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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riteller 토리텔러 Feb 01. 2017

이북(e-book)으로 읽기

옛날 책을 e-book으로 보고 싶었을 뿐이다.

소설책 한 권을 붙잡고 시작했다. 모니터 가격이 싸져 듀얼 스크린을 사용하는 것이 부자의 상징이 아니다. 한 모니터에는 PDF 파일을 열어 두고, 다른 모니터에는 워드 프로그램을 띄웠다. PDF에서 텍스트를 긁어낸 후 워드에 붙여 넣고 좌우를 비교해 가면서 인식률 100% 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워드 프로그램에 붙여 넣은 텍스트 파일을 읽으면서 말이 안 맞거나 한자가 다른 것을 일일이 확인하며 한 땀 한 땀 글자 바느질을 한다. 다섯 권짜리 보다는 세 권짜리로 목표를 낮춰 잡았지만 글자 바느질도 쉬운 것은 아니다. 단순한 일은 맞다. 군대 행군이라면 동료가 있고, 회사 조립라인이면 월급이라도 받을 텐데 주위의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할 일을 하는 외로움. 구한말 지식인의 삶이려니 한다. 


작업을 계속할수록 힘이 나기보다는 스스로 설득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목표를 잃는 느낌. 목표를 위한 목표의 느낌. 이북 단말기를 구매한 이유는 이북 단말기로 옛날 책을 읽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런데, 작업을 하다 보니 한 번 읽는 것이 아니라 PDF로 읽어보고, 교정을 보면서 또 읽고 즐겁지도 않게 맛은 못 느끼면서 억지로 밥을 밀어 넣는 작업을 계속하게 됐다. 몸에서 그 책이 싫어졌다. 성경도 아닌데 눈 빠지게 교정한 소설책을 PC 화면으로 읽은 소설책을 이북 단말기로 또 읽는 것이 무슨 즐거움일까. 자기 학대도 아니고. 시작했기 때문에 마무리해야 한다는 막연한 그러면서도 무의미한 책임감만 남았다. 


e-pub파일은 어떻게 만드는지 설명을 마무리하면 짧지만 찬서리 내리는 만주를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걷던 구한말 선구자적 지식인의 장정이 마무리될 터이다. 인간지능으로 태어난 텍스트 파일 원본. 이 파일을 e-pub파일로 변환시켜 주면 완성된다. 그냥 텍스트로 저장한 후에 확장자를 pub으로 바꾼다고 될리는 없다. 


sigil

텍스트를 e-pub으로 만들어주는 오픈 프로그램이다. 돈을 별도로 내지 않아도 다운로드해서 사용할 수 있다. 사용법은 어렵지 않다. 시키는 대로 만들면 쉽게 된다. 조금 어려운 기능은 조금 시간을 투자하면 알 수 있다. 그냥 책을 잘 읽고 싶은 사람이라면 추가 기능도 필요 없다. 해당 프로그램에서 텍스트를 불러온 뒤에 pub형식으로 저장하면 간단히 해결된다. 

변환이 끝났다. 심장이 뛴다. 만들어진 e-pub파일을 이북 단말기로 옮긴다. 그리고 불러오기. 이북 단말기에 책 표지가 뜨면서 'EPUB'이란 딱지가 붙어있다. 대학교 졸업장보다 더 사랑스럽다. 표지를 누른다. 컴퓨터를 켜거나 셋탑박스의 전원을 올리고 나서 화면이 나올 때까지 시간보다 더 오래 걸리는 것 같다. 기대감 때문일 것이다. 된다. 깔끔한 글자들이 나온다. 이때만큼은 걸그룹 어느 멤버보다 글자가 더 예뻐 보였다. 글자 크기도 커진다. 더 이상 시린 눈을 비벼가며 볼 필요가 없다. 이렇게 난 옛날 책을 e-book 단말기로 읽을 수 있었다. 


뿌듯함도 잠시 그 소설책을 다시 읽지는 않았다. 이미 질리도록 읽었기 때문에 다시 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지 모른다. 내 머리에서 소설 내용이 가물가물해지면 다시 찾을지 모르지만 당분간은 쳐다볼 리 없다. 그렇게 이북 단말기는 긴 대기시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전될 때까지 다시 찾지 않았다. 


땀과 시린 눈물과 뻐근한 손목의 아픔이 새겨진 e-pub파일. 나 혼자 보기 아까워 친구에게 주고 싶다. 남에게 주면 불법이란다. 출판사와 저자에게 아무런 수익이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불법복제해서 주는 것과 같다. 내가 산 책을 내가 PDF로 디지털 변환을 만들면 합법이다. 난 이미 구매한 책의 형태만 바꾼 것이니까. 그 PDF 파일을 친구에게 주면 역시 불법. 추출한 텍스트 파일만 줘도 불법. 우리나라 법이 그렇다. 나만 봐야 한다. 


그나마 나 죽을 때 상속할 재산 하나 생겨서 다행이다. 대신 이북 단말기도 꼭 같이 상속해줘야겠다. 피땀 어린 e-pub파일을 PC에서 읽게 할 수는 없다. 구한말 지식인의 대장정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옛날 책을 이북 단말기로 읽고 싶었을 뿐인데... 엄청난 고개를 헐떡이게 넘어가며 읽게 되었는데 지금은 기쁘지 않다. 조금 과장하면 '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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