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다큐드로잉 26
※ 이 글은 수정·보완되어 2025년 11월25일 출간된《베이비부머, 네 겹의 시간을 걷다》(루아크 펴냄)에 수록되었음.
1.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요즘엔 흔히 ‘반장’이라 부르지만, 그때는 ‘급장’이라고 했다. 나는 방과 후면 친구 한두 명과 함께 급장의 집에 자주 놀러 가곤 했다. 텔레비전을 비롯해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한참을 놀다 보니 그날따라 많았던 숙제가 마음에 걸렸다. 그만 가겠다고 했더니, 급장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내일 자신이 숙제 검사를 할 테니, 아무도 모르게 봐주겠다는 것이었다. 더 놀다 가도 된다는 그 말은 달콤한 유혹이었고, 나는 썩 내키지 않으면서도 결국 그 제안에 넘어가고 말았다.
다음날, 급장이 말한 대로 야구부를 지도하느라 바쁜 선생님을 대신해서 급장이 숙제를 검사하게 되었다. 급장은 자리를 돌며 급우들의 공책을 일일이 살펴보며 숙제를 해오지 않은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내 차례가 왔을 땐 내 공책을 살펴보는 척하다가 약속대로 그냥 지나쳐갔다. 나는 잠시 긴장했지만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후 들어온 선생님에게 숙제 안 한 급우들의 명단이 전해졌고, 선생님은 자신의 직무 유기를 벌충이라도 하듯 그 급우들을 향해 과도한 체벌을 행사했다.
2.
2023년 2월 ‘50억 클럽 무죄 선고’라는 희귀한 일이 벌어졌다. 한 전직 검사가 막대한 개발이익을 챙긴 일당에게서 아들의 퇴직금이라는 명목으로 50억 원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에 대해 1심 법원이 무죄를 선고한 일을 말한다. 이 판결은 2010년의 ‘버스 기사 800원 유죄 선고’와 비교되면서 많은 국민의 공분을 샀다. ‘버스 기사 800원 유죄 선고’란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버스 기사에 대해 법원에서도 해고가 정당하다고 판결한 일을 말한다. 이렇듯 약자라는 이유로 억울하게 피해를 보고 강자라는 이유로 부당하게 혜택을 보는 일이 거듭될수록 원망스럽게 떠오르는 용어가 바로 ‘법 앞의 평등’이다. ‘법 앞의 평등’은 특권의 정 반대편에 있는 용어다.
세계 최초로 ‘법 앞의 평등’을 규정한 법 조항은 1791년 9월 프랑스 ‘제헌의회’에서 발표한 프랑스 인권선언(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6조다. “모든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므로, 그 능력에 따라서, 그리고 덕성과 재능에 따른 차별 이외에는 평등하게 공적인 위계, 직위, 직무 등에 취임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1948년 정부 수립 때부터 대한민국 헌법에도 당당히 올라 있다. 11조 1항에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어쩌면 이 용어는 민주공화국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막중한 무게를 지닌다. 하지만 한 정치인은 이 용어를 “법은 (만인이 아니라) 만 명에게만 평등하다”라고 비꼬기도 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와 ‘유검무죄 무검유죄’라는 말도 결국에는 이 ‘법 앞의 평등’을 조롱하는 용어다. 언제부터 ‘법 앞의 평등’은 꼬리표처럼 의문부호가 달린 수상한 용어가 되었을까?
3.
알고 보면 ‘법 앞의 평등’이라는 구절은 프랑스혁명 당시 처음 등장할 때부터 기만의 언어였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 부르주아지가 처한 딜레마적인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 혁명사의 세계적인 권위자 알베르 소불의 대표작 『프랑스 혁명사』와 『프랑스 대혁명』의 길 안내를 받으며, 혁명의 뜨거운 열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프랑스혁명은 한마디로 상업과 무역 또는 법조계 등 전문직에 종사하며 부를 쌓은 부르주아가 제1, 2 신분 중 특히 귀족의 특권을 없애고 자신들의 재산과 자유를 유지‧확대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당시 부르주아는 특권층인 성직자와 귀족에 이어 제3신분으로 ‘전국신분회’(‘삼부회’라고도 함)를 구성하는 평민의 상층부에 속했다. 인구 비율로 보면 특권층이 2~3퍼센트였고, 나머지 97~98퍼센트가 평민이었다. 평민 계급은 부르주아 말고도 ‘상퀼로트’로 대표되는 중간층과 민중으로 통칭되는 하층으로 구성되었다. 비율로는 부르주아와 상퀼리트는 극소수였고 민중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계몽사상과 전문지식으로 무장한 부르주아가 제3신분 전체를 대표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일보다 자신들의 재산권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강화하는 일을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는 점이 문제였다.
이렇듯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 놓인 당시 부르주아는 딜레마에 빠졌다. 우선 부르주아는 자신들의 재산과 소유권을 지키려면 귀족의 특권을 없애야 했지만,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역풍을 맞아 자칫 왕정복고와 같은 반동적 상황이 벌어질까 봐 두려워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자신들만의 힘으로 특권을 혁파하기 어려웠으므로 민중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다. 결국 부르주아지는 위로는 귀족, 아래로는 민중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민중의 동참을 이끌어낼 만한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혁명의 과실을 자신들만 독점할 방도를 찾고 싶었다.
4.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제헌의회는 혁명의 명분으로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위키 백과’에 따르면, “계몽주의와 자연법사상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이 선언은 프랑스혁명의 핵심으로, 자유와 평등, 종교, 출판 결사의 자유 등 인간의 천부적 권리는 장소와 시간을 초월하여 보편적임을 선언하였다”라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이렇듯 부르주아는 이 선언으로 명분을 챙겼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특권층인 귀족의 반동을 무마하고 민중의 지분 요구를 피하기 위한 별도의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부르주아가 귀족을 무마하기 위해 내놓은 카드는 귀족과의 타협이었다. 제3신분 대표인 부르주아 대다수는 법률가로서 영주의 권리를 개인의 정당한 소유권으로 간주했으며, 이를 강제로 폐지한다면 부르주아 신분마저도 위험에 빠질 것으로 판단했다. 귀족과 부르주아는 모든 봉건적 권리를 돈으로 교환될 수 있도록 타협했다. 결과적으로 특권계급은 그들의 재산을 전적으로,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빼앗기지 않게 되었다. 소불은 부르주아와 귀족 간 타협의 결과에 대해, “이는 귀족들이 누리던 권리가 대부분 실질적으로 보존된다는 것을 뜻했다. 농민들은 예속에서 벗어났으나 그들이 농사짓던 땅을 예속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즉 되사기의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에 소농들이 되사기를 통해 토지로부터 해방될 수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다음으로 부르주아가 민중의 지분 요구를 피하려고 찾아낸 방안은 인권선언 중 몇 개 조항에 딸린 제약조건이었다. ‘법 앞의 평등’을 규정한 6조를 다시 살펴보자. “모든 시민은 법 앞에 평등하므로, 그 능력에 따라서, 그리고 덕성과 재능에 따른 차별 이외에는 평등하게 공적인 위계, 직위, 직무 등에 취임할 수 있다.” 여기서 ‘~이외에는’이 바로 제약조건이다. 부르주아 계급 특유의 근엄하고 정중한 말투로 표현해서 그렇지 실은 능력과 덕성과 재능이 부족한 민중계급 앞에 드높은 장벽을 쳐놓은 것이다. 너희들은 능력도 덕성도 재능도 없으니 불평등을 감수하라는 뜻이었다. 법 앞의 평등이란 곧 법 앞의 불평등이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5.
제약조건이 6조에만 있지는 않았다. 1조는 “사람들은 자유롭게 그리고 권리에서 평등하게 태어나며 또 그렇게 존속한다. 사회적 차별은 오직 공동의 유용성에 입각할 때만 가능하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는 ‘오직 공동의 유용성에 입각할 때만’이 제약조건이다. ‘공동의 유용성’이라는 주관적 기준에 못 미치면 사회적 차별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연 듯이 말하고 있지만 실은 그 세상이 ‘공동의 유용성’ 여부를 가늠하는 ‘해석 권력’의 손아귀에 맡겨진 셈이다. 또한 13조는 “그것(공동의 기여)은 모든 시민에게 그들의 능력에 따라 평등하게 배분되어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여기서는 ‘능력에 따라’가 제약조건이다. 기여의 평등한 배분이 절대적으로 보장된 듯이 보이지만 실은 능력의 정도를 판단하는 ‘해석 권력’에 맡겨져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부르주아 계급을 대변하던 미라보 백작조차 “이러한 주의‧제약‧조건들은 거의 도처에서 권리를 의무로, 자유를 속박으로 대체하고 여러 측면에서 입법의 가장 거추장스러운 부분까지 잠식하여 인간을 자연 상태의 자연스러운 존재가 아니라 국가와 사회에 속박된 존재로 만들었다”라며 비판했다. 바로 그 제약조건들 때문에 ‘법 앞의 평등’은 물론 ‘자유와 평등의 천부인권’과 ‘기여의 평등한 배분’이 모두 기만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다. 소불은 이렇게 말한다. “사실상 1789년에 부르주아가 권리의 평등이라는 원칙을 내세운 것은 단지 특권계급의 특권을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민중에 대해서 부르주아는 법이라는 관점에서 이론적인 평등만을 문제시할 뿐이었다.”
6.
부르주아는 혁명력 3년(1795년)에 채택한 헌법에서 또 하나의 특권세력이 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 헌법에서 부르주아지는 인권선언 1조를 폐지하고 모든 유색인은 시민권을 갖지 못한다고 결정했으며, 노동자들의 결사와 파업을 금지했고 재산이 있는 사람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했다. 이에 대해 소불은 “출산에 따른 특권을 금전에 기댄 특권으로 바꾼 셈”이라며, “새로운 국가는 단지 새로운 지배계급의 특권을 보장하는 부르주아 국가에 불과했다”라고 평가했다.
프랑스혁명은 부르주아가 귀족에게서 빼앗은 특권을 자유와 평등의 이름으로 모든 인간에게 고루 나눠주려고 일으킨 혁명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특권의 주인이 귀족에서 부르주아로 바뀐 사건이었다. 그러니 ‘법 앞의 평등’이라는 말은 태어날 당시부터 이미 ‘법은 만인에게만 평등하다’ 라거나 ‘무전유죄·유전무죄’ 또는 ‘무검유죄·유검무죄’라고 해석될 운명을 안고 있었다.
7.
“노예들을 방석 대신 깔고 앉는/ 옛 모로코의 왕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돌아온 날 밤/ 나는 잠을 못 잤다. 노예들의 불쌍한 모습에 동정이 가다가도/ 사람을 깔고 앉는다는 야릇한 쾌감으로 나는 흥분이 되었다./ (...) 노예들이 겪어야 하는 원인 모를 고통에 분노하는 척해보다가도/ 은근히 왕이 되고 싶어 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 ”
마광수는 ‘나는 왜 순수한 민주주의에 몰두하지 못할까’라는 시에서, 법 앞의 평등과 특권 사이에서 갈등을 겪고 있는 현대인의 혼란스러운 심정을 이처럼 솔직하게 드러낸 바 있다. 이는 단순히 윤리적이고 규범적인 판단을 넘어서는, 고도의 실존적 문제일 것이다. 자유와 평등과 인권이 강조되는 이 시대에도 특권을 원하는 인간은 여전히 존재한다. 어쩌면 특권에 대한 열망은 시대를 초월한 인간의 본성인지도 모른다.
8.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느 날, 나의 뒷배였던 급장이 숙제 검사를 하던 그 교실로 돌아가 보자. 나는 급장의 최측근으로서 모든 급우에게 적용되어야 할 숙제의 의무로부터 면제되었던 것인데, 그때 내가 잠시나마 누렸던 것이 바로 소수의 계층에게만 적용되는 특별한 권리 곧 특권이었다.
그런데 그때 나를 돌아보며 야릇한 미소를 보내던 한 급우가 있었다. 그는 필시 급장과 나의 부당한 협잡을 눈치챈 듯했다. 그가 만약 선생님에게 그 사실을 일러바치면, 그래서 선생님이 느닷없이 숙제 검사를 다시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르긴 몰라도 숙제를 안 한 다른 급우들보다 두세 배 더 심한 곤욕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그때 내가 누린 특권이 얼마나 부실한 전제 위에 서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그 급우의 미소를 보는 순간, 특권의 화려한 마차에 올라탄 오만함과 과도한 체벌을 가까스로 모면한 안도감 사이를 오가며 내 감정은 몹시 흔들렸다. 그 이후에도 나는 그 오묘한 감정에서 오랫동안 헤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 사건을 통해 특권을 통해 누릴 수 있는 달콤한 혜택과 함께, 특권으로 인해 초래될 쓰디쓴 결말을 체득하게 되었다.
내가 그날 그 교실에서 배운 것은 특권을 추구하기보다 그것 없는 삶을 택하는 편이 훨씬 자유롭다는 사실이었다. 그 이후 사회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특권을 누리려 하지도 않았고 누구에게 특권을 주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특권을 과시하는 인간과는 거리를 두었고 특권을 행사하는 인간을 적대하며 살아왔다. 이는 특권의 쓰디쓴 결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특권 없는 삶이 훨씬 더 자유롭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특권의 반대편에는 평등도 있었고 자유도 있었다. 다시 말해 특권은 민주주의의 양대 축인 자유와 평등의 공적이라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