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투게더 왕가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의 마지막 탱고

by tout va bien


영화의 20분이 지난 후 Fai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려는 시도를 수락한다. 그것은 흑백에서 칼라로 갑작스럽게 이어지면서 영화 그 자체가 제로에서 다시 재출발하는 것이다. 제로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모두 완전히 변화시키기를 원하는 것이며, 관계를 더욱 잘 유지하기 위하여, 어떤 것이 완료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미완성은 어느 정도 왕가위 스타일의 주춧돌이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처럼 Happy Together는 거의 3시간 가량 지속시키기 위하여 예견된 영화의 침전물이며 그 이야기의 많은 면(조각)들은 희생되었다. 영화작가의 실천을 구성하며 성취하기에 어려운 이 난점이 이 이야기 속에 풍부하게 새겨진다. Happy Together는 어느 누구도 마지막 단어를 기입하길 원치 않는, 어떤 말다툼이나 주먹질도 끝맺기에 이르지 못하는 한 이야기를 그린다. 더불어 부차적으로 보다 작은 양식 위에서 정확하게 역전된 움직임에 있는 두 번째 이야기는 Fai와 그의 젊은 직장동료 Chan사이에서 관계의 형식을 취하는데 이르지 못한다. 이 두 번째 이야기는 상실로서 그리고 연기된 만남으로서만 이루어 질뿐이다. 마치 격정을 억누르는 심한 오열을 나중에 아주 멀리서만 들을 수 있을 뿐인 녹음 메시지처럼. 이 이중적인 타성(무기력)((하나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하나의 이야기는 시작하지 않는다.))을 이해하기 위하여 시나리오는 최소한의 드라마틱한 구조를 차용했다: 어떠한 서술적인 고리도 인과관계에 따라 연결되거나 시퀀스들 사이에서 그들을 연결하지 않는다. 동일한 장면들이 여러 번 다른 각도에서 다시 연기되었으며 반면 갑작스런 생략이 노골적으로 역전된 상황을 보여준다. 이야기(서술체)는 어떤 진전보다는 때때로 임의적인 배열블록의 병치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본질적으로 분리 적이며, 선형적이 아니며 약간은 입체적이다. 비록 힘들의 관계가 끊임없이 시소를 탈지라도 이 커플의 이야기는 단절된 선으로 이루어진 전개에 따라서 신경증 적인 소유의 욕구와 건드릴 수 없는 회한의 동일한 동기에서 반복적으로 그리고 제자리걸음으로 진행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자리걸음은 어떤 곳으로 인도됨으로서 끝난다: 우리가 예상치 못한 단절이 뜻밖에 일어나고 어느 누구도 어떤 사건이 그의 갑작스런 상황을 정당화시키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점에서 Happy Together는 아마도 시간의 재현에 대한 왕가위의 가장 섬세한 영화이다. 그것은 여전히 모든 의미에서 폭발하는 시간의 파편(중경삼림)을 포함하지만 그러나 또한 그것은 지속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이른다. 한 커플과 한 남자를 처음으로 촬영하면서(교묘하게 엮여진 궤도에 있는 인물들의 다양성이 아닌), 감독은 그의 영화에서 그때까지는 가장 낯선 시간의 차원에 가장 가깝게 붙어 서있다: 흐름. 영화의 아름다움은 그것을 관통하는 이 이중적인 속도에서 발견된다: 모든 것이 끝없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의 동선, 거기에서 인물들은 좀더 나은 후퇴만을 위하여 전진할 뿐이지만( Astor Piazzola 탱고들의 박자에서처럼 완벽하게 동시에 일어나는)그러나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것이 그의 결말을 도모하고 그것으로 분해되는지 보여주도록 구성된 은밀한 또 하나의 선이 있다. 매우 시각적인 방법으로 시간을 조종하기 위하여 이 영화는 영화의 모든 기법들의 에세이를 만든다: 정지화면(매우 아름다운 포옹장면에서처럼 정지화면은 Fai와Chang이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수 없는 것을 표현하며 그들이 서로 헤어지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느린 화면, 고속화면(마을, 밤, 그리고 이어지는 자동차 불빛, 이제부터는 왕가위 영화의 서명이 되는 이들 이미지들), 지각할 수 없는 편집효과(난간 안에 쓰러진 Po-wing과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사라지는 동일한 프레임에서의 매우 짧은 두 장면사이의 놀라운 일치), 그러나 또한 지속되는 많은 장면들, 사물들의 유기적인 지속의 순수한 녹화와 잠복의 순간들.

만약 지속을 기록하는 이러한 방법이 왕가위의 작품 안에서의 혁신이라면 그것은 이번에는 시네아스트에게는 값비싸게 정제된 시간의 더미들이 그들에게는 저항적인 재료를 만난다: 인물들의 성격형성(우리가 보았던 서술체가 거기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만큼 더 예기치 못한)에 대한 육감적이고 고전적인 작업. 이전의 영화들 안에서 인물들은 도상들에, 꼭두각시들에 속해있다. 그들의 육체는 물론 극단적으로 자극적이지만 무엇보다도 표면적이었다. 유일하게 피부가 시네아스트를(약간은 Sternberg의 방식으로) 흥미롭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Nos annexes salvages에서의 섬세한 조명구성의 효과 아래 반짝이는 Leslie Cheung이나 Ashes of Times안에서 Magie Cheung의 대리석 같은 백색을 기억하고 있다. 여기서 반대로 육체는 살아있는 기관이거나 더욱이 단지 마법 적인 혹은 풍자적인 페티쉬가 된다. Fai와Po-wing은 심리적인 사실적 농도에서 혜택을 얻고 약간의 장면이 커플의 육체적인 친밀함을 강한 방법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단지 sex에 대한 것만은 아니고(거기 섹스가 있고 불안과 고통사이의 급격한 도약의 하나인 빼어난 도입부의 장면들에서 거기로 다시 돌아오지 않기 위하여 그 문제를 해결했다) 타인의 육체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될 그자신의 또 다른 부분인 진정으로 친밀함에 대한 것이다. 영화는 친밀한 의식들을 되풀이한다: 연인들은 서로 보살피고 서로 닦아주고 서로 먹을 것을 준비하고 다른 쪽이 피웠다 남겨 논 담배꽁초를 피우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육체적으로 전적인 유사함의 동일한 운동 속에서 서로를 때리기도 한다. 왜냐하면 인물들은 이점에서 생생하며 근접해있기 때문이며 그들에게서의 시간의 작업은 예외적으로 촉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위대한 불꽃제조자의 미쟝센의 추상적인 시간성은 아주 단순하게 인간적인 시간에 반대한다. 감지되지 않는, 국한시킬 수 없는 Fai를 변화시키는 어떤 것이 생산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는 더 이상 그를 스쳐 지나가는 시간의 흐름 안에서 뒤흔들린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다. 그는 하나의 주기에서 떨어지고 시간과 그는 얼마간 화해한 것처럼 보인다, happy together. Po-wing에 대하여, 그의 소원은 이루어 졌지만 그러나 슬프고 잔인한 방법으로 이루어 졌다. 외톨이가 된 그는 예전에 함께 살았던 집을 어슬렁거리고 그의 지난 관계의 잔해 속에서 눈물을 흘린다. 그의 뒤에서 운명의 고약한 아이러니처럼 시계가 23.59에서00.00으로 지나간다. 그는 제로에서 다시 출발하기를 원했고 그리고 이제 단지 영점에서의 제로, 완벽하게 쓸모 없는 제로, 모든 것 위로 드러난 제로에 서있다. 절대적인 닫힘(방의 패쇄공포적인 네 개의 벽)에서 무한의 거대함(모든 왕가위 영화의 특권적인 공간으로서 전체적인 지구, 홍콩을 경유하여 우슈이야에서 타이페이로)으로 지나면서 더 복잡한 공간의 순환들은 엉클어진 시간적인 그물 망들에 연결된다. 그들의 비자를 받는 여권의 클로즈업에서 시작하는 이 영화에서 이주의 행렬이 많은 문제가 된다(등소평의 죽음과 함께 촬영당시 동시대의 정치적 현실을 신중하게 언급하고 있는 영화를 홍콩반환의 불안한 절박감과 함께 연결시킬 수도 있는). 그러나 거기에선 단 한 장소에 결코 머무를 수 없는 이미지 그 자체일 뿐 그 이상의 이주는 아니다. 많은 장면들이 여러 번 되풀이하여 사용되었고 마치 영화가 우리에게 처음으로 보여주는 이구아나 폭포의 낙수처럼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처럼 한 시퀀스에서 다른 시퀀스로 반복되었던 반면 인물들은 그들을 기다릴 수 없었고 나중에 Fai의 관점으로 되돌아온다. 이 탁월한 장면은 모든 위치설정에서 자유로이 영화 위로 떠다니고 그것을 가로지른다. 왜냐하면 공간들이 나누어진다면 그것은 시간보다는 덜 불가역적인 방법에서이다. 그들은 또한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서로 끼워질 수 있다. 이 섬세한 시공간의 변증법은 실지로 Fai의 두 연인들 사이에서 구현된다. 먼저 임의성, 덧없음, 위로할 수 없음 속에서, 기억들의 포로: Po-wing은 냉혹하게 파괴하는 시간의 편에 있다. 반대로 Chang과의 관계는 공간의 문제들에 참여할 뿐이고 그들은 훨씬 수월하게 해결될 수 있다: Fai와Chang은 지구의 구석구석에서 서로와 엇갈리기(하나가 Buenos Aires로 돌아올 때 다른 하나는 타이페이에서 그를 찾는다)를 계속하지만 결국에 그들은 그들이 서로 다시 만나게될 것을 알고 있다. Chang은 게다가 아주 특이한 방법으로 공간을 통제한다: 극도로 섬세한 청력덕택에 그는 그로부터 멀리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들을 수 있고 바로 그것으로써 거리들을 무력하게 만든다. 물론 인물들이나 감독에게 공통적인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욕망은 단지 지리학적인 이동에 의해서 단번에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Po-wing과Fai는 그들의 나라에서처럼 아르헨티나에서도 서로 갈라졌다. 그리고 왕가위에 의해서 찍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지독히도 홍콩과 닮았다. 어떤 장면은 게다가 괴상하고 시적인 방법으로 하나는 단지 또 다른 하나의 표리일 뿐이라고 말한다(우리는 그 이미지에서 차의 덮게 가 아래로 향한 자동차들의 행렬을 본다). 다른 곳을 발견하기 위하여 비록 아주 멀리로 장소를 옮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제로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시간의 작업이전에)이나 아무 곳에서건(Chang이 우슈이아에서 발견하는 세상의 끝이나 이구아나의 폭포수)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러나 결국 거기에서 그 자신만을 만날 뿐이다. 가장 나은 경우로서 거기에서 약간 호전되고 진정된 Fai를 위한 것처럼. 그것은 정확하게도 자신의 것이 아닌 이야기를 하기 위하여 세상의 끝으로 떠나 결국은 그의 영화의 정수에 도달하는 왕가위에게 일어난 일이다. 그는 이전 작품들에서 획득했던 모든 것 (진정한 형식의 발명, 순수하게 영화적인 시학의 섬광 같은 감각, 현대적이며 다채로운 광채를 띤 조형적인 세계)들을 한 영화 안에 모으는데 이르며 감정의 격앙을 영화 안에서 최초로 그들을 사출 시킨다. 감정에 대한 아주 위대한 영화들처럼 Happy Together는 단지 감성적일 뿐만 아니고 또한 점진적으로 잔인하고 야비하며 가혹하다. 영화의 고공활공과 동시에 사랑스런 수사학의 뼈에 가장 가까운 분석적인 저공비행에서 이 영화는 추상과 구체, 공들임과 초고, 우수와 취기, 우리를 닮은 슬픈 이야기의 바닥 없는 우울과 형식적으로 전대미문의 불꽃놀이 앞에서의 환희 사이에서 기적적이고 깨지기 쉬운 이 균형 점을 건드리고 있다.



Dernier tango a Buenos Aires

『Happy Together』 de Wong Kar-wai

par Jean-Marc Lalanne

【카이에 뒤 씨네마 519호】

작가의 이전글뱀파이어, 이미지에 관한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