만 여 이란 장성들의 요란한 합창에 철저히 묻혔기 때문이다. 나는 어서 빨리 리얼 테헤란이 아닌 서울 테헤란로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양파껍질 같은 이란


모두가 아는 대로 2012년 10월 열린 이 경기에서 한국은 이란 네쿠남의 결승골에 0-1 석패했다.


기자회견장으로 가는길에 몇몇 음료수병이 날아왔다. 그래도 승리자의 관용인지 뭔지, 그 숫자는 예상보다 적었다. 한 손으로 '1', 다른 한 손으로 '0'을 만들어 승리를 재차 강조하는 수십 명의 이란 팬들은 경기 전 인상을 찌푸렸던 그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꼭 어린아이처럼 '우리가 이겼지롱', '약오르지롱'이라고 외치는 듯한 표정이었다.


월드컵 최종예선 이란 vs 한국 - 네쿠남 결승골


아자디 스타디움의 음침한 분위기, 수만 관중, 몇몇 팬들의 야유 때문에 알게 모르게 나는 그 짧은시간 동안 이란 전체에 대한 편견을 가졌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이란에 도착해서 경기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기까지 나는 한 번도 테러에 대한 위협이라든지, 차별이라든지, 감정을 상하게 하는 공격을 받은 적 없었다. 축구장에서의 '따가운' 열기야 원정팀을 응원하는 입장에선 충분히 겪을 수 있는 범주의 문화고.


직접 보고 들은 이란은 출산율이 낮아 이웃의 갓난아이만 봐도 환한 웃음을 짓고, 대다수 여성의 미모가 눈부시게 아름다우며, 원한다면 스키를 즐길 만한 환경도 갖춘, 벗겨도 벗겨도 계속 이야깃거리가 나오는 양파껍질 같은 나라였다.


일정 중 우연히 들른 음식점의 친절했던 직원들


행복의 기억이 공포의 기억을 묻어버린 지금은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길부터 경기를 마치고 나오는 길까지 흘렸던 그 많은 양의 땀조차 그립다. 살면서 언제 그런 경험을 해보겠는가?


비자 발급이 까다로운 이란은 여전히 휴가지로 인기 꽝이지만, 만약 전혀 새로운 여행지를 원한다면 이란은 당신에게 대단히 큰 만족감을 줄 것이다. 적어도 축구 기자인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그렇다.



글·사진 - 윤진만 (포포투 기자)

교정 - 오늘의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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