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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강나무 Sep 08. 2023

설화 다시 읽기: <바리데기>에 나타난 용서와 화해

불라국 임금인 오구대왕과 길대부인은 늦게 딸을 여섯 낳았다.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걱정하던 차에 지나가던 스님의 말대로 정성으로 불공을 들이고 일곱째를 낳았다. 그러나 낳은 자식이 또 딸이라는 말에 오구대왕은 그 아이를 갖다 버리라고 명하고, 길대부인은 ‘바리데기’라는 이름을 써서 아이의 품속에 넣어주고 깊은 산속에 버린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바리데기를 산신령이 거두어 기른다. 산신령은 바리데기에게 세상의 이치와 삼강오륜을 가르친다. 자식을 버린 오구대왕은 죽을병에 걸리고 이를 고칠 수 있는 약은 서천서역국의 약수뿐인데, 여섯 명의 딸들이 모두 약을 구하러 가기를 거절하자, 약수를 구하기 위해 십오 년 전에 버린 바리데기를 찾는다. 


부모는 자신을 버렸지만 바리데기는 그 부모를 살리기 위해 죽음의 길로 떠난다. 서천서역으로 가는 도중에 바리데기는 본인의 일이 아닌 낯선 사람에게 무심하고 냉정한 사람들을 만난다. 자신에게 냉정하지만 바리데기는 선뜻 그들에게 손을 내밀고 기꺼이 그들을 도와준다. 드디어 바리데기는 약수를 지키고 있는 동대산 동수자를 만나지만 약수를 얻기 위해서는 그와 결혼해 아들 삼 형제를 낳아야만 했다. 


바리데기는 아들 삼 형제를 낳고 마침내 약수를 구해 오구대왕을 살려낸다. 다시 살아난 오구대왕은 바리데기가 낳은 삼 형제에게 자신이 낳지 못한 아들에 대한 소망을 투영하여 보듬는다. 바리데기의 소식을 듣고 여섯 공주와 여섯 사위는 모두 도망간다. 바리데기는 이들 모두를 사랑으로 불러 모은다. 


이제 오구대왕과 길대부인은 견우와 직녀가 되고 일곱 자매는 북두칠성이, 바리데기의 아들 삼 형제는 삼태성이, 사위 여섯은 조모 사태성이 된다. 이때부터 바리데기는 서럽게 죽은 귀신들을 오구풀이하여 극락왕생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엄부자모’라는 말은 한국 문화에서 자식에 대한 부모의 태도에 대해서 말을 할 때 자주 인용되는 말이다. 아버지는 자식을 엄하게 가르치고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으로 보살펴야 한다는 말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자식을 양육할 때 이러한 부모의 태도가 옳거나 그르다는 일반적인 생각과 관계없이 어찌 되었든 부모는 자식을 양육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  


<바리데기>의 초반부에 오구대왕과 길대부인은 딸 여섯을 낳았지만 자식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전통적으로 남아선호에 대한 사회적 통념을 고려해 볼 때 오구대왕과 길대부인의 태도는 훌륭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일곱 번째 자식 역시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오구대왕은 분노에 차서 자식을 버리라고 명한다. 말이 버리라는 것이지 갓 태어난 아이를 내다 버리라는 것은 죽이라는 말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 부분에서 오구대왕의 아들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큰지를 읽을 수 있다. 자신의 욕망이 채워지지 않은 아버지는 그만큼의 분노를 일곱 번째 딸에게 투사한다. 바리데기라는 이름도 길대부인이 아기를 버리면서 순간적으로 떠올려 지은 이름으로 보인다. 부계사회인 우리나라에서 바리데기는 아버지의 이름도 받지 못하고 태어나자마자 아버지의 의지와 어머니의 손으로 버려진다. 


자식을 버린 죄로 오구대왕은 죽을병에 걸리고 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은 저승에 있다. 정성으로 기른 여섯 딸들이 아버지에 대한 효를 거절했을 때, (작품 속에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오구대왕과 길대부인은 아마도 바리데기를 버린 벌을 이중으로 받는다고 볼 수도 있겠다. 딸이라는 이유로 자식을 버리고 십오 년이 지나서야 그 딸을 다시 찾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저승으로 가서 아버지를 치료할 약수를 구해올 사람이 필요해서였다. 그 사실을 아는 바리데기의 마음이 얼마나 착잡하고 상처를 받았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산신령이 바리데기를 데려와 기를 때 그가 가르친 것은 충과 효와 열을 강조하는 ‘삼강오륜’이다. 바리데기는 딸(또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받은 상처를 곤란에 빠진 부모(또는 사회)에게 보복하기보다는 부모의 말을 받들고, 여기에 더하여 동수자를 만나 여성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면서 아버지의 약을 구한다. 자신이 배운 삼강오륜의 효와 열을 충실히 이행한다. 


바리데기의 이러한 행보는 당시 여성에 대한 사회적 횡포를 그대로 내면화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리데기가 단순히 사회적 통념을 내면화했다면 이야기의 결론은 달랐을 것이다. 아버지와 동수자를 구원한 바리데기는 여성에게 폭력을 구가하는 아버지의 나라가 아닌 하늘의 신이 되어 ‘서럽게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넋을 좋은 곳으로 인도하’는 일을 하게 된다.  


<바리데기> 신화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은 용서와 포용이다. <바리데기>를 읽으면서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 떠올랐다. 리어왕은 오구대왕처럼 남아선호 때문에 막내딸을 버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막내딸이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모자식 간의 인연을 끊는다. 이러한 리어왕의 태도 역시 부모로서의 자질을 의심스럽게 만든다. 부모에게 버려진 바리데기와 코딜리어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버려질 당시의 나이와 그 이유이다. 


코딜리어는 아버지가 준 고통에 힘들지만 남편과 함께 갈 곳이 있으며 아버지와의 갈등에서 발생한 고통이 성별과는 관계가 없고 또 감당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리데기는 갓 태어나 혼자 힘으로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이고, 부모와의 관계에 의해 발생한 문제 때문이 아니라  단지 ‘여자아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방적으로 부모에게 버림(이는 죽임과 다르지 않다)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부모와 자식을 이은 천륜을 거부한 리어왕은 믿었던 다른 두 딸에게 버림을 받고 비참하게 죽는다. 바리데기가 사회적 통념을 내면화했다면 이야기의 결말은 『리어왕』과 같지는 않더라도 비극적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바리데기> 신화는 아버지로 대변되는 사회의 폭력에 대응하여 비극적 결말을 끌어내기보다는 용서와 화해로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결론으로 끝이 난다. 물론 리어왕의 이야기가 서양의 모든 문화적 현상을 대표하는 이야기는 아니어서 이 이야기 하나로 비교하는 것은 성급한 단정이 될 수도 있겠지만,  <바리데기> 신화에서 볼 수 있는 우리 문화의 특징적 요소는 대립과 처벌이 아닌 용서를 통한 화해의 중요성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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