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장은 신용이요 인격이다.
며칠 후면 손녀 은채의 첫 돌이다. 선물을 무엇으로 할까 오래 생각하다가 도장이 생각났다. 평생을 사용하며 자기를 보증하는, 사용함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소중한 물건이다. 어려서도 사용하지만, 어른이 되어서 더 자주 사용한다. 할아버지가 정성과 기원을 담아 선물하는 것도 의미 있는 기념이 되리라.
살면서 자신을 외부로 나타내어 나를 대신하는 것은, 얼굴을 비롯한 겉모습만이 아니고 이름, 사진, 도장, 사인(Sign) 등 많을 것이다. 자신을 표현하는 소품은 내면의 품격까지도 나타내는 이미지이며 분위기이다. 가끔 쓰지만 없어서는 아니되는 인장은 사치스러워도 누추하여도 아니된다.
손녀 인격에 어울리는 품위 있는 도장을 새기기 위하여, 골동품으로 유명한 예술의 거리 인사동으로 갔다. 자주 가는 인사동이지만 어느 도장 가게에 가야 할지 막연했다. 마침 바로 앞에 소박하고 고졸한 고서적상이 보여서 들어가 물었다.
“혹시 전각 잘하는 분 아세요?”
“전각이라니요? 어디 낙관 찍으실 건가요?”
“으~~ㅁ, 손녀에게 도장 하나 파 주려고요”
“아~~!! 예~~!!, 나이는 많지 않은데, 성실하여 꼼꼼하게 하는 분이 계세요. 기계로 파지 않고 항상 수작업으로 하니까요”
“아 그래요. 고맙습니다”
국가인장 1급 기능사 김동각 씨가 경영하는 滿印堂(만인당)이라는 노포(老鋪)를 찾았다. 인사동은 골동품과 예술품이 모이는 곳이다. 가게는 한 평이될까 말까 하는 작은 장소였지만 고집스레 혼을 담아 도장을 파는 장인의 완고함이 가득했다. 상아, 흑단, 자단, 벽조목(벼락 맞은 대추나무) 등 도장목이 정연하게 진열되어 있고, 도장을 새기는 수많은 조각도(칼)가 긴장감을 더해 주는 작지만 예술인의 혼이 넘치는 공간이었다.
이름 석 자와 생년 월 시를 주고 “우리 손녀가 쓸 도장이니 정성껏 잘 파주세요.”라고 부탁하였다. 원숭이 띠라고 원숭이가 조각된 흑단목 도장을 권했다. 십이지상(十二支像)은 진중한 맛이 덜하여 큰 꿈을 품기를 바라는 뜻으로 용의 조각을 선택했다. 도장목은 고가의 옥이나 상아도 있지만 겸허히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검은색 대추나무를 골랐다.
할아버지가 선물했다는 징표로 나의 호(號)인 ‘中正’을 새겼다. 세계의 중심에 서 바르게 살고 싶어 오래전부터 좋아했던 주역에 나오는 글자이다.
가운데 中, 원의 중심에 서면 모두를 볼 수 있어 관찰과 배려가 쉬우며 많은 이들의 관심과 지원도 받기 쉽다. 상과 하의 가운데는 소통의 핵이고 축이 된다. 내가 사는 시대와 세계의 중심에 서서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야 한다. 가운데나 중심은 변두리나 변방이 있어야 중심일 수 있다. 중심은 항상 변두리나 변방을 살피고 배려해야 한다. 변방이 행복해야 중심도 행복할 수 있다.
바를 正. 바른 뜻을 세우라는 의미이다. 내가 바르고 반듯하게 서 있어야 사방을 바르게 볼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내 뜻을 알고 공감해 줄 것이다. 누워서는 바르게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보기도 어렵다. 바름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하며, 삶이 바르게 가고 있는지 항상 성찰하는 자세를 생각이 아닌 몸으로 익혀야 한다.
어진마음의 상징인 둥그런 원을 그리려면 중심축이 있는 그림쇠(컴퍼스)가 있어야 가능하다. 손으로 그림쇠 중심축을 바르게 세우고, 눈으로는 원이 그려지는 연필심을 본다. 중심축이 흔들리면 원이 그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중심축을 보면서 원을 그리는 사람은 없다. 항상 자기 마음의 변화를 주시하며 자기 삶의 중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경계를 게을리 말아야 한다. 中正의 도를 지켜 평화와 자유가 항상 함께하는 삶을 기원하며 두 글자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은채 동생 혜성이도 태어나고 돌이 되었다. 외손자 유찬이도 곧 생일이다. 세 남매가 의좋게 지내라는 바람으로 두 손자에게도 똑같은 대추나무에 용 무늬를 새겼다. 행복하고 바르게 살기를 소원하며 예쁜 복주머니에 담아 편지와 함께 선물했다.
우리나라에서의 인감은 신용이다. 자기의 인격이요 신용인 도장을 남에게 맡겨서는 안 될 것이다. 언제나 도장만큼은 꼼꼼하게 확인한 후에 직접 찍어야 한다. 이 도장을 사용하면서 항상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볼 수 있는 통찰력이 밝아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