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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ots Oct 02. 2023

잉크 펜 드로잉

내가 그림을 시작했을 때 집중했던 재료는 검은색 볼펜이었다. 처음에는 단조로운 선으로 사물을 그리거나 시적 문장을 그림으로 옮겨오는 것을 좋아했다. 계속 그림을 그려나가면서 그림에 밀도가 점점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림을 그려나가는 과정을 통해 그림의 자리를 발견해 나갔다. 그림의 자리에 내가 있게 된 것이다. 이런 발견을 통해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는 몸은 그림을 그리는 몸이 되었다.


두 번째 개인전 벽에 걸린 그림들


몸의 떨림으로 마주한 문제는 긴 선을 긋는 것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짧은 선을 여러 번 그어서 하나의 선을 만들어 감으로 쉽게 이 문제를 풀었지만,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문제였다는 것은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렇게 그려야지. 이 생각보다는 그때그때 그림에 충실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리는 그림보다 그려지는 그림을 통해 그림의 자리를 발견한 것 같다. 어린아이가 말하기를 배워나가듯이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통해 그림을 배우는 것은 지금 생각해 보면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나의 몇몇 그림에서 흥미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림의 구성을 생각했을 때 직선이어야 할 선이 부드럽게 휘어져있다. 사실 이것도 의도한 것은 아니다. 그림을 계속 그려나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선이 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알게 되면 당연한 것이 된다. 내 몸은 펜을 물고 있을 때 몸이 원점인 컴퍼스가 되기 때문이다. 내가 그린 선은 둥그런 원의 일부분이었다. 어쩌면 나는 완성하지 못한 많은 원을 그려나간 것일 수도 있다.


<당신의 리듬에 맞춰 춤출 거예요>, 종이에 잉크 펜, 26 * 36cm, 2019


짧은 선을 모으는 방식은 선을 벗어난다. 나는 이것을 그려지는 그림으로 그림의 자리를 넓히는 과정을 통해 확인했다. 나는 짧은 선을 모으는 방식으로 그림의 질감을 표현했다. 짧은 선으로 그린 면을 여러 층 쌓는 형식으로 질감을 나타냈다. 나의 그림에서 짧은 선을 모으는 방식은 그림을 독특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선을 그릴뿐만 아니라 그림의 질감을 표현하는 것도 좋아했다. 그림의 단단함은 도화지에 무수히 많이 그어진 선에서 비롯된다. 짧은 선은 그림의 기초 문법이 되었다.


나는 단색의 그림의 흥미를 선과 질감을 통해 풀어나갔다. 이것은 생각보다 흥미로웠던 지점이었고 내가 잉크 펜 드로잉을 오래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이 실험이 실패했더라면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 것이다. 좋은 이미지는 좋은 문제에서 출발한다.


<없는 숲을 달린다>, 종이에 잉크 펜, 36*26cm, 2019


한 가지 질문이 있을 것이다. 연필 대신 볼펜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연필은 연필깎이를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경험적으로 내가 누구의 도움 없이 쉽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준 것은 볼펜이었다. 스스로 말하려면 스스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그 움직임은 운동이 될 수 있고 주변을 환기시킬 수 있다. 나에게 그림 그리기는 말하기고 운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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