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르노가 들려주는 노르망디 왕국 이야기 41화
[대문 사진] 로마네스크 시기에 지어진 몽생미셸 수도원 교회
새로운 권력으로 홀연 등장한 롤로는 프랑크 왕국을 모델로 취하면서 동시에 스칸디나비아 왕조의 영광을 불러일으킬 만한 국가 체계를 갖추기 위해 고심했습니다. 롤로가 처음 시도한 것은 위로는 계급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었고, 아래로는 모든 영토를 컨트롤할 수 있는 법과 명령 체계를 바로 세우는 일이었죠.
롤로를 수행하던 군사들을 일일이 마주 대하면서 롤로는 점점 루두자아할(Rúðujarl, 루앙의 왕자)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주민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프랑크 왕국에 소속된 주민들을 대하면서부터는 루앙의 백작을 계승했음을 천명하기도 했죠. 이는 자신의 권력을 안전하게 보장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롤로는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행정 체계를 아주 엄격하게 답습했습니다. 그에게로의 직접적이고도 돌발적인 지위 승계는 그럼으로써 프랑크 왕국에 속했던 주민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법과 제도
바이킹들은 바다 건너 저 너머 그들이 태어난 곳에서 하던 것처럼 그들이 제도화한 기구들을 경험 삼아 노르망디에 사법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고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확립한 최초의 노르망디 제도들에 따른 법을 제정하는 데 있어서 과오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고심했습니다.
뒤동 드 생 캉탱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롤로는 “성직자 귀족들의 입맛에 맞춘 법과 법률 조항을 받아들이고 이를 결정하자마자” 바로 제정하였습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당시의 원어로 된 스칸디나비아 법률의 역할에 대해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제정한 법률은 오늘날에도 노르망디 관습에 있어 여전히 유물 같은 효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대조적으로 바이킹들에 의해 식민지화된 또 다른 영토는 어떠했을까요? 루앙 같은 경우는 이른바 딩(Þing)이라 불렸던 스칸디나비아 식 법제도가 도외시되었습니다. 딩이란 곳은 ‘거칠 것이 없는 남자들이’ 사건을 일으키고 또한 무엇인가를 결정했던 회의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법률을 제정하고 정의를 구현하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실상 루앙의 법정은 프랑크 왕국의 법정과도 같이 판결이 재빠르게 이루어졌죠.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엘리트들은 재결권을 갖고 있었으며, 이 엘리트 집단은 처음에는 노르웨이 출신들로만 구성되었다가 후에는 새로운 노르망디 귀족집단으로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세기말에 이르러서는 그 후계자들 가운데에서 부분적으로 충원하였을 뿐, 결손 인원에 대해서는 더 이상 충원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면, 군대 조직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롤로는 스칸디나비아 왕자들과 같이 습관적으로 우두머리를 지키는 임무(hirð)를 띤 호위병에 둘러싸여 살았을까요?
개인 경호원에 대해 더 이야기하자면, 경호의 임무는 일종의 신의를 지닌 회합의 구성원들이 맡는 임무와 같았죠. 다시 말해 왕자와 신의로 맺어져 일종의 충성서약을 하고 난 뒤에는 구성원으로 입회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루앙에는 그에 관한 어떠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과연 해군(leiðangr)을 양성하였을까요? 양성하였다면 어떤 조직이었을까요? 선박들은 재빨리 건조할 수 있었을까요? 군사들은? 무기는? 식량은? 롤로가 한 시도 빼놓지 않고 해군을 배치하고 바다를 지켰다는 것에는 수긍이 가지만, 이를 언급하고 있는 문헌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11세기에 노르망디 공작이었던 너그러운 로베르(Robert le Manifique)나 그의 아들 사생아 기욤(Guillaume le Bâtard)을 통해 노르망디 공국이 정해진 시간 안에 엄청난 선단이 한 곳에 모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 두 인물은 모두 영국을 침공하기 위해 선단을 구성했던 노르망디 공작들이죠. 전자는 훼깡을 출발하였지만 폭풍을 만나 좌초하고 말았습니다. 기욤 드 쥬미에쥬에 따르면, 이때 로베르는 저지 섬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후자는 1066년 마침내 영국을 정복하고 최상의 만족감에 젖었습니다. 사생아가 정복왕이 된 것이죠.
[1] 노르망디 교회의 기둥머리 장식에서 스칸디나비아 인들의 영향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사진은 리옹 쉬흐 메흐 지방에 세워진 성당의 기둥머리 장식이고(1090년경), 다음 쪽에 게재된 사진은 틸리 쉬흐 쇠유이 성당에 완성된 것(1130년경)입니다. 오렢(OREP) 사진.
[2] 오른쪽 사진은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제작된 창날로 바이킹들이 주로 사용했던 창이고, 왼쪽 사진은 비대칭형으로 나뉜 바이킹의 도끼날(10세기 초)입니다. 프랑수아 뒤귀에 사진. © 루앙 고대 유물 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