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펜서' 리뷰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군인들이 총구를 이리저리 겨누며 주방 안을 살핀다. 얼마 후 군용 트럭이 줄지어 들어오고, 트럭에서 내린 군인들은 일사불란하게 주방 안으로 무언가를 나른다. 언뜻 전시 상황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가져온 것은 무기가 아니라 형형색색의 신선한 채소들이다. 왕실의 크리스마스 연회를 준비하기 위한 식재료들. 군인들의 흐트러짐 없는 움직임을 보고 있자니 여기가 왕실인지 군대인지 가늠이 안 될 정도다.
기사의 도움 없이 홀로 차를 몰고 왕실 별장인 샌드링엄하우스로 향하던 다이애나(크리스틴 스튜어트 분)는 길을 잃고 헤맨다. 연회 시작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각, 하나둘 다이애나의 행방을 묻기 시작한다. 그러나 기다리는 사람들의 표정과는 달리 어쩐지 그는 길을 잃은 걸 다행으로 여기는 눈치다. 가까스로 별장 근처에 도착하지만 다이애나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쏠리고 만다. 별장 근처에 자신이 어릴 적 살던 집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빠와 함께 만들었던 허수아비를 발견하자마자 곧장 ‘과거’를 향해 내달린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폐허가 된, 돌아갈 수 없는 곳일 뿐이다.
다이애나는 곧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왕실은 즐거운 크리스마스 파티에서조차 그에게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왕실의 전통과 규율에 갇힌 채 3일을 버텨내야 하는 다이애나의 얼굴은 어둡기만 하다. 남편과의 결혼을 시작으로 들어오게 된 왕실이지만, 정작 남편인 찰스 왕세자는 다이애나 곁에 있어주지 않는다. 삭막한 결혼생활에서 다이애나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어린 두 아들과 자신의 의상을 담당해주는 매기(샐리 호킨스 분)뿐. 찰스가 선물해준 진주목걸이 역시 그의 숨통을 조인다. 남편이 자신에게 준 것과 똑같은 것을 내연녀에게도 주었다는 사실보다 괴로운 건, 그 목걸이를 아무렇지 않게 목에 걸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다. 국민들이 보고 싶은 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아름다운’ 왕세자비이기 때문이다.
‘스펜서’를 보는 동안 우디 앨런의 영화 ‘로마 위드 러브’를 몇 차례 떠올렸다. 거기엔 이런 에피소드가 나온다.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평범한 중년 남성 피사넬로는 여느 때처럼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선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문 밖에 엄청난 수의 기자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하루아침에 세상의 관심을 받는 유명인사가 된 것이다.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즐기는 것도 잠시, 피사넬로는 얼마 못 가 유명인으로서의 삶에 염증을 느끼고, 진정제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다. 피사넬로가 자신의 운전기사에게 대체 자신이 왜 유명한 것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운전기사는 “유명하신 걸로 유명하신 거죠” 하고 우문에 현답을 내놓는다. “유명하면 다 특별하다고 생각하세요?”라는 말과 함께.
보는 내내 피식피식 웃었지만, 이 에피소드가 가지는 함의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결국 모든 것은 역할놀이인 셈이다. 중년 남성으로서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는데도 순식간에 그의 아침식사 메뉴와 그가 입은 속옷의 모양이 모두가 궁금해 하는 최고의 이슈가 된 것처럼, 다이애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을 준비되지 않은 개인이 홀로 감당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다이애나를 고통스럽게 했던 것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남편의 외도보다 남편의 외도에 온전히 맞서고 대응할 수 없는 왕세자비로서의 역할 같은 것. 왕실의 전통과 규율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지키고 따라야만 하는 왕세자비로서의 의무가 그를 괴롭혔던 것이리라.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처음부터 그의 아픔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화가 중후반부까지 진행되는 동안 감독이 다이애나를 묘사하는 방식이 파파라치들의 카메라만큼이나 그를 대상화하고 있다고 느껴진 나머지, 다이애나의 행동이 모든 걸 가진 자의 투정이나 치기어린 반항심에서 나온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분명 별장 안에, 다이애나의 방 안에 존재했는데, 어째서 다이애나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에 있으면서도 별장 바깥에서 그를 훔쳐보고 관찰하는 카메라들과 동일한 태도를 취하는 건지 납득할 수 없었다. 다이애나의 표정이나 움직임을 수시로 클로즈업하며 섹슈얼한 분위기를 자아낼 때는 불쾌하기도 했다. 그가 목을 조여오는 진주목걸이를 뜯어내고 진주 알갱이를 수프와 함께 씹어 먹는 상상을 하는 장면은 기괴하고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영화가 상당한 시간 동안 그의 아픔을 서스펜스로 활용하는 데 그치는 것도 아쉬웠다. 영화는 다이애나가 피부를 철사 절단기로 잘라내며 자해를 하거나 극심한 거식증과 폭식증에 시달리는 모습을 연거푸 보여주는데, 이 과정에서 정작 중요한 것들은 모호해지거나 지워진다. 관객은 다이애나가 왜 잠자리에 들 때마다 ‘앤 불린’ 이야기에 기댈 수밖에 없었는지, 그녀의 마음속 공포가 무엇인지를 대략적으로나마 이해하게 되기까지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한다.
크리스틴 스튜어트 표 다이애나 스펜서에 대한 가장 큰 기대는 다이애나의 심리적 고통 혹은 내면에 침잠해 있는 우울을 그가 한층 더 깊이 있게 해석하고 표현할 것이라는 데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감독은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인형 같은 외모에 매료된 듯 그를 매력적으로 ‘소비’하는 데에 더 골몰한 것 같다.(크리스틴과 다이애나의 ‘싱크로율’이 중요한 이 영화에서 분장·의상에 공을 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영화 말미에 가서야 비로소 다이애나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그가 매기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부터가 그랬다. 매기는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는 다이애나에게 다짜고짜 사랑을 고백했고, 그 고백을 들은 다이애나는 천진하게 웃는다. 앞서 온갖 화려한 테크닉들이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다이애나의 내면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한 장면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꿩사냥을 즐기는 왕실의 전통에 반기를 들고, 사냥에 나서기 싫어하는 아들을 위해 기꺼이 총알 사이로 몸을 던졌던 사람. 발레를 좋아하고, 아기와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에 재능이 있었던 사람. 찰스 왕세자와의 이혼 후에도 빈민 구호나 적십자 활동 같은 자선과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던 사람. 다이애나의 정신적 고통은 그의 건강한 모습에서 오히려 더 선명하게 전해진다. 다정한 다이애나가 극심한 마음의 병을 앓으며 야위어 가는 과정이 그의 아픔을 대변하는 영화에서마저 ‘매력적으로’ 소비된 것은 분명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