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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한게 아니라 지켰던 겁니다

유소년 축구클럽스토리-②

by Tov


클럽에서 코치의 역할은 무엇일까? 단연, 축구를 잘 가르치는 것이다. 그와 더불어 한 가지 중요한 역할이 더 있는데 그건 ‘살리는 것’이다. 유소년 남자아이들은 어떤 면에서 매우 투명하다. 평소에 아무리 잘 감추고 있더라도, 경기에 열중하다 보면 자기가 가진 기질이 선명히 드러나게 된다. 그렇기에 그날그날의 경기는 참 소중하다.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아이들의 ‘마음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그 소리는 아이들을 살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클럽 코치들은 매일 회의를 한다. 전날의 수업을 피드백하고, 수업 간 있었던 특이사항(결석, 다툼, 클래스 편성 등)에 대해 나눈다.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친구는 사정을 다같이 공유하고 어떻게 해결하는 게 좋을지 생각을 모으는데, 한때 회의마다 자주 등장했던 아이가 있다. 5학년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다. 아이는 수업이 시작 30분 전에 미리 와서 공을 차고 놀고, 웬만해서는 결석하는 일도 없다. 뽀얀 얼굴에 통통한 그 친구는 코치를 보면 먼저 인사를 건넨다. 아이엄마는 아이가 틱성향(흥분하면 자기도 모르게 욕을 하게 되는)이 있다고 했다. 아이에게 축구가 꼭 필요한 것 같아 클럽에 보낸다고도 했다. 그날 그 아이는 경기를 마치고 울음이 터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상황은 이랬다. 그 아이는 주로 골키퍼 역할을 하는데, 실점을 여럿 한 모양이다. 골키퍼 역할인 데다 실점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아이는 무척이나 속상해했다. 그 와중에 같은 팀 동료가 그 친구에게 화를 낸 것이다. 심지어 1살 동생이. 그날의 30분 경기를 위해 태어난 아이들 마냥 뛰어다니는데 실점을 해버렸으니 화가 날 법도 하다. 그 아이는 동생에게 무어라 말하지 못하고 집으로 갔다. 눈물자욱이 가득한 채로. 특이사항이 발생했다면 날을 넘기지 않고 당일에 통화하는 걸 원칙으로 한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목소리가 다소 격앙되어 있었다. 나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차분히 설명했다. 어머니는 어려웠던 마음을 전했다.

“선생님. 너무 속상합니다. 울면서 들어오는 아이에게 저도 모르게 화를 냈어요. 왜 아무 말 못 하고 가만히 있었냐고요. 동생이 형한테 그러면 욕이라도 했어야지, 왜 그냥 당하고만 있었냐고요.”

“네. 어머니 너무 속상하시죠..”

“네. 선생님. 사실 저희 아이가 지난주 일요일에도 교회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거든요. 어떤 아이한테 먹을 것을 그냥 뺏긴 모양이에요. 그 일이 있고 나서 연달아 축구장에서 이런 일이 생기니 너무 어렵네요. 아이가 그냥 당하기만 하는 것 같아서요, 축구가 아이에게 꼭 필요해서 클럽에 보내는 건데..”

아뿔싸. 바로 며칠 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니. 자기 아이가 당하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엄마가 어디 몇이나 있을까. 어머니의 속상한 마음이 너무도 공감이 됐다. 나는 어떻게 상황을 풀어갈지 고민하다 얼마 전 우연히 봤던 아들교육 전문가의 코칭 영상이 기억이 났다. 영상의 내용도 비슷했다. ‘학교에서 맞고 들어온 아이에게 엄마는 뭐라고 대답해줘야 할까’가 주제였다. 그 전문가는 ‘왜 너도 똑같이 대응하지 못했어! 왜 당하기만 했어! 다음엔 똑같이 갚아줘 버려!’와 같은 말은 아이를 살리지 못한다고 했다. 이미 맞고 들어와 내면이 움츠려든 아이에게는 도움 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해줘야 한다고 했다.

“아이야. 친구한테 맞았지만, 너도 똑같이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은 것에 대해 엄마는 대단하다고 생각해.”

나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너무 속상하실 것 같아요. 얼마 전에도 교회에서 그런 일이 있었고, 또 아이가 좋아하는 축구클럽에서 비슷한 일이 생기다니요. 그런데요 어머니, 저희 클럽에서 코치들이 강조하는 규칙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같은 팀 동료한테 절대 비난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흥분해서 비난의 말을 했다면 잠시 퇴장시켜서 진정하도록 돕습니다. 제가 볼 때 이 아이는 그 상황에서 코치선생님들이 강조했던 규칙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게 아니었을까요? 자기도 똑같이 대응할 수 있었지만 비난하지 않으려고 했던 게 아니었을까요. 어머니께서 오히려 아이가 규칙을 지키려 했던 마음을 칭찬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이엄마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엄마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아이를 격려해 줘야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날이 지나 아이는 늘 그렇듯 30분 전에 일찍 와서 공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규칙(規則)의 규는 한자어로 법 규(規)자이다. 이 ‘규’자는 夫(지아비 부)자와 見(볼 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夫자는 상투를 틀고 비녀를 꽂은 남자를 그린 것으로 ‘지아비’나 ‘남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고대에는 결혼하거나 성인이 되어야 비녀를 꽂을 수 있었다. 그래서 夫자는 어른을 뜻한다. 어른을 뜻하는 夫자에 見자가 결합한 規자는 ‘어른의 안목’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아이에게는 어른의 안목이 필요했다. 동생이 함부로 했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게 아니었음을 바라봐 줄 사람, 속상했던 마음을 만져줄 사람, 그토록 좋아하는 축구가 싫어지지 않도록 해줄 사람, 다시금 좋아했던 골키퍼 그 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 아이가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았던 게 아이로 하여금 성숙한 규칙으로 자리 잡아 또 다른 누군가에게 따스한 규칙으로 다가가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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