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처드, 돈트 북스 그리고 워터스톤즈에서
안개처럼 나는 내가 절친하게 지내는 이들 가운데 펼쳐져 있는 거야. 여러 나뭇가지가 안개를 떠받쳐주는 거야. 그래서 나의 생명, 나라는 것이 그렇게도 멀리멀리 퍼져가는 거지. 해처드 책방의 창 안을 들여다보고선 나는 지금 무엇을 꿈꾸는 것일까? 무엇을 생각하려나? 펼쳐서 늘어놓은 책을 읽어보면서, 전원에 동터오는 하얀 새벽의 어떤 모습을 그리려나?
이제는 뜨거운 햇빛도 두려워 마라.
또한 혹한(酷寒)의 눈보라도.
셰익스피어, <심벨린> 4막 2장에서
_ 버지니아 울프, 『델러웨이 부인』
언제부터 책을 읽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언제부터 책과 독서를 사랑했는지 기억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조금 과장해서 태어났을 때부터 난 책을 좋아했던 것 같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부모님 덕이 팔 할 이상인 듯싶다. 부모님은 내게 어떤 책을 읽어보라고도, 읽지 말라고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도서관을 정신없이 배회하며 당장 읽고 싶은 책들을 고르는 즐거움을 내가 오롯이 느낄 수 있도록 내버려두셨다. 아버지는 초등학생이 되어 처음 맞이한 어린이날에 받고 싶은 선물로 책을 꼽는 딸의 손을 잡고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데리고 가 가지고 싶은 책을 직접 고르게 했다. 내가 고민 끝에 고른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기쁜 마음으로 사주셨다. 내가 어떤 책을 읽던, 부모님은 "네가 좋으면 된 거지."라며 나의 선택을 항상 존중해주셨다.
덕분에 나는 읽고 싶은 책 한 권을 고르기 위해 여러 권의 책을 속에서 헤매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알면서 자랄 수 있었다. 누군가 골라준 책을 읽는 것과 비교도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책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는 이것이 얼마나 큰 즐거움인지 몰랐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읽고 싶은 책만 읽는데, 어떻게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싶다. 이건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만남, 운명이었다.
훌륭한 부모님 덕분에 지금도 난 책과 독서를 사랑하고 서점과 도서관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책 덕후가 되었다. 그리고 나의 책 사랑은 런던에서도 단연 빛을 발했다. 런던에서 가보고 싶은 서점이 정말 많았다. 덕분에 여행을 준비하며 설레었고, 동시에 가장 걱정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점에 들어서면 마치 앨리스처럼 시계토끼를 쫓아 들어선 토끼굴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모험을 하듯 서점을 종횡무진할게 뻔했기 때문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토끼굴에서 보낸 시간은 아주 잠깐 낮잠을 잔 정도였지만 난 그렇지 않을게 분명했다. 런던에서 서점은 가보고 싶은 곳이면서 동시에 가기에 망설여지는 곳이었다.
그래서 준비했다. 런던에서 꼭 방문할 서점 리스트를 만들기로. 그중에 세 곳을 엄선하여 골랐다.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 영국 전역의 여행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서점, 그리고 영국에서 상징적인 프랜차이즈 대형 서점으로.
여행 서점, 돈트 북스
내가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은 바로 돈트 북스(Daunt Books, London)였다. 그 이유는 여행 서적 전문 서점이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여행 및 문학 전문 서점으로 자리 잡은 돈트 북스에서 미리 계획해온 여행 계획에 더 좋은 팁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일찌감치 들렀다. 돈트 북스는 런던 곳곳에 6개나 있는데, 런던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리로 손꼽히는 매릴번 하이스트리트(The Marylebone High Street)에 있는 본점을 찾았다.
매릴번 하이스트리트는 다양한 상점이 거리를 채우고 있다. 귀여운 아이들 옷부터, 예쁜 도자기 그릇들이 쇼윈도 너머에 선 나를 유혹하는 듯한 곳이었다. 그중에 나의 시선을 단번에 끄는 곳이 있었으니, 짙은 녹색 간판과 짙은 나무 색이 딱 떨어지는 외관을 가진 곳, 바로 돈트 북스였다.
돈트 북스를 소개한 글을 보면 빠지지 않는 수식어가 있다. 바로 "런던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자, "런던 사람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꼽는 책방"이다.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선정한 이후로 돈트 북스를 설명할 때면 이 수식어가 빠지지 않고 있다. 런던 사람들이 얼마나 동의하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런던에 여행 온 방문객에게 이보다 매력적인 수식어는 없을 듯 싶다. 런던에서 서점을 간다면, 이곳을 꼭 가보고 싶게 만드는 수식어이니까. 그래서 아주 잠깐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수식어를 만든 붙인 건 데일리 텔레그래프 일지 몰라도, 이걸 놓치지 않고 지켜낸 돈트 북스 사람들이 더 대단하다는 그런 생각.
그도 그럴 것이 돈트 북스는 브랜드 마케팅을 잘한 서점으로 유명하다. 돈트 북스는 1990년에 지점을 낸 이후, 이제는 6개의 분점을 둔 서점 그룹으로 성장했다. 책 읽는 사람이 급속도로 줄어드는 때, 돈트 북스가 이뤄낸 성과가 신기했고, 그 비결이 궁금했다. 돈트 북스의 사장인 제임스 돈트는 원래 금융업에 종사했다. 뉴욕의 JP 모건 투자은행 직원이었던 그는 1990년 서점을 목적으로 지어진 프랜시스 에드워드를 인수하여 자신만의 서점 '여행자를 위한 돈트 북스'라는 이름을 내걸었다. 본래 장사 수완이 좋은 사람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오늘날 영국 출판계에서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돈트 북스란 브랜드를 만든 공로를 인정받은 덕도 있지만, 2011년 5월 아마존에 합병될 위기에 처한 워터스톤즈를 정상화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는 금융회사에 다닐 때 바빠서 연인과 시간을 보낼 틈이 없어 자신이 좋아하는 여행과 독서를 결합한 돈트 북스를 열면 조금 한가하지 않을까 싶어 시작했다고 한다. 한가로운 서점 주인이 꿈이었지만, 그는 자신을 잘 몰랐던 모양이다. 그는 한가롭게 살기에, 책과 여행을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는 자신이 대학생일 때, 꼭 필요한 책을 찾기 위해 너무 힘들었던 경험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한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중동으로 졸업여행을 준비하던 그는 중동에 대한 책을 구하기 위해 온 서점을 샅샅이 찾아다녔다. 그래서 서점을 차려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다신 고생을 하지 않도록 아예 자기가 필요하고 원하는 서점을 열었다고 한다.
지금 와서 보면 인터넷 검색으로 정보를 다 찾을 수 있는데, 여행 서점을 연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문이 생긴다.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점점 책을 찾는 사람이 줄어들고, 새로운 방식으로 정보를 얻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걸. 하지만 그는 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성공했다. 그 이후 그의 삶을 보면 돈트 북스를 열고 그다음에는 지점을 늘리고 이제는 워터스톤즈 재건과 발전을 위해 상임이사를 맡고, 지금은 CEO로 활동하고 있는 등 계속해서 바쁜 삶을 살고 있다. 지금도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출판의 미래와 서점의 내일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찾아볼 수 있고, 끊임없이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외관의 이미지와 이어져 서점 안은 고동색 원목 바닥과 녹색 카펫 위를 거닐며 난 '이 서점은 자신의 정체성을 굉장히 잘 구현해낸 공간'임을 느꼈다. 제임스 돈트는 "여행 서점"을 '우리만의 개성'으로 만들어 냈다. 바로 돈트 서점을 통해. 신간 서적으로 꾸며진 입구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서 천천히 책장을 살펴보았다. 잉글랜드에서부터 시작해 세계 곳곳의 나라 순서대로 책이 정리되어 있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가 궁금하다면 가장 윗 층으로, 유럽이 궁금하다면 그 아래층으로, 그 외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을 가장 아래층에 놓여 있었다. 내가 놀란 점은 정말 많은 나라에 대한 여행서를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모두 여행서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 나라 소설 작품, 인물에 대한 전기, 사진집, 음식, 문화에 대한 책들이 함께 놓여 있었다.
그가 왜 이렇게 돈트 북스를 꾸며놓았을까.
제임스 돈트는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들만 매력을 느끼는 서점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서점은, 솔직하게 망하기 딱 좋다. 그는 여행을 떠나고 싶은 사람에게는 진짜 여행을 떠나고 싶게 만드는 곳,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여행을 떠나보고 싶게 만드는 '여행 서점'을 기획하여 돈트 북스를 지 않았을까 싶었다. 책이 어떤 분야인지보다 이 책으로 어떤 나라를 알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책을 배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여행 서점이란 정체성을 여행자를 위한 곳으로 한정하지 않았다. 덕분에 여행서 외에 그 나라를 이해할 수 있는 역사책, 문학 작품, 철학˙예술 서적 등으로 책의 분야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진짜 그 나라를 이해하기 위한 여행 준비를 할 수 있는 '진짜 여행 서점'이란 정체성을 완성할 수 있었다. 아,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추론이다. 다만 돈트 북스가 보통 서점보다 단지 여행서가 많아서 여행 서점이 된 것은 아니라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서점 안을 한참 둘러보고 있는데, 순간 기분이 이상해져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왠지 이곳은 마치 서점이 아니라 도서관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돈트 서점은 너무 고요했다. 사람들의 말소리는커녕, 음악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책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었다. 책을 고를 때 가장 필요한 건, '고요함'이다. 책은 어떤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책에 대고 우리가 직접 말을 건네지도 않는다. 책과 독자 간의 대화는 머릿속에서 이루어진다. 굉장히 조용해 보일 뿐, 사실 책과 독자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것이다. 서점과 애독자들은 책과의 대화에 집중할 수 있도록 침묵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있었다.
헤르만 헤세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여행으로 타인의 존재와 사유를 만나고 그와 친구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책들이 그대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아. 하지만 가만히 알려주지. 그대 자신 속으로 되돌아가는 길을."이라고도 말했다. 그의 말처럼 책은 새로운 세계를 여행하는 장이 되어주고, 동시에 인생이란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도가 되어준다. 돈트 북스 본점은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과 책에서 여행을 찾는 사람과 나처럼 여행 중 책을 만나러 온 사람들이 오고 떠나는 플랫폼이다. 그곳에서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면, 그건 침묵이 아닐까.
영국의 교보문고? 워터스톤즈
내가 영국에서 가장 많이 갔던 가게를 꼽으라고 말하면 하나는 코스타(Costa)라는 프랜차이즈 카페와 워터스톤즈(Waterstones)다. 두 곳 다 어느 도시를 가도 있었고, 여행 중에 쉬어가고 싶은 순간에 어김없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코스타에선 커피 한잔의 여유를 느꼈고, 워터스톤즈에선 책이 주는 편안함을 만끽했다. 비가 와서 들어갔고, 다리가 아파서 들어갔고, 때로는 틀어진 여행 일정에 속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들어갔다. 내가 방문한 워터스톤즈는 약 10곳 가까이 되지만, 자칫 잘못했으면 가보지 못할 번 했다. 2011년 수많은 서점 체인인 워터스톤즈는 큰 위기에 직면했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 2011년 아마존에 매각될 뻔했으나 다행히 고비를 재도약의 발판으로 삼아, 요즘까지도 안정적으로 운영을 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안정기를 이끈 사람이 돈트 북스 창업자 제임스 돈트다. 그는 워터스톤즈가 아마존과 같이 온라인 서점과 맞서는 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하고, 오프라인 프랜차이즈 서점만이 고객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는다. 그리고 그걸 워터스톤즈에 적극 도입하여 오늘날 워터스톤즈를 만들었다.
워터스톤즈는 이번 영국 여행에서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고 자주 들여다볼 수 있어서 참 좋았던 장소다. 일반적인 대형 서점과 마찬가지로 내가 방문한 워터스톤즈는 역세권 혹은 교통이 편리한 곳에 있었다. 마치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있어야 할 "문화 공간" 중 하나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굉장히 많은 인구가 오가는 곳에 있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책을 구매할지는 의문이었다. 실제로 워터스톤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책을 사는지 보았지만 구매하는 걸 별로 보지 못했다. 도시의 중심에 서점이 계속 있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중 런던 피카딜리서커스역(Piccadilly Circus)에 있는 커다란 워터스톤즈만큼은 진짜 방문을 위한 목적으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 서점이 지향하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바로 '쉼표'였다. 워터스톤즈는 책을 판매하는 공간을 넘어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문화를 향유하는 공간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있다. 피카딜리 거리는 런던에서도 손에 꼽히는 쇼핑 명소이며 많은 관광객들이 몰리는 곳이다. 워터스톤즈는 분주한 거리와 달리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다. 역사, 문화가 살아 숨 쉬는 런던을 분주히 돌아다니며 여행하던 나에게 잠시나마 복잡함이나 바쁨을 뒤로할 수 있는 여유를 되찾아주었다. 서점은 결국 독자를 매료시킬 수 있어야 한다. 매력적인 서점은 우연히 들어선 독자의 마음은 뜨겁게 만들고, 분주함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책에 집중할 수 있다. 워터스톤즈 피카딜리점은 딱 그런 곳이었다. 좀 전까지 이리저리 사람에게 치였지만, 서점에 들어선 순간 다른 공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던 곳. 나도 모르게 여행 중간중간 워터스톤즈가 보이면 들어간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책을 읽지 않아도, 책을 구매하지 않아도 책과 익숙해지는 공간이 주는 안정감을 만들고 있었다. 이 기분은 온라인 서점은 결코 만들 수 없는 오프라인 서점만의 매력이다.
서점을 둘러보았다. 눈에 들어온 건 직접 손으로 쓴 듯한 '추천하는 글'이었다. 같은 분야의 책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이 책을 놓아둔 이유가 하얀 종이에 담겨 있었다. 정갈한 활자와 달리 빽빽한 글씨는 읽기 불편했지만, 진정성은 더 담겨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더 작게 빽빽하게 쓴 쪽지에 눈길이 갔다. 서점은 책을 파는 곳이다. 하지만 책들이 하나같이 일렬로 서가에 놓여있고, 어떤 독자가 이를 발견하길 기다리는 건 요즘 같은 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전략이다. 고객에게 적극적으로 좋은 책을 알려야 하고, 그래야 서점은 살아남을 수 있다. 그 방법으로 워터스톤즈가 택한 것은 '직접 쓴 추천글'이다. 우리나라 작은 동네 서점에서도 찾아볼 수 있어 이제는 특별함이 커 보이지 않지만, 손으로 쓴 글씨를 읽다 보면 책을 추천하는 이의 진심이 전해지는 듯했다.
과거 워터스톤즈는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기준 없이 책을 선정하여 진열하였다. 출판사 직원에게 일정 수수료를 주고 책의 선택을 맡겼다고 한다. 하지만 제임스 돈트는 서점의 역할은 독자에게 어떤 책을 제안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 제안을 디테일하게 다듬어가며 워터스톤즈만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시도를 시작 했다. 그는 책 큐레이션을 전문 인력을 고용했고, 워터스톤즈의 모든 직원에게 책을 선택하고 진열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그러자 천편일률적인 북 큐레이션이 아니라, 워터스톤즈 지점마다 다른 북 큐레이션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덕분에 책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출판사로부터 대규모로 책을 들여오기 보다, 소규모로 다양한 책을 구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책을 서점 직원들이 직접 배치하는 건, 온라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 서점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북 큐레이션이었다. 그러자 많은 독자들은 다시 워터스톤즈를 찾았다.
그랬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서점은 책이라는 재화를 판매하는 곳이 아니라 책의 가치를 발견해 독자에게 전달하는 곳이며, 워터스톤즈가 바로 그런 곳임을 보여주었다.
나에게 워터스톤즈는 오늘날 프랜차이즈 서점의 미래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단일 브랜드로 묶여 있지만, 서점 하나하나는 저마다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함을 워터스톤즈는 보여주었다. 워터스톤즈 서점마다 들어가 있는 W Cafe, 저자 강연회, 지역 사회 독서모임과 도서 MD의 만남 등 책과 독서로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램을 꾸준히 기획하고 있다. 즉, 워터스톤즈는 커다란 서점 그룹이지만 한 곳 한 곳 서점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느슨한 형태의 그룹이었다. 예를 들어 잉글랜드 남부 플리머스의 워터스톤즈에서 눈에 가장 확 들어오는 책은 바로, 《Poldark》였다. 런던의 워터스톤즈에서는 좀처럼 보지 못했던 책이 이곳에서는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듯 눈에 띄는 곳에 놓여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최근 BBC에서 드라마화한 탓도 있지만, 콘월의 바다를 무대로 한 소설로 플리머스와 그 인근 지역의 특색이 녹아진 소설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워터스톤즈는 그 지역의 이야기, 그 지역의 작가가 쓴 작품으로 큐레이션을 해둔 공간을 마련해 두었다. 이곳에서 읽었을 때 더 특별한 책이 무엇인지 독자가 빠르게 발견할 수 있도록. 책과 이 지역을 느낄 수 있도록 돕는 배려가 돋보이는 순간이었다.
어릴 때 독서를 좋아하게 되면, 평생 간답니다. 늘 책을 읽지는 않더라도 책 속에 둘러싸이고 싶은 순간이나 책이 보여주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순간이 수시로 찾아오죠. 책과 서점의 세계는 아주 흥미로워요.
_ 제임스 돈트
여행에 돌아와 워터스톤즈에 대하여 조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대학생에게만 주는 특별한 할인 혜택이 있다는 것이다. ac.uk 이메일 계정을 인증하여 온라인으로 혹은 학교 학생증을 오프라인 매장에서 학생 멤버십에 가입하면 책을 구매했을 때 적립을 추가로 더해줄 뿐만 아니라 특별 할인을 제공하고 있었다. 영국이나 우리나라나 대학생들이 책을 읽지 않는 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점이 자체적으로 대학생들이 책을 접하는 접근성을 낮출 수 있도록 돕는 시도는 좋지 않을까? 부모님이 사주는책이 아니라, 자기가 필요한 책을 구매하는 고객층인 대학생이 사회에 나갔을 때도 도서 구매 서비스를 계속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건 중요하다. 앞으로 책을 지속적으로 구매할 수 있는 흐름을 열어주는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했다. 그 효과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앞으로 성인이 되어도 책을 읽는 즐거움에 쉽게 접근하도록 돕는 건 서점 입장에서 지속가능성을 도모하는 방법이고 아직 없애지 않는 것을 보면, 지속해볼만한 시도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사실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너비와 깊이는 책을 읽는 사람이 일궈내야 할 몫이다. 이때, 서점이 할 수 있는 것은 '만남'이다. 하지만 만남이 없으면, 책의 세계로 들어갈 수조차 없다.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독자의 마음에 닿을 수 있도록 워터스톤즈 직원들은 고민하고 있다. 그 고민이 다른 개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영어로 서점은 bookshop. 우리나라 말로 서점(書店). 두 단어 모두 가게 혹은 점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독일어로 서점은 부흐한드롱(buchhandlung)이라고 한다. '책을 다루는 곳'이란 뜻이다. 앞으로 서점의 미래를 품고 있는 단어가 아닐까. 더는 책 자체만을 판매하는 서점은 버틸 수 없다. 책을 문화적으로 어떻게 다룰지 고민하고, 그 결과물이 빛을 발하는 서점만 남지 않을까?
다양한 개성을 바탕으로 책을 다루는 공간이 우리나라에도 많아지길 바라며, 나는 영국의 워터스톤즈를 걸었다.
델러웨이 부인도 멈췄던 그곳, 해처드 서점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델러웨이 부인』 에서 델러웨이 부인은 산책하며 눈부신 런던의 6월을 만끽했듯, 나는 런던을 떠나기 직전 7월의 마지막 날 런던을 여유롭게 즐기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 런던을 떠나면, '언젠가'라는 기약 없는 약속만 바라보며 런던을 떠올리게 될 것이라는 조금 아련한 마음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인생을 사랑하고 있어. 사람들 눈 속에, 팔을 휘젓고 또는 발소리를 요란히 내고 뚜벅거리며 걸어가는 사람들의 걸음걸이 속에, 들끓는 아우성, 마차, 자동차, 버스, 짐차, 또 발을 질질 끌며 흔들흔들 걸어가는 샌드위치맨 속에, 악대 오르간 소리와 한성 속에, 또 머리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의 묘하고 드높은 폭음 속에 내가 사랑하는 것이 들어 있어. 인생, 런던, 6월의 이 순간이.
"어딜 가십니까?"
"런던 거리를 거니는 게 좋아서요. 정말 시골길을 거니는 것보단 훨씬 재미가 나거든요."
신나게 런던을 산책하던 델러웨이 부인은 '클래식'한 공간에 마음을 잠깐 빼앗긴다. 시골에서 보냈던 시간이 너무 지루하고 힘들었던 그녀는 진열장 위에 정갈하게 놓인 책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순간 마치 책이 자신에게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바쁜 도시 런던이 좋아, 마냥 길을 걷던 그녀는 고풍스러운 어느 서점의 화려한 진열장에 올려진 책에게 물어본다. '자신이 어떤 삶을 꿈꾸고 있는지, 무엇을 찾고 싶어서 이렇게 방황하고 있는지' 생각한다. 지금 나는 바로 그 서점 앞에 섰다.
바로,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해처드 서점 피카딜리 지점(Hatchards Piccadilly) 앞에. 런던을 방문하면 꼭 들리는 기념품 가게 중 하나인 포트넘 앤 메이슨(Fortnum & Mason) 옆에 있다. 검은색 외관도 멋지지만 무엇보다 서점 명판 위에 놓인 커다란 영국 왕실 문양이 박혀 있어 거리를 걷다보면 더 눈에 띈다. 해처드 서점은 영국 왕실 조달 허가증을 받은 풀 하우스(full house) 소유의 건물이며,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필립 공의 후원을 받고 있다. 1797년 존 해처드가 설립한 이 서점은 약 220년 간 자리를 지키며 조지 오웰, 찰스 디킨스,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J. R. R 돌킨, 조앤 K 롤링 등 기라성 같은 영국 작가들의 작품과 역사를 함께했다. 그래서일까. 해처드 서점을 다녀온 사람들은 이곳이 책을 판매하는 곳이기보다 박물관이나 유서 깊은 도서관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방문했던 2017년은 해처드가 문을 연지 220년 된 기념비적인 해였다.언제나 검은 옷을 입고 다녔던 존 해처드의 초상화 앞에 섰다. 딱딱하고 경직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해처드 서점을 연 그는 원래 웨스트민스터 사원 뒤에 있었던 작은 서점에서 일을 하는 종업원이었다. 이후 지금 내셔널 갤러리가 있는 트라팔가 광장 근처의 서점에서도 일을 했던 그는 자신만의 서점 사업을 하고 싶었다. 이후, 적당한 장소를 찾던 중 지금의 피카딜리 쪽에서 문을 열기로 한다. 당시 피카딜리는 런던의 중심지(city)는 아니었지만, 많은 상점들이 자리한 번화가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이미 문을 연 다른 서점들이 있었지만, 스물아홉 살인 존 해처드는 그곳에서 자신만의 서점을 키워나갈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던 모양이다. 1797년 그는 피카딜리 173번지에 있던 화이트 씨의 서점(Mr White’s bookshop)을 인수해 자신의 이름을 내건 서점 해처드 서점 문을 열었다.
(1820년에 계약할 때 지금의 주소 187번지를 가지게 되었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때 종업원 한 명과 일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문학, 정치, 예슬, 사회 분야의 유명인들이 사랑하는 서점으로 바뀌었다. 해처드 서점은 문을 열자마자 시인들의 관심을 받았는데, 그중 시인 바이런은 역시 해처드를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멤버 중 한 명이었다. 200년 간 영국인의 사랑을 받은 작가 제인 오스틴도 이곳에서 책을 샀는데, 바로 앤 래드클리프(Ann Radcliffe)의 『우돌프의 미스터리(The Mysteries of Udolpho)』다. 이 소설은 제인 오스틴의 첫 소설이지만, 맨 마지막에 출간되었던 『노생거 수도원』 의 아이디어를 얻은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에 해처드가 사랑하는 노벨문학상 소설 『크롬 옐로(Crome Yellow)』의 저자이자 우리에겐 『멋진 신세계』로 더 잘 알려진 올더스 헉슬리도 자주 해처드 찾는 주요 고객이었다. 또 귀엽고 따뜻한 그림체가 인상적인 『피터 래빗 이야기』가 해처드에서 맨 처음 팔리는 것을 보고 굉장히 기뻐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누구보다 해처드 서점과 가장 깊은 인연이 있는 문학인을 꼽으라면, 단연 오스카 와일드가 아닐까?
‘I only knew what hunted thought
Quickened his steps, and why
He looked upon the garish day
With such a wistful eye;
The man had killed the thing he loved,
And so he had to die.’'
Oscar Wilde, <The Ballad of Reading Gaol>.
다만 그가 어떤 생각에 쫓겨 발걸음이
빨라졌는지, 그리고 어째서
눈부신 하늘을 향해 그토록 애틋한 눈빛을
보냈는지, 나는 알았네.
그 남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죽였고
그래서 죽어야 하는 것이라네.
오스카 와일드, <레딩 감옥의 노래>
오스카 와일드는 해처드를 정말 사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자주 가게를 찾아오는 단골손님이었다. 소설가로 성공한 이후에도 그의 해처드 사랑은 이어졌다. 해처드 서점을 가면 오스카 와일드 테이블이라고 불리는 1층 메인테이블이 있는데 그곳에 오스카 와일드가 직접 친필 사인을 했고, 그곳에 그가 사인한 책을 쌓아두기도 했었다. 그는 연인으로 알려진 알프레드 더글라스와 함께 서점에 오곤 했다. 이후 오스카 와일드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2년간 실형을 받아 감옥 생활을 한다. 그리고 1897년 5월에 출소해 프랑스로 떠나기 전, 런던에서 마지막으로 갔던 곳이 해처드 서점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해처드에 온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런던에서 마지막으로 꼭 한번이라도 가고 싶었던 해처드 서점. 그에게 이곳은 가장 힘겨울 때 떠올리고 싶은 행복한 기억이 담긴 정말 특별한 공간은 아니었을까.
해처드 서점은 빅토리아 시대의 건축 양식과 인테리어를 지키고 있다. 많은 애독자들은 해처드다움을 고수한 것을 품격으로 인정한다. 그리고 그 공간을 즐긴다. 나는 서점을 찬찬히 둘러보다 2층의 창가 쪽에 놓여 있던 푹신한 소파에 잠시 앉았다. 그런데, 좀처럼 일어날 수 없었다. 읽기보다 보기에 가까웠던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무릎에 놓아둔 채, 가만히 있었다.
내가 서점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우연히 집어 든 책이 너무 재미있어서 다 읽기 전까지 일어날 수 없어 결국 다 읽고 일어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책을 계산대로 들고 가 사는 순간, 책의 기억과 그것을 읽은 감동까지 한꺼번에 사는 것 같아 마음이 벅차오른다. 그 순간을 난 딱 두 번 만났다. 그래서 더없이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해처드에서 맞이한 오후 2시의 감동은 다른 듯 비슷했다. 책과 함께 하지 않았지만, 책만큼 이야기가 쌓인 서점의 역사를 책장 사이사이 벽에서 읽어보고,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런던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서점, 해처드는 꼭 다시 가보고 싶다. 다시 방문한다면 또 공간을 느끼기보다, 나를 매료시킬 책 한 권을 만나는 기적을 만나기 위해 가고 싶다. 하지만 책은 그날 다 읽지 못해도 괜찮다. (나의 영어 실력으로 볼 때 책을 다 읽는 기적을 맞이하려면 동화를 골라야 한다.) 단 한 문장이라도 내 마음에 닿는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테니까.
버지니아 울프는 런던을 걸으며 든 생각을 기록한 글(거리의 기억: 런던 탐험)에서, "세상에 있는 책의 수는 무한하다. 우리는 얼핏 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잠깐의 대화와 번뜩 스치는 깨우침을 뒤로하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우리가 바깥 거리에서 스치는 단어 하나를 포착하며 그 문장으로 인생을 직조할 수 있기를 기대하듯이……."라고 했다. 단 한 문장이라도, 잠깐 보았지만 특별하게 다가온 그 문장이 나의 생각에 변화를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경험이 아닐까.
다음에 그 책을 담아올 수 있도록, 캐리어에 책 한 권 들어갈 정도의 여유를 남겨두어야겠다.
참고
델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문예출판사 (2006)
레딩 감옥의 노래, 오스카 와일드, 쿠쿠 (2018)
북숍 스토리, 젠 캠벨, 아날로그 (2017)
세계서점기행, 김언호, 한길사 (2016)
영국 서점 워터스톤스의 위기 탈출, 채널 예스 http://ch.yes24.com/Article/View/32320
해처드 서점 홈페이지 https://www.hatchards.co.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