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학의 오늘 71화
발라드 시에 있어서 발구(跋句, envoie)는 이미 폐기된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크 루보(Jacques Roubaud)의 시에서 이러한 형태를 볼 수 있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다. 이른바 신형식주의(néo–formalisme)라 불릴만한 그 무엇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그의 시집 『홀로 깨닫지 못하는(Mono no aware)』(1973)는 이미 일본어로 143편이나 번역된 바 있는데, “인간사의 덧없음을 노래한” 애달픈 노래인 엘레지(哀歌, élégie)의 말미에서 자크 루보는 사물에 대한 미묘한 정서를 채색해 가고 있다.
별도리 없이
사람이라면 자신의 삶에 눈물 흘릴 때도 있는 법이지
(발구)
아 내가 만일 항상 그 자리에 우뚝 선
영원한 바위나 될 수 있다면
오라 이 세상의 무엇과도 같이
늙어가지 않을 수는 없으려나
나는 늘 생각하곤 한다네
위의 시는 과거의 삶으로 되돌아가고자 한 시인의 의도를 표출함과 동시에 다른 문학적 공간들을 관통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를 내비침으로써 더하여 전혀 새로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시적 표현의 궁극에 다다르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를 실감 나게 돋을새김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이러한 다양한 시적 욕망의 표출과 비례하여 쥐드 스테판(Jude Stéfan)은 『애가 선집(Élégiades)』(1993)의 한 편에서 “이미 이제는 낡고 고루해진 시적 형태로 자리 잡은 시의 절구(節句, stance)들”을 통해 ‘영원한 이별(adieu)’을 노래하고, ‘쉼표(virgule)’는 엉뚱하게도 ‘Virgul(t)es’로 표기되며, “쓰레기(시에서는 쓰레기(immodices)란 단어가 mondices로 표기됨)들로 가득 찬 들판에 / 여기저기 뒤엉켜 솟아오른 가시덤불들”에게로 뛰어들게 하는 것은 물론, “바위의 기차역” - 실제 존재하지 않는 –으로 떠나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적 표현은 나름 그만의 독특한 표현 내지는 랭보 시의 출현과 거의 맞먹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장-필리프 뚜쌩(Jean-Pilippe Tousaint)은 『욕실(La Salle de bain)』(1993)이란 기상천외한 소설에서 빗변이란 수학 공식을 과감하게 차용하는 수법을 보여주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의 소설 『욕실』에서 결국 욕실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정황은 1794년에 자비에 드 매스트르(Xavier de Maistre)가 침실 안을 맴돌며 침실을 여행하듯 낱낱이 기록해 가는 상황과 비견해 볼 때 전혀 놀라운 것은 못된다. 왜냐면 서사적 전개에 있어서 침체된 혹은 정체된 상황을 극복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어떠한 돌파구도 서사적으로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희곡에 있어서 엘렌 시수스(Héléne Cixous)는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역사를 파헤쳐 가는 일련의 작업 속에 간혹 이야기들이 서로 복잡하게 얽힌 텍스트 극들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 텍스트 극들은 서사극의 형식을 취한다기보다는 차라리 브레이트 극이 이미 시준한 바 있는 서사시의 형태로 더 근접해 간다. 엘렌 시쿠스의 『공포의 역사,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L’Histoire terrible mais inachevée de Norodom Sihanouk roi du Cambodge)』(1985)나 『인도의 꿈(L’Indiade)』(1987)를 브레이트 극과 비교해 보라.
오늘날 프랑스 문학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내가 보기로는 오늘날의 프랑스 문학은 모더니티에의 분별력을 잃은 질주 속에 허무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기보다는 문화의 축적으로부터 획득한 새로운 독창성에 근거한 포스트 모더니티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루어진 나의 분석은 앙리 메쇼니크(Henri Meschonnic)의 분석에 비춰볼 때, 그 엄정함에 있어서 훨씬 덜한 편이다. 앙리 메쇼니크는 1988년에 펴낸 『모더니티 모더니티(Modernité modernité)』에서 “현대는 모더니티 이후에도 중단 없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메쇼니크 자신이야말로 고대(때로는 고대라 일컫는 시대보다도 훨씬 더 이전의 신화의 시대)와의 일치를 이룬 하나의 완벽한 본보기일 뿐 아니라 탐구(아방가르드에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는)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서의 히브리어 문헌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그의 주석학에 대한 열의나 『시학을 위하여(Pour la poétique)』를 위한 일련의 저서들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자신 시인으로서 창의력이 풍부한 시적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 등에 비추어 볼 때, 매일 전설에서 시를 구상하고, 다시 쓰고, 고치며, “책들이 필요치 않은 책”을 쓰고자 노력하는 그의 모습은 거의 완벽한 작가의 본보기를 방불케 한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작품의 특수성에 비추어 볼 때, 서로 다른 다양성만큼이나 여러 다양한 관점들이 제기되고 있는 오늘날의 프랑스 문학에서 작품들은 서로 간에 충분한 자양이 되고 있다는 점, 또한 어떠한 한 관점에 이끌려가면서도 전혀 예기치 못한 균형을 이룸으로써 한 곳으로 정립되어간다는 점, 아울러 순간 폭발하면서도 고정되어 간다는 점 등을 특징적으로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20세기 말의 프랑스 문학은 결코 퇴폐주의의 미망에 물든 세기말 문학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야겠다. 20세기 문학은 항상 새로웠으며, 섬광으로 번쩍이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간결한 형식을 취했다는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이는 문학작품의 독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소비자에 가까운 대하소설을 읽는 이들에게나 허구의 가족사에 바탕을 둔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 이들, 또한 화려한 이야기 벽화를 감상하고자 하는 이들을 겨냥한 것임에는 틀림없다.
이러한 특징이 바쁜 독자들을 겨냥한 것이란 가설도 설득력을 잃기는 마찬가지다. 그보다는 오히려 1972년에 도미니크 드 루(Dominique de Roux)가 쓴 『즉각적으로(Immédiatement)』가 시준해 주듯이, 즉각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을 겨냥한 것일 테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문학 소비자들의 가장 예민한 취향은 바로 간결한 텍스트들을 원한다는 데 있다.
이러한 예민한 문학 소비자들의 취향에 걸맞게 씌어진 작품들을 열거하자면, 먼저 클로드 시몽의 『베레니스의 별(La Chevelure de Bérénice)』(1983)과 이보다는 훨씬 젊은 세대에 속하며 작품 경향 또한 전혀 다르지만 알랭 스베스트르(Alain Sevestre)의 『절제의 예술(L’Art modeste)』(1995)이나 작가가 “겨우 몇 쪽에 걸쳐 신화 속에 현재 삶을 패배케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가는 미셸 오흐셀(Michel Orcel)의 ‘미세 소설’ 『어떤 상승의 이야기(Histoire d’une ascension)』(1996)를 열거해야 할 것 같다.
이러한 고찰에도 불구하고 내가 쓰는 이 글의 주제인 <오늘날의 프랑스 문학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에 대한 결론이 가능치 않은 것은 아직 세기가 다 하지 않았다는 점 말고도 이러한 주제를 갖고 글을 쓰는 것에 관계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결론의 불가능을 노정하고 있었다는 점, 또한 문학의 기능에 비추어 볼 때, 문학 속에서조차 결론은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결론지을 수 없는 명제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나는 일단 이상의 결론에 만족하는 도리밖에 없다. 이 에세이를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또한 내가 원하지 않는 바대로 한 권의 책을 완결 지을 수 없음을 이미 내비친 적이 있다.
결국 이 글을 이쯤에서 끝내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서 갖게 되는 아쉬움은 이미 문학사에 편입되었거나 학문의 주요한 대상으로 자리 잡은 작가들만큼 아직도 그늘 속에 묻혀있는 나와 교분이 있는 이들, 예를 들어 친구 작가들이나 동료들, 또는 옛 친구들과 동창들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지 못했다는 점만큼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미셸 샤이우(Michel Chaillou), 베르트랑 비자쥬(Bertrand Visage), 이브-미셸 에흐갈(Yves-Michel Ergal), 도미니크 바르베리스(Dominique Barbéris), 미셸 앙드렐(Michel Hendrel), 소비 아브쉬(Sobhi Habchi), 프레데리크 베르떼(Frédéric Berthet), 장-이브 마쏭(Jean-Yves Masson), 크리스토프 데수리에흐(Christophe Deshoulières), 파트리스 디에르발(Patrice Dyerval)은 그런 점에서 나를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그들은 내가 그들 모두를 다 언급할 수 없었음을 이해할 것이며, 어떠한 평가도 그들의 재능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점까지도 헤아려 주리라 믿는다. 그들은 또한 너무 가까이에 있다 보면 상대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헤아려 줄 것이다.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독특한 재능을 지닌 작가들이며, 프랑스 문학의 행방을 예견하고자 애쓰는 지금, 1996년의 프랑스 문학에서조차 확실한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는 이들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1971년에 미셸 뷔토르(Michel Butor)가 펴낸 『공간의 독창성(Génie du lieu)』 다음으로 펴낼 두 번째 저서의 제목을 위하여 악센트를 넣어야 할 U라는 철자 위에 조심스럽게 X자가 그어진 아름다운 제목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Oû[u자 위에 x가 붙은 철자. 여기서는 표기가 불능한 상태라서 이렇게 밖에 표기할 수 없다]였다.
이처럼 시간의 운동은 불확정적인 순간을 가리킨다. 뜻밖에 닥쳐올 독창적인 작가를 준비하는 계기이기도 하며, 저기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만족하는 단순한 흥취를 느끼기 위해서도 시간은 불확정적인 순간을 향해 열려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