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르노가 들려주는 노르망디 왕국 이야기 57화
[대문 사진] 바이킹과 개 [1]
세느 강 연안의 배를 대기 쉬운 곳에 집중적으로 정주를 시도한 스칸디나비아 인들의 정착촌은 여러 양상을 띠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칸디나비아 인들은 결국 카롤링거 왕국에 동화되고 말았습니다. 프랑크 주민들은 바이킹들이 전해준 수완의 기교를 터득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이문화와의 접촉과 접목은 문화적 통합을 촉진하는 계기로 자리 잡아갔습니다.
바이킹들의 통합
식민지 건설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몇 세대에 걸쳐 스칸디나비아 인들과 프랑크 인들 간의 융합이 빠르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이는 「생 뵐프랑의 기적」에서 롤로에 관하여 기술할 때 저자가 강조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모든 태생이나 혈통을 막론하고 여러 다양한 직업과 관계없이, 또한 모든 인종과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단일한 주체로써 (공국의) 구성원(peuple)으로 통합되었다.”
바이킹들의 사회적이고도 정치적인 통합에 관하여 이후에 씌어진 노르망드 인들에 대한 관점은 1030년경에 씌어진 「연대기」를 통해 아데마르 데 샤반느가 주장한 관점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바이킹들의 종교적이고도 언어적인 통합을 상기시켜 줍니다.
“롤로는 죽었지만 그의 아들이 대신하여 똑같은 자리에서 통치를 하였다. 그는 아이였을 때 이미 세례를 받았고 프랑크 왕국 가까이 위치한 노르망디에 사는 모든 백성들 또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또한 이교도의 언어를 내던져 버리고 라틴어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바이킹들은 뇌스트리의 방언으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라틴어는 거의 쓰이지 않고 있었던 것이죠!
식민지에 정착한 일부가 그들의 아내를 데리고 왔지만, 그 후손들은 이와는 반대로 점차 프랑크 인 여자들을 아내로 선택했습니다. 세례를 받고 프랑크 인 여자와 결혼을 하였기에 바이킹의 아내는 당연히 아이들을 기르면서 자식들에게 오일 어를 깨우치게 하거나 옛 프랑스 어로 된 책을 읽혔습니다.
요컨대 동거녀(주로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여인들)의 입장을 고려해 볼 때, 10세기 내내 이루어진 노르망디로의 정착과정에서 발생한 부부에게서 태어난 아이들 역시 적출로 간주되어야만 할 여지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결합은 기욤 드 쥬미에쥬가 언급한 것처럼 ‘덴마크 관습에 따른’ 것이었지만, 그 시대에 이루어진 기독교도들의 결혼 관례에 비추어 본다면, 공작 가족의 수준에서는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면서 동시에 감탄스럽기까지 합니다.
롤로와 포파, 기욤 롱그 에페와 스프로타, 리샤르 1세와 귀노르 등 이들 부부들의 경우는 교회에서 결혼식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그들이 추구했던 관습에 따라 혼인을 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다음 세기에도 마찬가지지만, 이러한 결혼에 대하여 가혹한 처벌이 내려진 것 또한 아닙니다. 더군다나 뒤동은 포파가 귀족이었다고까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녀는 공작 가문에 속한 한 구성원이었다고 말이죠.
지배 계층은 재빠르게 스칸디나비아 엘리트 계층에 속한 몇몇 가문들로 채워졌습니다. 이들 가문들은 실질적으로는 소수이기는 했지만, 식민지화가 제대로 진행된 지역에 정착한 확실한 지배 세력이었습니다. 이들은 스칸디나비아 어로 된 이름과 함께 동시에 프랑크 세례명으로 불리기보다는 오로지 스칸디나비아 어로만 된 이름들로 불리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로 그들의 이름이 호칭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이들이기도 했습니다. 롤로의 딸 제흐로크는 세례명으로 아델입니다. 코탕탱의 영주는 투르스틴(도르슈타인(Þorsteinn)이라 불리기도 한)이었는데, 역시 리샤르라 불렸습니다. 또한 메지동의 걸출한 가문의 한 구성원이었던 스티강(스티간디(Stigandi)라 불린) 역시 오동이라 불렸죠.
몇몇 노르망디 인들은 여전히 스칸디나비아 어에서 비롯한 성씨를 사용했습니다. 사실 노르망디 지방에서 성씨와 이름에 따른 인명이 확정된 것은 15세기경이었지만, 그들은 이미 반세기 이상을 스칸디나비아 어로 된 성씨를 고집해 온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이 성씨에 따른 인명의 형태를 5, 6백 년간을 간직하였으나 성씨와 다르게 성씨 앞에 붙는 이름들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해 투스탱과 앙끄틸은 16세기 초에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들 성씨를 살펴보건대, 성씨들이 스칸디나비아 어에서 비롯하였다는 점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앙흐리(Anfrie), 앙흐레(Anfrey)는 스칸디나비아 어 아스흐리드(Ásfriðr)에서 왔고, 앙끄틸(Anquetil)은 아스케틸(Ásketill)에서, 오몽(Aumond), 에스몽(Esmond), 오스몽(Osmond)은 아스문드(Ásmundr)에서, 오주프(Auzouf), 오주프(Ozouf)는 아술프르(Ásúlfr)에서, 아스탱(Hastain), 아탱(Hatain)은 하슈타인(Hásteinn)에서, 아바흐(Havard)는 하바르드르(Hávarðr)에서, 앵귀이에(Inguier)는 잉그바르(Ingvarr)에서, 끄텔(Quetel), 케틸(Quétil), 끄티에(Quetier)는 케틸(Ketill)에서, 뚜루드(Thouroude), 트루드(Troude)는 도르발드르(Þorvaldr)에서, 토르슈틸(Torchetil), 뛰흐끄틸(Turquetil)은 도르케틸(Þorketill)에서, 토스탱(Tostain), 투탱(Toutain), 투스탱(Toustain)은 도르슈타인(Þorsteinn)에서, 투갸흐(Tougard)는 도르제드르(Þorgerðr)에서, 튀르지(Turgis), 투르지(Tourgis)는 도르질(Þorgils)에서, 튀르고(Turgot)는 도르가우트르(Þorgautr)에서, 튀르모(Turmod)는 도르모드르(Þormóðr)에서, 튀르끼에(Turquier), 튀르께(Turquet)는 도르켈(Þorkell)에서, 튀루(Turrou)는 도롤프르(Þórólfr)에서, 이베흐(Yver), 이바흐(Yvard)는 이바르(Ívarr)에서 왔으며, 이밖에도 몇몇 성씨들이 눈에 띕니다.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프랑크 성씨와 스칸디나비아 성씨는 거의 유사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택하여 호칭으로 삼았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죠. 예를 들면 앙고(Angot)는 스칸디나비아 어인 아스갸우트르(Ásgautre)에서 온 말이지만, 프랑크 어로 앙고(Ansgaud)이며, 뷔흐누프(Burnouf)란 성은 스칸디나비아 어 비요르눌프(Björnúlfr)에서 온 말이지만, 프랑크 어로 베르눌프(Bernulf)이기 때문입니다.
결혼했거나 동거했거나 간에 프랑크 여인들이야말로 바이킹들에게 미친 프랑크 문화의 영향에 따른 이문화의 수용에 절대적인 공헌을 한 셈이죠.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비록 스칸디나비아 어를 사용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들이라 할지라도 프랑크 족 여인인 어머니로 말미암아 프랑크 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또한 프랑크 문화에 동화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런 영향 관계를 통해서 확인되는 범주에서 본다면 세대가 바뀔수록 점점 더 스칸디나비아 어는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1] 홀크브라데의 삽화, 1903년 성탄절 특집호, 개인 소장.
[2] 모흐탱의 유골함에는 덮개에 룬 문자가 새겨진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주여! 애당을 도우소서. 여기 유골함을 바치나이다.” 그러나 적혀 있는 문자는 앵글로 색슨 계통이 사용하던 룬 문자입니다. © 장 르노 사진.
[3] 여기에는 스칸디나비아 인의 성씨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 센 마리팀 도립 고문서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