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란트 쉼멜페니히 작 / 김수정 연출 | 안트로폴리스의 초록빛 해설자
안트로폴리스(Anthropolis)는독일어로 인간의 시대를 뜻하는 안트로포첸과 도시를 뜻하는 폴리스가 결합한 단어이다. 즉 ‘인류의 도시’라는 뜻이다. 안트로폴리스의 극작가 롤란트 쉼멜페니히는 인류세의 오만과 폭력성을 성찰하고자 테베를 배경으로 하는 고대 그리스 비극을 소환했다. 이 점에서 쉼멜페니히가 안트로폴리스를 집필한 것이 코로나 팬데믹 시기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팬데믹을 통해 이미 존재했던 세계의 위기들과 마주해야 했다. 이를테면 기후위기. 기후위기는 지구 식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미치고 있다. 코로나19는 박쥐를 기원으로 한다. 기후의 변화는 박쥐 개체수를 크게 늘렸고, 그들의 서식지와 인간의 서식지 간 존재하던 벽을 허물었다. 모이지 말라는 의료화된 선언은 인간 삶을 구원하지 못했다.
『안트로폴리스』 는 테베를 배경으로 하는 다섯 편의 비극을 재창작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2편 <라이오스>를 제외한 네 작품은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 소포클레스의 고대 문헌 재번역에 가깝다. 각 작품은 독립성을 갖되, 서로 연결되어 있고 시간적 배경은 현대와 고대를 넘나든다. 안트로폴리스 1부 <프롤로그/디오니소스>를 관람하지 않고 연극 <라이오스>로 안트로폴리스 연작을 처음 접한 관객이라면, 이번 연극 <라이오스>의 전개에 당황스러움을 느꼈을 수 있다. 거칠게 평가하자면 연극 <라이오스>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작품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안트로폴리스 연작 속에서 연극 <라이오스>를 이해한다면 이 작품이 필요한 이유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연극 <라이오스>, 그리고 비극 속 인물이자 쉼멜페니히가 창작한 라이오스는 인류의 도시에서 기꺼이 해설자의 역할을 맡았다.
한국에서 안트로폴리스 연작이 무대에 오르는 명동예술극장은 500명 이상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중극장으로, 이 공간을 사용하는 공연은 비교적 넓은 무대를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연극 <라이오스>는 자신이 활용할 수 있는 넓은 무대를 과감히 포기했다. 대신 무대를 위압적일 정도로 높고 넓은 계단으로 채웠다. 계단에 밀려 배우는 무대 위에서 지나치게 높이 혹은 관객과 가까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무대구성은 연극 <라이오스>의 성격과 관련이 있다. 연극 <라이오스>는 내러티브씨어터 형식으로 구성됐다. 배우는 연극의 퍼포머이자 이야기꾼이다. 지문과 대사는 엄밀히 구별되어 있지 않고, 눈앞의 배우가 누구의 목소리를 내는 중인지조차 명확하지 않다. 배우는 하나의 이야기를 몰입감 있게 보여주다가도, 이내 이야기의 맥락을 끊고 해설자로 돌아간다. 관객은 편안하게 연극을 관망할 수가 없다. 관객은 열심히 연극 속 잘게 쪼개진 장면에서 진실을 이어 붙여야 한다.
연극 <라이오스>는 배우 전혜진이 관객석에서 무대에 오르며 시작된다. 이때 배우는 배역이 아닌 배우로서 관객과 마주한다. 그리고 연극 초반은 전작 <프롤로그/디오니소스>에서 이어지는 카드모스족의 계보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 계보 위에 연극의 주인공 라이오스가 등장한다. 라이오스는 1부 디오니소스의 증손자이자 3부의 주인공인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그리고 4부의 주인공 이오카스테의 남편이다. 과도할 정도로 친절한 계보 설명은 서사에 대한 관객의 이해도를 높이고자 한 의도도 있었겠으나 안트로폴리스의 모든 주인공을, 특히 라이오스를 인간 폭력과 복수의 역사 속에 위치시키고자 한 시도가 아니었을까. 이를 통해 라이오스는 안트로폴리스에서 인간 폭력의 연쇄 고리로 등장한다.
1부 <프롤로그/디오니소스>는 붉은색의 연극이었다면, 2부 <라이오스>는 녹색의 연극이었다. 1부 디오니소스의 이야기는 에우리피데스의 <바쿠스와 여신도들>을 원작으로 한다. <바쿠스와 여신도들>은 디오니소스가 고향 테베로 돌아오는 사건을 극화한다. 디오니소스의 어머니 세멜레는 아버지 제우스의 번개를 이기지 못하고 불타 죽었다. 제우스는 세멜레의 자궁에서 태아를 꺼내어 자기 허벅지에 옮겨 넣었고, 디오니소스는 허벅지에서 다시 태어났다.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죽은 자, 동시에 두 번의 탄생을 경험한 자 디오니소스는 포도주, 연극, 그리고 종교적 광란의 신이 되었다. 테베의 여인들은 돌아온 디오니소스의 종교에 귀의한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왕 펜테우스만은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합리적이지만 믿음이 없어 신의 계략에 의해 여인들에게 찢겨 죽는다. 펜테우스의 어머니는 자신이 무엇을 죽였는지 알지도 못한 채 자기 아들의 머리를 전리품처럼 높이 쳐들었다. 무대에서 자기 아들의 머리를 높이 쳐든 어머니의 온몸은 피를 암시하는 붉은 색의 물감으로 물들었다.
한편, 연극 <라이오스>에서는 초록빛이 무대를 적셨다. 라이오스는 다수의 인간과 같이 불쌍하고 또 경멸스러운 인물이다. 어린 시절 테베에서 추방당한 경험이 있는 라이오스는 성년이 된 후 테베로 돌아와 왕이 되었다. 라이오스는 테베의 개국 공신인 일곱 전사 중 한 명의 후손인 이오카스테와 결혼을 하게 된다. 왕권 안정을 위해서는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아들이었다. 생기지 않는 아들에 찾아간 아폴론 신전에서 그들은 끔찍한 신탁을 듣게 된다. 아들을 낳으면, 그의 손에 라이오스는 죽으리라는 것, 그리고 그 아들은 자신의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의 남편이 되리라는 것.
연극 <라이오스>에서 갑자기 신분 상승을 이룬 라이오스의 모습은 철없는 망나니처럼 그려진다. 과도하게 여자와 남자를 밝히고 채신없이 구는 그의 모습은 그의 머리 위 씌워진 장난감 왕관만큼이나 가벼워 보인다. 그러나 이내 낮아진 조명의 조도 아래 ‘라이오스가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한 전혜진 배우의 독백이 이어진다. 어린 나이에 숲속에 버려진 라이오스는 손에 잡히는 것이라면 벌레와 나뭇잎, 쥐와 구더기를 가리지 않고 입에 넣었다. 음울한 그의 유년 시절은 초록 물감으로 표현된다. 각종 배탈과 추위에도 죽지 않은 그의 입가와 손에는 초록빛이 깊게 베여 있다. 밝은 장면과 대비되는 음울한 독백은 라이오스의 결핍에 관객이 이입하게 만든다. 동물도 인간의 모습도 아니었던 그를 구해준 것은 이웃 나라 피사의 왕 펠롭스였다. 그러나 그는 펠롭스의 서자 크리시포스를 납치하고 강간했다. 아니, 알 수 없다고 연극 <라이오스>는 말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는 것, 펠롭스의 서자 크리시포스를 데리고 테베에 도착했으나 이오카스테와 결혼했다는 것만이 분명하다.
그에게 내려진 저주에 가까운 신탁은 펠롭스의 원한의 결과였다. 라이오스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왕이 된 그는 신탁을 듣고 아들을 낳지 않을 수 있었을까. 혹은 아들을 낳은 뒤 제대로 키울 수 있었을까. 라이오스는 최악의 수를 둔다. 이오카스테와 사이에서 우연히/홧김에/발악하며 아들을 낳았지만, 신탁이 무서워 어린아이의 발등을 꿰어 숲속에 버린 것이다. 숲속에 버려졌다 왕이 된 라이오스는 마치 자신의 어린 시절 비극을 재현하듯이 자기 아들을 낳아 버렸다. 그리스 비극은 신의 예언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인간은 고뇌하지만, 어떤 노력으로도 비극을 빠져나올 수 없다. 그렇지만, 인간인 우리는 인간적으로 라이오스를 바라보게 된다. 어떤 방식으로도 인간 세계에 신의 뜻이 관철된다면, 낳아버린 아들을 유기하는 것은 인간이 택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이었다고.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의 아들 오이디푸스가 예언대로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을 한 것은 신의 뜻이기도 하지만 인간 선택의 복합적 결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의 뜻은 인간의 뜻보다 높이 있지만, 인간 세계와 유리되어 있지도 않다. 펠롭스의 은혜를 저버린 라이오스의 행동은 분명히 인간의 행동이었다. 크리시포스를 강간하고 버린 것도, 이오카스테와 결혼한 것도, 취약한 왕권을 우려해 아들을 낳은 것도, 그럼에도 낳은 아들을 유기해 버린 것도.
쉼멜페니히가 안트로폴리스를 집필한 코로나 팬데믹 시기 극장은 문을 닫았다. 쉼멜페니히는 한 인터뷰에서 “연극을 매개체로 사람들이 도시에 다시 모일 수 있다는 건 정말 아름다운 일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연극이란 무엇인가.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시민들이 모여들었던 야외극장을, 제례가 이루어졌던 모든 종류의 신전을, 조선시대 마당극이 펼쳐졌던 장터를, 오늘날 정부와 지자체, 비영리 단체가 운영하는 각종 공공극장을 생각한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연극이 올랐고, 연극이 올라 사람이 모였다. 우리는 연극을 볼 때 더 비싼 좌석 혹은 저렴한 좌석을 선택하지만, 내가 내는 표의 가격은 공연을 사유화할 수 있다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연극은 그 자체로 다중이 모여 공공성을 지닌다. 문 닫은 극장은 우리가 공공의 것으로 만들어온 것들에게 닥친 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닫힌 극장을 보며 쉼멜페니히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생각했다. 신과 인간, 늘 실패하기만 하는 자유 의지를 지닌 인간,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인간, 제대로 문제를 알지 못하는 인간. 그러나 비극의 결말에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는 인간의 모습은 신의 권능함을 보여주지만은 않는다. 그것은 사고하는 인간, 반역하는 인간, 앞으로 이어질 비극을 구성하는 시민으로서 인간을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연극 <라이오스>는 한국에서 발생한 계엄을 암시하는 대사를 자주 활용했다. 라이오스의 오판으로 파국에 이르는 도시국가 테베라는 소재는 민주주의의 위기와 직접적으로 연결해야 할 메타포였기 때문이다. 다만 김수정 연출의 <라이오스>는 이를 주로 계엄을 시도한 이의 행동을 가볍게 희화화하는 정도에 그쳤다. 2024년 12월 3일 계엄이 선포되고 많은 이들은 광장에 나섰다. 다수의 노력과 울분으로 우리는 계엄을 일으킨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이 대통령을 선출했다. 그런데 연극 속 비난과 풍자의 말들은 여전히 일 년 전 계엄의 날에 멈춰져 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날카로운 비판을 자임하면서 이미 안전하고 합의된 영역으로 숨어버리는 것은 공공의 극장에 모인 우리 시민들에게 진심으로 안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한국이라는 국가의 또 한 통치자의 오판으로 축소해 버리는 것은 연극 자체에 대한 풍부한 해석을 막았다. 심지어 계엄과 계엄이 낳은 혹은 표출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진행형의 문제의 앞에서는 말하기를 멈춰버리는 비겁함이 아쉽다. 이는 고대 도시 테베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호명하는 것이 연극 <라이오스>에서 중요한 연극적 장치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극장은 공공성을 띠지만, 돈과 시간 혹은 그 이상이 있어야 우리는 극장을 찾을 수 있다. 극장의 의자는 폭신하고 공기는 조금 건조하지만, 추운 겨울에도 따뜻하다. 무대를 만들기 위에 수많은 사람이 각자의 소임을 다해 매달린다. 서울에서 가장 비싼 땅 명동에 여전히 남아있는 예술극장 앞을 지날 때면 나는 한 것도 없이 자부심과 감사함을 느끼곤 한다. 비록 명동역을 나오면 연극 <라이오스>가 큰 의미 없이 연극적 장치로만 여러 번 호명한 계엄 시기 2월 복직을 요구하며 고공농성에 오른 노동자는 여전히 높은 구조물 위에 위태롭게 서 있지만. 나는 농성 중인 노동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마음과 예술극장에 오르는 무대를 챙겨보는 마음이 아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5부의 대서사시 안트로폴리스를 명동예술극장에 올려 시민들에게 선사하고자 했던 결심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그것은 모험적이고 아름답다. 국립극단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쉼멜페니히가 시간을 뒤섞어 재탄생시킨 그리스 비극이 2025년과 2026년 한국에서 우리에게 남길 것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