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르노가 들려주는 노르망디 왕국 이야기 13화
[대문 사진] 파리를 수호하는 외드 백작
그렇지만 885년 7월 바이킹들은 다시 세느 강에 나타났습니다. 요새를 방불케 하는 견고한 다리들이 설치된 솜므 지방과 에스꼬 지방을 뚫고 바이킹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아흐슈 다리는 그들의 공격을 받자마자 견디지 못하고 결국 바이킹들에게 점령당했죠.
“11월에 노르망디 인들은 우아즈 지역으로 침투했다”라고 「생 바스트 연대기」는 전합니다. “그들은 퐁투아즈 마을을 목표로 했으며 이를 파괴”했죠. 그러나 11월 24일 파리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바이킹들은 그들의 우두머리 가운데 한 사람인 지그흐리오르라 여겨지는 ‘지그프리두스’가 부르고뉴를 얻기 위해 협상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렇지만 거절당하고 맙니다.
호베르 르 호르의 아들인 파리 백작 외드와 고즐랭 주교는 분명컨데 상당히 과장된 것이긴 하나 바이킹 선대의 규모와 그 방대함에 놀라지 않았습니다. 사실 생 제르맹 데 프레 수도원의 수도사인 아봉은 몇 년에 걸쳐 이 사건을 글로 남겼죠. 그 자신이 목격한 사건을 장시 「파리 시 전투 (Les batailles de la ville de Paris」에서 “7백 척에 달하는 커다란 배들과 천여 척의 작은 배들”이란 표현으로, 또한 “4만여 명의 병사들”이란 표현으로 생생히 묘사합니다. 바이킹들의 선단에 관해 묘사하기를 “파리 세느 강 하류에서 12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두 번씩이나 되풀이하여 바이킹들은 프티 퐁(작은 다리)의 컨트롤 타워를 점거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실패로 돌아가자 바이킹들은 도성을 공략할 것을 결정하죠. 그들은 여러 개의 견고한 진지를 구축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전략적 진지가 생 제르맹 옥세루아 근처에 있었습니다.
겨울은 혹독하기만 했습니다. 첫 번째 대대적인 공세가 886년 1월 31일 시작되었고 하지만 파리 주민들은 이를 잘 견뎌냈습니다. 바이킹들은 세느 강과 루아르 강 사이의 지역에서 물자를 공급받아야 했던 관계로 봉쇄는 파리 도성 전체로 확대되지는 않았습니다.
고즐랭의 명령에 따라 앙리 드 삭스 백작이 같은 해 3월에 파리 주민들에게 식료품을 공급합니다.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던 주교는 4월 16일 사망합니다. 그의 조카인 에블이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외드 백작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습니다.
이 덕분에 외드 백작은 비밀리에 증원군을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외드는 트루아 백작인 알롬므와 함께 파리로 돌아와서는 연합작전을 펼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마침내 스칸디나비아 인들로부터 파리를 해방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부르고뉴에 머물던 뚱보왕 샤를은 886년 8월 파리 침공 사건을 접하고는 부르고뉴에서 파리까지 걸어가기로 작정합니다. 바이킹들은 두 번째로 파리 공략을 시도했지만, 또다시 농성군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죠.
황제는 군대와 함께 파리에 도착하여 몽마르트르 언덕꼭대기에 진지를 구축합니다. 9월 하순까지는 불행하게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프랑크 군대는 두 달간을 몽마르트르에서 진을 쳤으며, 이때 뚱보왕 샤를은 전투를 치르는 대신 협약할 것을 결정합니다
국왕은 바이킹들이 겨울철 내내 부르고뉴를 약탈하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죠. 3월 국왕은 바이킹들이 영구히 철수하는 조건으로 은화 700 리브르를 하사했습니다. 「메츠 연대기」는 국왕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전해줍니다. “국왕은 황제에 걸맞은 행동이나 결정을 한 적이 전혀 없었다.”
파리는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항은 무의미했습니다. 요컨대 외드의 진두지휘 아래 영웅적인 저항을 했던 파리에 비해 무능하기만 했던 왕국을 책임진 뚱보왕 샤를의 처사는 왕국을 포기하는 엄청나고도 크나큰 실수를 초래했고, 888년 오로지 국왕만을 위한 파리 백작을 다시 천거하는 사태까지 빚었습니다.
889년 바이킹들은 뇌스트리를 약탈하기 시작했으며, 가을 파리에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외드는 몸값을 지불할 수 없어 구원을 요청했죠. 「생 바스트 연대기」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바이킹들은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집결하고 있었다. 바이킹들의 한 무리는 바다를 통해 상륙했으며[3], 또 다른 한 무리는 걷거나 말을 타고 지상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들은 꾸탕스와 가까운 곳에 진지를 구축했다. 생로 숲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들은 생로를 포위 공격하기도 했다.”
「레지농 드 프륌 연대기」는 당시 바이킹들의 사기 협잡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바이킹들은 식수로 사용하던 물줄기마저 끊어버렸다. 마실 물이 없던 주민들은 그들이 내건 조건을 무조건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바이킹들이 요구한 재물들이란 재물들은 다 갖다 바친 끝에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바이킹들이 도성에서 떠나자 그들과의 신의를 지키지 않은 이가 부지불식간에 나타나 바이킹들을 어떻게 하겠다는 약속도 없이 주민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죽음을 당한 한 명이 꾸탕스의 주교였다.”
「생 바스트 연대기」는 묘사하기를, “깎아지른 절벽꼭대기에 자리 잡은 요새는 비르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곳에 들어앉았다. 그러나 그보다도 브르타뉴 인들은 용감하게 그들의 왕국을 지키곤 했다. 예를 들어 알랭 르 그랑은 렌 백작인 베랑제르와 연합해 890년 전투를 개시하여 바이킹들의 선단을 박살 냈다. 또 다른 바이킹들의 무리들 또한 같은 해 꾸에농 전투에서 대패하고 물러났다. 바이킹들이 세느 강을 탈환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1] 1950년에 펴낸 폴 베르나르와 F. 르동의 저술 『우리의 첫 번째 역사』에서 재인용. 동판화는 개인 소장품임을 밝힙니다.
[2] 프랑수아 귀조의 『손자들에게 들려주는 프랑스 역사』에서 재인용한 것입니다. © 캉(Caen) 노르망디 박물관.
[3] 베 만(Baie des Veys)에 상륙하여 브르타뉴 왕국과 경계를 이룬 북동쪽 지역에 위치한 비르 지방으로 모여든 것을 가리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