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193화
1882년 12월 31일 감베타가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어 다음 해 5월에는 마네가 명을 달리했다.
급속도로 병이 악화되면서 균열을 일으키던 마네의 세계는 죽음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려앉았다.
어느 누구의 장례식에 견주어봐도 마네의 장례식은 한 시대를 가름한 자의 엄중한 죽음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시신이 담긴 운구행렬이 생 루이 당탱 성당까지 이어지는 동안 거대한 군중의 물결은 대로를 가득 메우고 집집마다 창문으로 장례식 행렬을 지켜보고자 사람들이 고개를 내미는 진풍경마저 벌어졌다.
에두아르 마네의 두 형제 으젠과 귀스타브는 맨 앞에서 행렬의 앞장을 서고, 바로 뒤에는 사촌인 쥘이 따랐다. – 레옹은 어디에? – 운구 행렬은 장례식이 끝난 뒤, 다시 교회를 출발하여 장지로 향했다.
클로드 모네, 에밀 졸라, 앙토냉 프루스트, 필리프 뷔흐티, 알프레드 스테방과 테오도르 뒤레가 마네의 시신이 담긴 관을 들고 맨 앞에 앞장섰다. 수잔과 으제니, 베르트와 그녀의 딸인 쥴리가 그 뒤를 따르고, 맨 끝에는 그것도 혼자서 레옹이 운구 행렬을 뒤따라갔다.
그 뒤로는 화가 친구들이 자리했다. 몽마르트르를 떠난 운구 행렬은 당시 내로라하는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밀집한 군중들에 떠밀려 장지인 파시 공동묘지로 향했다.
마네가 사망하자마자 베르트 모리소가 부랴부랴 묘지를 불하받고자 신청하는 바람에 오직 4구의 시신만을 안치할 수밖에 없는 작은 면적에 불과한 가족묘를 불하받았다. 가족묘의 첫 주인공은 마네가 되었고 다음엔 수잔, 그리고 으젠과 베르트의 순서로 묻힐 차례였다. 그렇다면 남은 다른 가족 구성원들은? 그들은 가족이 아니라 남이었다!
슬픔에 젖은 조문객들이 파시 공동묘지로 향한 오르막길에서 잠시 멈춰 섰다가 외길로 난 길을 다 걸어 올라가서는 길들이 서로 엇갈리는 지점에서 왼쪽 길로 들어서서 길 한쪽 구덩이가 파인 곳에 마네의 시신이 담긴 관을 내려놓았다.
친구들 가운데 제일 오래된 친구인 앙토냉 프루스트는 조사를 읊는 중에 흐느껴 우는 바람에 연신 딸꾹질을 해댔다. 그가 마네의 죽음을 애도하고 나선 것은 자신이 문화부장관으로서의 자격으로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생애에 둘도 없는 친구로서 세상을 뜬 더 없는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자신의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르누아르는 흐느껴 울기만 했다. 모네는 눈물을 꾹 눌러 참았지만, 가슴속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말없이 가만있질 못하는 버릇을 지닌 졸라는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그를 말라르메가 조용히 타일렀다. 알프레드 스테방은 마네의 죽음이 너무도 슬펐던 탓에 졸라와 이야기를 나눌 기분이 아니었다.
드가가 조문객들을 향해 외치듯 말했다.
믿을 수 없으리만큼
마네는 탁월했노라.
마네의 시신이 담긴 관은 화환에 덮여갔다. 그 위에 다시 꽃송이들이 뿌려지고 여인네들이 뒤를 따랐다. 비탄에 잠긴 여자들은 마네의 관을 부여잡고 통곡했다. 마네가 사랑해마지 않던 여인들이었다. 그럼에도 에바 곤잘레스의 모습은 끝까지 보이질 않았다. 마네의 다리 절단 수술 소식을 접한 당일 에바 곤잘레스는 아이를 출산하고 그로부터 5일 만에 분만에 따른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마네는 가슴이 미어지는 심정이었다.
여러 주 동안 언론은 오직 마네의 죽음만을 기사로 다뤘다. 참으로 온당치 못한 일이기만 했다. 비록 한 인간을 애도한다손 치더라도 마네의 회화 예술은 여전히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마네의 작품은 루브르에 소장되거나 전시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뤽상부르 미술관과 오랑쥬리 미술관조차도 마네의 작품을 거부하고 나섰다! 그런 연유로 친구들과 지인들이 직접 나서서 마네의 작품을 이들 미술관에 소장은 물론이고 영구 전시해야 한다고 수 십 년간 정부와 투쟁을 벌여야만 했다.
가족구성원가운데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마네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난감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5월 말이 되자 수잔과 레옹, 으제니는 함께 살던 바티뇰 지역을 떠나 베르트와 으젠이 환대해 마지않는 그들의 집에 더부살이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은 레옹에게 있어서 너무도 굴욕적이고 창피한 일이었을 따름이다. 수잔 역시도 인생살이에 있어 거의 맞수나 다름없는 동서에게 빌붙어 산다는 것이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문제이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으젠은 그들과는 정반대로 수잔과 레옹에게 변함없는 애정을 쏟아부었다.
나날이 피륙의 올이 풀려 너덜너덜해지듯 마네 집안 역시 단단한 결속을 이루던 으제니의 주도권이 쇠약해지면서 집안 분위기도 점점 쇠잔해져만 갔다. 모친인 으제니는 좀 더 오래 살았지만, 중풍에 걸린 귀스타브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모친 역시 그렇게 애정을 쏟아붓던 장남이 죽고 나자 1년이 지난 즈음 몇 주간을 시름시름 앓다가 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시어머니인 으제니가 세상을 뜨자 수잔은 마침내 아들과 멀리 떨어진 조용하고 한가로운 곳에 살기 위해 베르트와 으젠과 함께 살던 집을 떠났다. 이후로 그들은 서로 보는 일이 없었다. 아주 특별하고도 요긴한 상황이 벌어져 그들이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될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혀 만나는 일이 없었다. 예를 들어 마네를 추모하고 이를 기리기 위해 전시를 개최한다거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마네의 작품을 경매에 붙이는 일을 제외하고는 만나야 할 이유조차 없었다.
마네가 남긴 작품들과 아틀리에를 비롯하여 이곳저곳에 흩어져있는 작품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 프루스트, 뒤레, 수잔, 귀스타브와 으젠이 한 자리에 모였다. 마네에 대해 늘 적의에 차 있던 조형예술부는 정부가 나서서 마네의 작품 전시를 한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나섰다. 그러자 전직 문화부장관이자 현직 국회의원인 프루스트가 직접 나서서 마네의 유작을 전시하는 일에 전적으로 매달렸다.
쥘 페리는 상당히 난처하게 되었다. 자신에게 모든 일을 다 맡겨버린 것이 영 달갑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프루스트 같은 상관이나 다를 바 없는 이의 부탁을 거절하기도 난감했다. 마네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는 것에 낯빛을 붉히면서 이를 몹시도 못마땅하게 여겼던 쥘 그레비는 마네를 기리는 작품 전시를 개최하는 일 자체가 명예스럽지 못한 일일뿐더러 위험한 발상이라는 이유를 들어 거부하고 나섰다.
후원회는 사전에 작품을 분류하거나 선별하지 않은 채, 일단 마네의 작품을 있는 그대로 전시하기로 결정했다. 즉, 불온한 작품이라 여긴 작품들마저 사전에 걸러내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의 마네의 진면목을 보여주기에 충분한 작품들을 전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야말로 마네가 그토록 오랫동안 소중하게 간직해 온 염원이 구체화되는 순간이었다. 마네의 작품이 한 자리에 다 전시되었기 때문이다.
놀라운 건 이 전시야말로 마네가 내면의 화가이면서 도시 화가를 꿈꿨을 뿐만 아니라, 가장 세련된 파리지앵일 것 또한 늘 고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누구나가 떠올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는 점이다. 수백 명도 더 되는 선원들이 한때 수병이었던 자의 21년간의 경력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을 순간이 마침내 도래한 것이기도 했다. 바다는 그처럼 마네의 작품에 강렬한 흔적을 남겼다. 전 생애에 걸쳐 파도의 물보라가 마네를 견인하고 있었던 셈이다.
1884년 1월 바지흐에 의해 마네에 관한 최초의 연구가 시작되면서 작가 연구에 관한 글들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마네의 작품은 변함이 없건만 일반 대중의 시각은 완전히 뒤바뀐 상태였다. 마네의 죽음을 계기로 마네를 싫어하고 그가 그린 작품을 회피하던 경향에서 이제는 더할 나위 없이 가까우면서도 친근하게 여기는 쪽으로 바뀐 것이다.
마네는 바야흐로 새로운 회화 장르를 활짝 열어젖힌 화가이자 심미적 기준을 새로이 설정한 예술가로 자리매김될 수 있었다. 마네야말로 부단히 자신의 회화 예술을 새롭게 혁신하면서 동시에 현대성을 추구해 온 당대의 가장 진보적인 예술가였다는 사실을 비로소 인정한 셈이다. 마네에 대한 모욕이나 무시 또한 마네의 작품에 대한 경멸적인 반응이나 태도조차도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마네의 작품이 경매에 부쳐지자 드루오 경매장은 그야말로 일대 혼잡의 극치였다. 또한 전혀 뜻밖의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경매에 부쳐진 마네의 작품들은 도합 116,637 프랑이라는 거액에 낙찰되었다. 수잔과 레옹은 놀라운 광경에 어리둥절하여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상황만 지켜봤다.
일반 대중조차도 마네가 대단히 탁월한 예술가였을 뿐 아니라 모두가 그를 잘못 판단하였다고 믿기 시작했다.
마네의 기일에 즈음하여 친구들이 다시 모였다. 인상파 화가들 대부분이 자리한 가운데 1884년 5월 마네가 그림을 그린 바 있는 「원조 라뛰유(Le Père Lathuille)」 레스토랑에서 성대한 연회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서 인상파 화가들은 돌아가면서 마네를 추모했다. 마네에 관한 전설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5년의 세월이 흐른 뒤, 1889년 프랑스는 대혁명 100주년을 기리는 만국박람회를 개최했다. 만국박람회에 마네의 작품을 전시해야만 한다는 강력한 요구에 따라 프랑스 정부는 이를 적극 추진하고 나섰다! 이로써 15점에 달하는 마네의 그림이 만국박람회 전시장에 전시되기에 이르렀다. 그것도 명예의 전당에 당당히 내걸렸다.
마네의 그림이 전시된 입구는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없이 수많은 관람객들로 들끓었다! 한 미국인이 「올랭피아(Olympia)」를 사겠다고 적극 나섰다. 그러자 모네 역시 적극적으로 클레망소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는 반드시 루브르에 걸려야만 한다는 것이 모네의 주장이었다. 그 당위성을 클레망소가 공표하고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마네의 그림을 사들일 만큼 재정이 충분치가 않았다. 따라서 자연 기부금을 모으는 쪽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이 일에 모든 친구들과 지인들이 뜻을 함께 했다. 선두에 모네가 섰다. 그들은 반드시 「올랭피아」가 루브르에 소장되어야만 한다는 이유를 들어 그림을 구입하기 위한 기부금 모금 사업에 발 벗고 나섰다. 오직 졸라만이 돈 한 푼 내지 않고 버텼다. 인색한 건지, 변절한 건지, 아니면 맘이 내키지 않은 탓인지, 박정한 것인지는 몰라도 졸라는 끝내 마네를 등져버렸다.
졸라를 제외한 친구들과 지인들이 모은 돈은 2만 프랑에 달했다. 이 돈은 「올랭피아」를 구입할 목적으로 그림을 소유하고 있는 수잔에게 건네졌다. 구입한 그림은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그런 연유로 클레망소는 그림을 루브르에 소장 전시하도록 압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이제는 늘 정부가 하는 일을 트집 잡고 비난하기를 좋아하던 아카데미 소속 공무원들이 나서서 마네의 그림을 받아들이는 것을 강렬히 거부하고 나섰다.
끝까지 혈전을 치러야만 하나? 「올랭피아」는 처음에 뤽상부르 미술관에 걸렸다가 나중에야 루브르 박물관 대기실에 걸리게 되었다. 이후로 「올랭피아」는 까유보트가 사망하면서 봇물을 이루듯 다수의 인상파 화가들이 자신의 작품들을 국가에 유증할 때까지는 홀로 루브르 박물관 한쪽 대기실 벽을 지키고 있었다.
드가 이외에도 세잔과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시슬레가 자신의 작품들을 국가에 기증했다. 1876년에 작성된 마네의 유언장에 따르면, “작품들은 일반 관람객들의 작품을 대하는 감식안이 일취월장하여 국가가 작품들을 구입할 것을 확실히 표명하고 나설 때까지는 유산 상속인들이 이를 보관한다. 만일 국가가 이를 구입하여 소장 전시한다 해도 뤽상부르 미술관 한 자리에 작품들을 일별할 수 있도록 전시함으로써 작품들이 서로 나뉘어 전시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라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다.
다른 이들 역시 마네와 똑같은 전철을 밟았을까?
마네의 「올랭피아」가 루브르에 소장 전시되기까지는 마네가 사망한 뒤로도 10년 이상이나 걸렸다. 그것도 한밤중에 은밀히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마치 새벽에 정치범을 비밀리에 긴급히 이송시키기 위한 작전을 방불케 했다.
마네의 그림이 비싼 값에 팔리는 상업적 성공은 오히려 그림을 유증 받은 가족들 간에 벌어진 언쟁의 불씨가 되었다. 가족들은 탐욕적일 정도로 부유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제 더는 돈 걱정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부를 과시하기까지 했다.
베르트와 으젠은 수잔과 레옹이 에두아르 마네의 아틀리에까지 손대어 돈벌이 장소로 운용하는 것에 질겁했다.
레옹과 린호프 일가의 집안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받고 작품을 팔기 위해 작품들에 손을 대고, 자르고, 다시 제작하는 짓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 모두가 오직 더 많은 돈을 받아내기 위해 마치 시신을 훼손하여 장기를 판매하는 짓 같은 서로 긴밀히 연결된 작품들을 잘게 조각내기까지 했던 것이다. 어느 모로 보나 좀 더 자신들이 유리하게 그림을 판매할 목적이었다. 더군다나 마네의 것이라 절대 여길 수 없는, 살아생전에 마네가 그린 것이라고 보기 어려운 그림까지도 버젓이 마네란 이름으로 서명된 채 팔려나갔다.
이런 짓에 드가는 분노하여 마네 집안사람들을 혐오하고 증오하고 나섰다. 이를 지켜본 예술가들은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위안을 삼았다.
마네가 세상을 뜬 지 3년째 되는 1886년에는 이미 분열되다시피 한 인상파 화가들 그룹의 마지막 전시회를 기점으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해 오던 인상파 화가 집단이 완전히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이 또한 상징적인 사건이 되고 말았다.
상징적인 사건에는 끼지 못할 일이긴 하지만, 갑작스러운 사망사고가 연이어 터졌다. 1892년 4월에 신경 쇠약으로 으젠이 죽고, 1894년에는 마네의 사촌이며 더 없는 친구이자 조력자였던 쥘 드 주이가 사망했다. 1895년에는 베르트 모리소마저 딸의 두 팔에 안겨 숨을 거뒀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를 뛰어난 예술가로 자리매김하도록 온갖 도움을 준 말라르메와 르누아르, 모네가 지켜보는 가운데서였다. 1898년에는 말라르메마저 그들 곁을 떠났다.
그런 와중에 드레퓌스 사건이 터졌다.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전 지역을 들썩거리게 만들 정도로 일대 이슈로 자리했다. 인상파 화가들마저 뿌리 채 흔들어 버린 최후의 일격이기도 했다. 인상파 화가들의 모임은 마네가 죽고 난 뒤로 온갖 갈등을 봉합한 채, 겨우 명맥만 유지해 오던 중이었기에 더욱 심각한 상황이었다.
가장 비정하면서도 비열한 것은 다름 아니라 모두가 프랑스 인들일뿐인 서로 간에 대립하고 대결하는 양상이 구축되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오랫동안 억눌러 참아왔던 감정이 마침내 폭발하고야 만 것이다. 세잔과 드가 그리고 르누아르는 결국 드레퓌스를 옹호하는 졸라와 모네, 피사로, 시슬레와 함께 드레퓌스를 모함하는 이들에게 격렬하게 대항하고 나섰다.
사실 마네가 세상을 뜬 이후로 인상파 화가 집단은 더 이상 어떤 활동도 하지 않은 탓에 존재감마저 없어진 것이 사실이다. 비록 일반적으로 대개가 다 마네가 아니었다면 이들 화가 집단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현대성을 추구한 예술을 출현시켜야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더하여 마네야말로 회화에 있어서 주제에 일치하지 않은 온갖 괴상망측한 의미부여나 가치판단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나선 최초의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앙드레 말로가 적극 표명하고 나서기까지 했다.
수잔은 1906년 코엘라란 성씨를 지닌 양자로 삼은 아들 집에서 사망했다. 코엘라는 “주민등록상으로 일반인에게 공표된 바”에 따르면 단 한 차례도 결혼한 적이 없는 걸로 나온다. 살아가는 동안 평생 모친을 들들 볶기만 하던 자식이었다. 그에게는 동거녀가 있었는데, 팡퓌용이란 아가씨를 만나 함께 살림을 차리기도 했다.
동거녀는 한때 산란을 촉진하는 사료를 개발하여 축산업에 공로한 바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우수 농업인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레옹 코엘라는 홀로 살다가 1927년 사망했다. 자식도 없었고 미숙하게도 낚시용 미끼로 사용하는 구더기를 재배하여 이를 판매하는 사업을 벌이다가 쫄딱 망한 직후였다. 「낚시」란 그림은 그렇듯 그의 부모 두 사람의 모습을 담은 유일한 그림이었던 셈이다!
생애 둘도 없는 친구였던 프루스트는 파나마 운하 사건에 휘말려 손해배상에 전적인 책임이 있다는 법원 판결이 내려진 직후인 1905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네 주변 인물들은 어느 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다 변사를 당한 케이스였다. 급변하는 시대적 상황에 그들이 몸담고 끼어든 적이 없다손 치더라도 급변한 상황은 그들을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매 시대마다 예술가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당대의 삶에 책임을 지고 살아가면서 이를 표현할 것까지도 운명적으로 부여받는다. 이는 예술가가 다가올 시대를 미리 예견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돌을 던지듯 온갖 비난을 쏟아내면 쏟아낼수록 던져진 돌들은 그와 같은 비난을 받은 인간을 더욱 단단하게 조상(彫像) 지우는 밑받침 돌판이 될 뿐이다.”
- 쥘 드 마흐톨드
[1] 초창기에 그린 마네의 이 그림은 플랑드르 회화에 영향을 받은 탓에 마네나 수잔이나 할 것 없이 두 사람 모두 플랑드르 지방의 복식차림이다. 네덜란드 태생인 수잔을 생각하고 그린 그림이어서인지는 몰라도 파리 인근 생투앙의 세느 강변 풍경치고는 상당히 고답적이다. 멀리 낚시질을 하고 있는 레옹으로 말미암아 마네는 그림 제목을 ‘낚시’라 이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