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제장수 아줌마

너와나의 소녀시대(4)

by 김민정

*아줌마라는 단어가 여성비하적일 수도 있으나, 80년대 당시 그렇게 불렸기 때문에 사용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는 오로지 나의 개인사이다. 우리집은 어느 시골 마을이었고, 집앞에는 기찻길이 있어서 하루에도 여러번 칙칙폭폭 소리를 들었다. 동네에 사는 또래 남자아이가 기찻길을 건너려다 기차가 달려와 얼른 몸을 납작하게 숙여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그 아이는 그후 아주 똑똑하게 대처했다고 어른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다.


이장인가 면장인가가 있는 동네 마을회관 옆에 작은 수퍼가 하나 있었다. 수퍼라기보다는 구멍가게였다. 과자 몇 종류와 직접 만든 막걸리 같은 걸 팔았다. 휴지도 쌓여 있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농촌의 구멍가게다.


서울에서 온 엄마는, 유독 서양문물과 친한 사람이었다. 엄마의 아빠, 그러니까 나의 외할아버지는 2차 대전 당시 중국에 살고 있었다. 외할아버지의 애인은 중국의 한 여성 배우였다고 한다. 당시엔 아편이 크게 유행하여 그 배우도 아편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외할아버지는 그 배우와 헤어지고 한국으로 돌아온다. 당시 외할아버지의 직업은 통역사였다. 중국어와 영어에 능통했으며, 시대가 시대인만큼 당연히 일본어로도 소통이 가능했다. 우리집에는 할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남긴 메모장이 아직도 남겨져 있다. 엄마는 가끔 그 메모를 꺼내와 영어를 공부했다. 마흔살에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외할아버지는, 독일 의사들이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하러 왔을 때 통역도 했다고 한다. 워낙 언어를 잘하다 보니, 그게 화근이 되어 군사정권 시절에 스파이로 몰리기도 했고, 그 후로 할아버지에게 통역 의뢰가 끊겨 가세가 기울고, 외할머니 혼자 다방과 당구장을 경영해서 여섯 아이를 키웠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활달한 성격에 스포츠를 좋아했다. 그 옛날 테니스를 배워 고교시절엔 한국 대표로 일본에 와서 시합도 했다고 한다.


탈선이 길었다, 여하튼, 엄마는 외할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치즈와 초콜릿, 서양 과자들이 끊이질 않는 환경에서 자랐다. 그런 엄마에게 한국의 농촌은, 자신이 보지 못한 또다른 세상이었다. 걷고 또 걸어도 사람을 만나기가 힘들었고,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미니 스커트에 굽 높은 구두를 신은 엄마는 농촌사람들에게는 외계인이었다. 엄마가 집을 나서면 동네 사람들이 다 엄마 구경을 하러 올 정도여서 엄마는 노란 긴 생머리를 포기하고, 머리를 짧게 자르고, 당시 누구나 다 하던 그 파마머리를 했다. 아마 엄마는 그렇게 자기 개성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엄마에겐 두 명의 구세주가 있었는데, 하나는 미제장수 아줌마, 또 하나는 우리집에서 일하던-당시엔 식모라고 불렀다, 식모라는 단어도 참 웃기지 않는가? 굳이 거기 ‘모’자는 왜 붙였을까? 그렇게라도 해서 대접해주기 위함인가? 아니면 엄마로 부리기 위함인가?-엄마 또래의 젊은 여성이었다.


미제장수 아줌마는 한달에 한번꼴로 우리집에 왔다. 그녀의 보따리는 크지도 않았는데 그 안에는 미국의 다 털어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수많은 제품이 들어있었다. 짭조름한 소시지. 그건 내가 알기론 미국과 캐나다에서만 판다. 물론 남미에서 팔 수도 있겠지. 여하튼 소금물에 절인 듯한 그 소시지는 엄마에겐 어릴 적부터 먹던 소울 푸드였던 것 같다. 물에 타면 오렌지 주스가 되는 마법의 가루도 여름이면 꼭 챙겨두던 것이다. 1미터짜리 치즈도 그랬다.


“아줌마, 다음번엔 치즈 꼭 가져오세요. 두꺼운 걸로요.”


엄마는 늘 그렇게 말했고 아줌마는 그 치즈를 구해오면 당당하게 그 치즈를 내려 놓았고, 치즈를 구하지 못할 때는 슬라이스 치즈를 건넸는데 엄마는 직접 썰어먹는 치즈를 원했지 슬라이스 치즈에는 만족하지 않았다. 피넛버터와 포도잼이 한 병에 든 이른바 믹스 잼 같은 것들도 우리집에서 꼭 구입하는 것이었다. 가끔 깔끔하지만 중고가 분명한 원피스 같은 것도 가져왔다.


미제장수 아줌마는 우리동네에 오면 우리집을 첫번째로 방문했고, 우리집에 미제장수 아줌마가 오면 동네 여자들이 다 우리집을 찾아와, 시식도 하고, 서울 얘기도 듣는 조촐하고도 시끌벅적한 다과회가 열렸다. 서울여자들의 헤어스타일과 서울여자들이 입는 옷은 늘 궁금하고 알고 싶은 대상이었다. 누군가는 매니큐어를 구입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서로 발라주고 깔깔대고 웃기도 했다.


미제장수 아줌마가 다녀간 후, 우리집에 온 아이들은 물에 가루를 넣어 주스를 만들어 마시며 “너희 엄마 멋쟁이”라는 말로 주스 한 잔 값을 하고 가기도 했다.


내가 치즈를 맛있게 먹는 것을 본, 우리집 베이비시터 언니는 다급하게 우리 엄마를 불러와 “아줌마, 미안해요. 제가 못 본 사이 민정이가 비누를 먹었어요.”라고 대성통곡을 하기도 했다. 80년대 초반, 농촌마을에선 치즈도 소시지도, 흔한 물건은 아니었다.

당시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 물건들은 어디서 왔을까? 미국에서 온 병사들이 보급받은 물품을 팔아넘긴 걸까? 거기엔 또 어떤 사연과 인생이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미제장수 아줌마가 아주 가끔 찾아오는 엄마의 오아시스였다면, 엄마 곁에 항상 있어준 ‘식모’라 불리던 우리집 가사도우미 김 씨 아주머니는 엄마와 나이가 비슷했다. 어린 시절 결혼을 해서 아들만 셋을 낳은 아주머니는 남편이 자주 집을 나가, 혼자 아이 셋을 키웠다. 체격이 크고 수더분해서 우리 할머니 마음에 쏙 들어, 우리집에서 십년 이상을 일했다. 엄마는 아주머니랑 할머니가 광에 숨겨둔 커피를 몰래 훔쳐와 마셨고, 할머니가 못 볼 때 쌀도 훔쳐다가 아줌머니한테 챙겨주기도 했다. 우리 증조 할머니는, 구두쇠로 알려졌는데, 할머니 방에, 큰 광(?)이랄까, 붙박이 장이 있었고, 그 붙박이 장 안에는 온갖 맛있는 것들이 감춰져 있었다. 초콜릿이라든가 뻥튀기라든가 곶감 같은 것 말이다.


가끔은 땅콩, 아몬드, 잣도 나왔다. 할머니는 가장 좋은 것들만 감춰놓고 살았는데, 할머니 딴엔 커피가 아주 소중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우리집을 드나드는 수십명의 일꾼들이 혹시나 커피를 마실까 발을 동동 굴렀을 것이다. 드물고 고귀한 물건이어서라기보다는, 동네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물건이어서였다. 쇼핑을 제대로 하려면 읍내까지 나가거나 미제장수 아줌마가 오는 날만 기다려야 했는데 미제장수 아줌마는 약속을 정해놓고 오는 것이 아니고, 읍내까지 나가기가 고령의 할머니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버스에 오르기도 쉽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들와도 서먹서먹했고, 굳이 나가자면 택시를 불러야 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그렇게 맛있는 것이랄까, 할머니가 좋아하는 것들을 감춰놓고 살았다. 엄마는 자기가 사다 먹으면 될 것을 왜 꼭 할머니가 감춰놓은 것을 훔쳐와 먹었는지 모르겠다. 엄마에게는 아마 경제적인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김 씨 아줌마랑 엄마는 죽이 잘 맞아, 둘이 있으면 신나게 수다를 떨다가 우리 친할머니에게 혼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입으로 밥하니, 니네는?” “아니 지금이 몇 신에 아직 그것밖에 못했어?” “일꾼들 기다린다, 새참은 다 됐니?”


엄마와 엄마의 가족은 엄마가 논밭과 과수원과 목장이 있는 부잣집에 시집갔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여성도 노동력으로 꼭 필요한 집에 시집을 간 것이다. 10시면 새참을 준비하고 12시엔 점심을 준비하고 15시엔 또 새참을 내가야 했고, 그건 엄마랑 김 씨 아줌마의 주된 일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주부라 불렸고, 김 씨 아줌마도 주부라 불렸다. 아마 미제장수 아줌마도 그렇게 불렸을 수도 있다. 그나마 김 씨 아줌마랑 미제장수 아줌마는 돈을 벌었지만, 엄마는 생활비를 타서 쓰는 입장이었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친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렇게 꼬장꼬장하고 불호령을 내리던 그 할머니 지갑에서 백원까지 동전 몇 개가 나왔을 뿐이라고, 엄마가 엉엉 울었던 것을 기억한다. 논밭, 과수원, 목장, 양계장까지 했지만 할머니에게 주어진 것은 경제력이 아니라 노동과 사람들을 다루는 일이었을 것이다.


미제장수 대신 미제를 파는 가게들이 등장하고, 더이상 미국의 것들이 귀중품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 지금도 나는 가끔 우리집에 처음 보는 물건들을 가져온 미제장수 아줌마를 생각한다. 보따리라고 부르던 그 가방, 보자기, 그건 엄마랑 나에게 보물상자였다.

그 많던 미제장수 아줌마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직업은 사라져도 그들은 일을 했을 것이다. 어딘가에서 나도 모르게 자신들만의 역사를 썼을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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