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경제와 사회

장 르노가 들려주는 노르망디 왕국 이야기 43화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루앙 대성당 후진에 새겨진 낙서


롤로가 세느 강 하구에 도착한 사실을 최초로 이야기한 사람은 사료 편찬관이자 역사가였던 뒤동 드 생 캉탱(Dudon de Saint-Quentin)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뒤동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루앙의 대주교 밀사로 롤로를 방문했던 자들은 롤로가 도성을 수호해 줄 것을 요청했다는 것이죠. 밀사들은 도성 안에 살고 있는 주민들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수입이 없는 상인들까지도” 보호해 줄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이 시기에조차 지방 경제가 얼마나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생 클레흐 쉬흐 엪트 조약은 상황을 저절로 바뀌게 만든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영토의 안전을 보장한 것은 물론이고 주민들로 하여금 이를 확신케 만든 쾌거였으며, 상업에 있어서도 침체한 경제를 되살리고 스칸디나비아 인들에 의한 충격파가 전해진 뒤로는 경제적 이익이 증대된 것도 사실입니다.


이처럼 스칸디나비아 인들이 뛰어난 상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루앙과 세느 강 하구 연안지역은 대번에 북유럽과 잇닿은 거대한 경제 활동의 장으로 뒤바뀌었죠. 또한 점차적으로 파리 세느 강 연안들과의 교역을 되살려나간 점도 주목됩니다.


10세기 때의 루앙. 도성의 구획은 바이킹에 의해 엄격하게 정해졌습니다. [1]


몇몇 설화 풍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루앙은 바야흐로 중요한 항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10세기 말경에 「생투앙의 기적」을 완성한 저자는 세느 강을 거슬러 파리에까지 올라간 노르망디 상인들은 그들이 갖고 온 물건들을 팔면서 파리 물건들을 되산 후에 루앙으로 돌아왔다고 전합니다.


노르망디 바깥 세계와의 교역은 11세기 초까지만 해도 북쪽을 향하여 크게 확장되었죠. 이러한 사실은 루앙을 침공했던 최후의 노르만족들이 스코틀랜드와 덴마크 서쪽 연안 일대를 오가며 교역을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분명해집니다.


요컨대 루앙에서 이루어진 무역으로 발생한 교역 품목들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바이킹들이 원정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루앙에서 끌어 모은 노획물들 가운데 일부가 노예들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볼 때, 이 노예들을 어디다 팔 것인지를 고민했을 것이란 점도 충분히 짐작이 가는 대목이죠.


이러한 사실은 여러 문헌들에 수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뒤동은 긴 검을 찬 기욤(기욤 롱그 에페)이 푸아투에 있는 자신의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남녀 노예들의 과격한 집단”이란 표현에 눈길이 갑니다.


또한 1090년경에 훼깡의 성직자가 기록한 기욤이 “훼깡의 튼튼한 요새를 다시 짓기 위해 노예들에게 명령을 내렸다”는 표현도 눈길을 끌죠. 실상 10세기 내내 루앙은 노예시장으로서의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바이킹들은 이미 그들의 가정에서 부리던 노예들을 통해 친숙하게 된 집안일을 거드는 노예들을 노르망디 지역에도 도입하였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루앙 대성당의 후진 안에 있는 회랑 벽에 새겨진 낙서(13세기경으로 추정됨). [2]


시골 주민들에 관해서는 지명에 표현된 완곡어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주민 대다수를 차지한 사람들은 식민지에 정착한 이들로서 처음으로 이 지역에 발을 디딘 사람들이거나 경작을 위해 끌어 모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토지들을 관리하던 소유주들에 관한 어떠한 기록도 찾아볼 수가 없는 관계로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노르망디에 거주하던 농부들의 공동체들은 견고하고도 유기적인 형태였을 것이라고만 짐작할 따름입니다.


돌에 새긴 목수가 사용하던 도끼 형상의 스칸디나비아 풍의 ‘손도끼’. [3]





[1] 사각형 바둑판 모양의 갈로 로만 시대에 이미 획정된 구역을 바이킹들도 주요 도심으로 활용하였습니다.


[2] 바이킹의 것으로 짐작되는 배에 선적하는 장면을 날카로운 끌로 긁은 자국. 장 르노 사진.


[3] 사비니 교회 처마 까치박공에 새긴 조각(12세기 초). 장 르노 사진.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법과 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