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탐조인연합 기수, 황미냥
황미냥(만 29세, 여성, 생태계조사원, 경기도 성남시)은 환경영향평가 일을 한다. 자연환경을 개발하기 전 그 개발이 주변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조사하는 일이다. 전국으로 출장을 다니면서 발견한 뱀 비늘, 노루 뿔, 깃털, 산양이나 토끼 똥 등을 모으고, 직박구리, 원앙, 다람쥐 등을 찍은 사진과 영상을 들여다보는 방구석 탐조로 삶의 즐거움을 누린다. 애니메이션과 게임, 자캐 만들기 등 다양하게 덕질한다.
“부모님 말씀이 제가 벌써 탄핵 3회 차래요. 노무현대통령 탄핵반대집회 때에도 부모님 손잡고 집회에 갔으니까요.”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집회에 다녔다. 기억나는 최초의 장면은 광우병소고기집회. 물대포와 차벽이 세워져 있었던 모습이 생생하다. 한 번은 해산한 후에도 골목을 막고 있던 전경들을 향해서 아버지가 “애들 내일 학교 가야 하는데 막고 있는 게 말이 되냐”라고 소리를 질렀다. 평소와 다른 아버지를 보고 일부러 저러는구나, 어렴풋이 알았다. 박근혜 탄핵 때와 검찰개혁 집회 때에도 가족들과 나갔다.
부모님은 밥상머리교육처럼 수시로 정치 사회 문화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같이 토론을 했다.
계엄이 일어난 날도 뉴스를 보던 부모님이 “미쳤나 봐.”소리쳐서 알았다. 계엄해제가 늦어지는 걸 보고 지금이라도 가봐야겠다고 그가 일어서자 아버지가 잡았다. 계엄이 시민을 어떻게 잡아가는지 겪어온 부모님은 “앉아라, 이런 일은 한 번에 해결되는 게 아니고 일상을 살면서 타개해야 하는 거다.”라고 말씀하셨다. 전적으로 부모님을 신뢰한 그는 그 말씀을 들었다. 지금은 그때 갔어야 했다고 후회한다.
그는 계엄 다음날 집회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막연한 두려움에 망설이기만 하고 나가지 못했다. 그동안 수없이 많이 갔지만 부모님과 함께였고 주로 대규모집회여서 크게 위험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어쩌면 끌려갈 수도 있는 엄중한 상황이었다. 근데 퇴근하고 보니 아버지 혼자 집회에 가셨다는 말을 듣고 경쟁의식 같은 게 생겼다.
“부모님은 열혈 운동권이어서 온갖 고비를 넘기셨대요. 경찰을 피해 기차에서 뛰어내려 도망간 이야기, 학교가 봉쇄되자 한밤중에 산을 넘은 이야기, 각목 들고 싸우는 전투조이야기 등등을 들으면서 컸어요. 저도 대학에 가면 그렇게 용감히 싸울 기회가 있겠다고 기대했을 정도예요. 대학에는 체제와 싸우는 사람들, 적어도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줄 알았죠. 근데 우리 세대는 전혀 그렇지 못했죠.”
광화문 집회가 끝나고 집에 오는 길에 남태령 상황을 알게 된 그는 우선 집으로 돌아와 라이브를 지켜봤다. 새벽 무렵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집을 나서려는데 이번에도 부모님이 말렸다. 지금은 너무 늦었으니 아침에 가라고. 역시 그때 나왔어야 했다. 이제 부모님보다 그의 판단을 믿을 때가 온 거다.
아침에 집을 나서려니 너무 피곤했다. 지금이라도 가는 게 맞을까, 금세 끝나면 어쩌지, 그래도 가야겠지, 또 망설였다. 가는 도중에도 내내 망설임이 따라붙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남태령에 도착하고 보니, 밤새 광장을 지킨 사람들 뿐 아니라 지하철역 출구에 붙어있는 ‘차 빼라’ 그림 하나까지도 반가웠다. 무대도 작고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지만, 나오길 잘했다 스스로 칭찬했다.
그 뒤로 거통고 승리문화제, 동덕여대, 전장연 시위 등 연대가 필요한 곳을 찾아 부지런히 다녔다. 방구석을 좋아하는 내향인답게 그는 주로 뒤에서 가만히 발언을 들었다. 그는 집회에서 발언에 집중하는 편이다. 현장이 아니고서는 들을 수 없는 소중한 의제들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출장이 많지 않았다. 대구에 출장 갔을 때는 대구집회에 참석했다.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보수의 성지라는 그곳에도 각자 자신의 삶을 지키고 바꿔나가려는 사람들이 있구나 생각했다.
그는 깃발을 늦게 들었다. 계속 깃발을 들어도 될까, 민폐가 되지는 않을까 망설이기만 하다가 3월이 되자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 같아 서둘러 만들었다. 한두 번 들겠지, 이번 주면 끝나겠지 했는데 꼬박 한 달을 흔들었고, 파면 후에도 아직 깃발을 놓을 수가 없다.
‘방구석 탐조인 연합.’ 작년 여름 보령로터리 cctv에서 새호리기가 관찰된 적이 있는데, 그때 ‘방구석에서 편하게 탐조하세요’라는 밈이 생겼다. 방구석도 좋아하고 탐조도 좋아하는 그에게 딱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그는 환경과 노동이라는 두 가지 의제에 주목한다. 그가 하는 일만 봐도 그렇다. 환경영향평가는 기본적으로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지만 의뢰인이 시공사이기 때문에 그들이 원하는 결과를 내줄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 제대로 된 환경영향평가가 되려면 규제와 보호에 대한 시스템을 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공사를 진행하는 노동자들의 혹독한 환경이 개선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업무량이 많고 노동시간이 길어서 결국 ‘사람을 갈아 넣는 방식’으로 성장해 왔다. 조선소에서는 아직도 목숨을 비용으로 따지며 매일 사람이 다치고 죽어간다. 이제는 같이 사는 세상, 내 이웃이 죽지 않는 세상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나는 생물과 인간이 공존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과연 성장을 멈출 수 있을지, 그러려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을 다 바꿔야 할 텐데 그것이 가능할지 궁금했다. 그는 어차피 한 번에 멈추지는 않을 테니까 멈추자는 말을 쉬지 않고 계속해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언론과 자본 세력들은 계속해서 성장을 부추기고 우리의 눈을 가리려 하겠지만, 다행히 이번 계엄을 지나오면서 시민들은 주어진 정보 너머를 볼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분석하고 평가하고 다시 확인한다. 이게 계몽이라면 계몽이다.
“이번 마트노조 농성만 해도, 어쩌다가 마트노조가 농성을 하게 되었는지,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는지를 알려고 귀 기울이게 되었죠. 그들의 노동현실을 알게 되면 연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요. 결국 투쟁이 일상이 되어버렸어요.”
그는 이제 별로 망설이지 않고, 자신이 필요한 곳이라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속한 대학원 노조에도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이 또한 계몽이라면 계몽이다.
“부모님이 꽤 진보적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 제가 슬쩍 커밍아웃을 했는데 조금 놀라셨어요. 그래도 친척의 성소수자 커플을 일부러 만나보시고 나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알 것 같다고 하셨어요.”
그 정도면 굉장히 진보적인 분들인 게 맞다. 성소수자가 이웃으로 같이 산다는 것, 가시화된다는 건 이토록 큰 힘을 발휘한다.
“성소수자 문제가 가득 차올라서 세상에 나올 때가 되었다”던 그의 말처럼 이번 광장을 통해 우리는 그들을 이웃으로 맞이할 준비가 된 것 같다.
윤석열이 파면된 이후에 그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조만간 카메라를 사서 탐조하는 즐거움을 본격적으로 누릴 작정이다. 지난주에는 전장연 고공농성장인 혜화동 성당에 다녀왔고 이번 주에는 학비연대 저녁문화제와 노동절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다.
그는 인터뷰가 끝난 후에도 한참 핸드폰 속에 담긴 맹꽁이, 곤줄박이, 뱀 등을 내게 보여 주며 웃음 지었다. 그의 웃음이 영락없는 덕후의 그것이라 별 관심 없던 나에게도 조금 전염되었다. 직접 만지는 게 아니라면, 방구석 탐조라면 구미가 당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