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의자 위에 서기로 했다
텅 빈 무대에 의자가 줄지어 있다. 두 명의 배우가 등장하고, 17명의 인터뷰어로 채워져 있던 스크린은 두 개의 숫자로 바뀌며 연극이 시작한다. 2,080과 122,713. 각각은 2021년도 산업재해 사망자와 재해자 수이다. 서울연극제에서 공연이 이루어진 2025년, 중대재해처벌법은 2022년부터 시행되었으나 해당 통계에는 의미 있는 변화를 찾아보기 어렵다. 한국의 산업재해 사망자 수는 OECD 회원국 1위다. 매일 7명의 노동자는 출근한 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말. 그 말은 어떤 사실을 전달할 수 있을까.
또 어떤 사실이 있다. 작년(2024년) 산업재해 사망자의 62%는 50인 미만 사업장의 노동자였다. 사망 원인으로는 여전히 추락과 끼임과 같이 재래식 재해 비율이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그래서 가장 많이 사람이 죽는 산업은 탄핵된 윤석열이 ‘건폭’으로 몰았던 건설노동자들이 일하는 건설업에서 발생한다. 또 다른 사실, 건설업은 이주노동자의 비율이 가장 높은 분야기도 하다. 작은 사업장일수록, 비정규직일수록, 노동조합이 없을수록, 이주민일수록, 살기 위해 나선 일터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죽기 위해 일하는 사람은 없다는 말이 얼마나 알량한지를 생각한다.
돌아와, 여기 산업재해를 다룬 연극 <산재일기>가 있다. <산재일기>는 17명 인터뷰를 바탕으로 구성한 희곡이다. 두 명의 배우는 무대 위에서 산업재해 당사자, 유족, 활동가 외에도 정치인과 화자까지 스무 명이 넘는 인물 자체가 된다. 연극은 살아있는 사람을 대면하는 일이다. 숫자로 멈추어지고 무뎌지는 사람들을 연극<산재일기>는 생생히 숨을 불어넣어 관객 앞에 내민다. 그렇다고 죽은 이가 살아오지는 않는다. 우리의 삶이 제빵 기계에 끼어 죽은 노동자가 만든 빵과, 비닐하우스에서 얼어죽은 이주노동자가 키운 깻잎과, 가건물에서 추락한 건설 노동자가 지은 집과, 과적 과속으로 사망하는 특수고용직 화물 노동자가 배달해준 물건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연극은 숨을 내쉬어 살아있는 사람들 앞에 죽은 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래서 연극을 보며 잠시 숨을 멈추어 본다.
연극 <산재일기>는 연극에게 질문을 던진다. 사실의 나열은 창작이, 혹은 연극이 될 수 있을까. 그러니까, 배우들의 대사는 분명히 출처가 있는 누군가의 말인데, 그것을 연속하여 보여주는 것이 어떤 극적 요소가 있다는 질문이다. 극작가 이철은 <산재일기>를 산업재해를 다룬 버바텀 연극으로 소개한다. ‘버바텀’은 ‘말 그대로’란 뜻으로, 이 연극 형식은 실제 인물의 인터뷰 내용을 장면 구성의 핵심 재료로 삼는다. 그런데, 인터뷰는 오롯이 사실적인가. 두 명의 배우가 온전히 스무 명의 인물이 되는 방식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연극적인 인터뷰를 진짜 연극으로 데려왔다.
활동가들은 내가 아는 최고의 명배우들이다. 같은 말을 만 번 반복해도 아직 부족해서,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자가, 연구자가, 지나가는 시민이 말을 건다. 같은 질문에도 같은 내용을 또 다르게 말해본다. 억울하게 죽은 자의 유족은 활동가가 되곤 한다. 집회에서 이들은 말할 때마다 우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그렇다고 울지 않기 위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주어진 상황은 그들이 특정하게 말하게 한다. 어떤 경우, 그것은 말이라기보다 인간이 출처인 대사가 된다. 인터뷰어가 무슨 말을 원하는지 안다. 할 수 있는 것은 반복뿐이다. 이러한 이들의 목소리를 집요하게 받아써 연극은 대사로 만들었다. 우리는 언제 서로의 역할을 바꾸어야 할지 모른다. 연극에서 배우들이 수십 번 다른 인물이 되었던 것처럼. 그러니, 모든 순간에 진심을 다하는 것밖에 우리는 몰라야 한다.
연극은 대사는 두툼하지만, 연출은 가볍다. 작은 무대와 빔프로젝터, 의자들, 그리고 두 명의 배우가 수많은 이들의 두꺼운 역사를 대신한다. 노동조합 사무실에 가장 넉넉한 비품이 무엇인가.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으나, 적어도 깔개와 의자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사무실의 크기에 상관없이 수많은 조합원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교육을 받고,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앉을 곳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말 안 듣는 기업과 정부기관 앞에 천막을 치고 의자를 놓으면 그곳이 노동조합 사무실이 된다. 노동조합은 노동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노동조합은 노동하며 존엄하고 싶은 사람들이 만드는 공간이다.
연극에서 의자는 다양한 의미를 재현한다. 노동자가 다루는 자재와 설비, 노동자가 일하는 현장, 정치적 공간과 산재사고로 쓰러진 노동자 등. 의자는 그 자체로 인물이며, 배경이고, 소품이다. 이 연극은 어디서든 올릴 수 있다. 이를테면 집회와 문화제의 무대에서도, 노동조합 회의실에서도, 장기 농성장의 마당 앞에서도. 연극이 가닿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 자신의 무게를 줄였다는 생각을 한다. 굵직한 소식들-이를테면 계엄령과 탄핵, 이어지는 선거-이 신문 1면을 장식할 때, 누군가는 그 신문을 공장에서 만들어 배달한다. 세상이 곧 망한다는 가공할 만한 소식이 쏟아질 때 이 세상을 진정으로 생성하고 유지하고 지탱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우리들, 노동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