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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ONY Apr 22. 2024

기대에기대어살지말기

호구는기대치가낮다


나는 마음을 주는 일에 인색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얻기 쉬운 마음을 지닌 사람이다. 기준에만 그랬다면 호구라는 얘기를 들을 일은 없었을 테니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에서도 쉬운 사람임에는 분명하다. 사람을 만나면 그게 직업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지나치는 인연이든 중요하고 깊은 인연이든지 부지불식간에 최대한 마음을 열고 사람을 맞이하는 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능력껏은 타인에게 친절하고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어주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다거나, 때의 인생목표였던 좋은 어른이 되겠다는 포부 때문이라거나, 공명심 혹은 이타심 이런 거창한 명분은 아니다. 내가 관계에서 최선을 다하는 건 정확히는 나를 위한 일이다.


사람은 생각보다 다정하지 못하고, 따뜻하게 타인을 안아줄 여유가 없으며, 모든 순간에 모두에게 친절하기 힘들다. 우리는 다들 알고있듯 보통의 사람이다. 하지만 당연하다 여기고 관계의 끈을 놓아버리기엔 외롭고 힘든 게 보통의 삶이라서, 다들 가슴 한켠에 구멍이 뚫려있는 걸 모르는 척하며 살아내는 것 같다. 아닌 척하면서 사람들에게 화내고 짜증내고 갑질하고 냉담하게도 대하는 마음들이 있다. 그종국에는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과 상처받기 싫은 속내의 왜곡된 표현이다.


사람사이의 관계에서는 누구나 기대하는 바가 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떠한 의미의 사람이 되리라는 기대, 내가 주는 마음의 크기만큼 반드시 나에게 돌아오리라는 기대, 언젠가 상대방에게 마음을 터놓거나 기댈 수 있으리라는 기대, 힘든 시기에 우리의 관계가 도움이 될 거라는 기대, 저 사람이 나보다는 나은 어떤 능력이 있을 거라는 기대, 하다못해 심심할 때 무료함을 달래주길 바라는, 크고 작은 잦은 기대들로 사람들을 대한다.

기대치에 상대가 미치지 못했을 때, 우리는 작게는 실망하거나 좌절하기도 하고 크게는 분노하고 원망하기도 한다.

기대를 하는 것도 실망을 하는 것도 그 자체로는 잘못된 게 아니다. 관계라는 것의 본질은 원래 그런 것이다. 다만 기대의 크기와 방향 설정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서로에게 바라는 점이 없으면 관계라는 것 자체가 이어지지 않으니까.


우리가 관계에서 상처받는 지점은 두 가지다.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관계에서 받는 첫 번째 상처, 그리고 그 관계에서 떨어져 나온 실망과 좌절을 스스로에게 떠넘길 때 만들어지는 두 번째 상처.

관계 자체에서 받는 상처는 금세 치유된다. 그 관계의 양상이 변하거나 기대의 방향과 크기를 조절하면 끝이다. 선을 넘은 관계나 회복할 수 없을 정도의 상처를 받는 관계라면 손절, 다시 관계를 회복할 정도의 힘이 있는 사람들은 기대치와 관계 설정의 변화. 우리 사이에는 항상 선택의 폭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두 번째 상처에서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커다란 변곡점을 맞이한다.

관계가 틀어진 원인을 찾아야 할 때 타인보다는 내 안에서 찾는 사람들이 있다. 다시 상처받기 싫다는 이유로 숨어버리거나 관계를 맺으려 시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문제의 원인을 무조건 타인에게서 찾는 사람들, 그리고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두 눈을 가리는 사람들, 강한 척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버티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관계에서 잘못된 세팅값을 설정했다거나, 내가 상대에게 잘못된 신호를 줬다거나, 서로의 기대치가 맞지 않았다거나, 서로가 사용하는 언어나 태도의 온도차가 있었다거나 하는 등의 무수한 원인들을 다 제처 두고 자신에게서 치명적인 단점을 발견했다는 듯이 자책하고 쭈그러드는 사람들이 있다.


내가 그랬다. 그래서 관계에서 소극적이고 방어적으로 임했고, 작은 균열의 틈이라도 보이면 냅다 도망치기 바빴다. 나는 주로 상대방을 극도로 이상화하거나 일단 좋은 사람일 거라는 기대치를 설정해 놓고 상대방이 선을 넘을 때까지 그의 부정적인 면을 보려 하지 않았다. 선을 넘어 나에게 해를 끼치거나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증거를 눈앞에 맞닥뜨리는 순간이 올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임계점을 넘는 순간 아차차 싶어서 손을 놓아버리는 타입이었다. 그때쯤이면 나는 이미 한계를 넘어 만신창이가 되어있었고, 상처를 회복하는 데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내야만 했다.


그런 비슷한 패턴의 관계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긴 했던 것 같다. (보통 그런 경우를 심리학 용어로 반복강박이라 부른다) 나는 반복적으로 관계가 단절되면서 받는 상처를 피하기 위해 무작정 참고 수그러뜨리며 아무것도 요구하거나 제안하지 않는 관계를 맺고 있었고, 그건 사실상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자해행위였다. 상처에 무뎌진 것처럼 아무 일 없이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문득 나는 무뎌진 게 아니라 더 깊고 치명적인 상처를 스스로에게 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에게 형벌처럼 내리던 두 번째 상처를 주지 않기로 결심한 이후로 나는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서 관계를 바라보는 법을 연습했다. 그렇게 관계에 대한 공포와 강박에서 벗어나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필요로 하는 욕구의 대상이 아닌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상대에 맞춰 기대치를 허용함으로써 가볍고 안전하며 충만한 관계를 맺는 법을 알게 되었다.

내가 나에게 대해주기를 바라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다정하게 대하는 법을 알게 되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게 비슷하게 화답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완전히 손절하는 게 아니라 내게서 약간 멀리 떨어진 약하고 중요하지 않은 관계의 틀에 놓아둠으로써 단절에서 오는 상처를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소중하고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두기 위해서 여전히 나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하려고 한다.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신체적으로든 도와주려고 한다. 그러고 나면 어떤 사람이 나에게 좋은 사람인지가 분명하게 가려지기 때문이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나를 아껴주지 못해도 내 마음을 알아주고 감사해하고 소중하게 대할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물질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내가 해주는 만큼 돌려주지 못해 아쉬워하고 미안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체력적으로 힘들어서 나를 도와줄 여력이 없어도 존재만으로 도움되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항상 내가 주려고 한 것보다 많이 미안해하고 고마워한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살다 보니 항상 나에게 더 많이 주려는 사람들이 주변에 몰려들어서 나는 받지 못해도 항상 괜찮았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호구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지만, 결코 손해 보고 살지 않는다.


나는 호구라는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체력적으로 더 여유롭고 더 많이 갖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그래야 더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호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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